누가복음 16:22-24 나사로는 죽어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고 부자는 죽어서 그냥 땅에 묻혔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자는 전혀 상황파악을 못하고 지옥에서 고통 받으며 아브라함에게 나사로를 시켜 자기의 혀끝의 갈증을 풀어달라고 부탁한다.
이전 말씀에서 예수께서는 재물을 우상으로 섬기며 사랑하면서 거짓된 거룩의 옷을 입고 살던 바리새파 사람들을 가르치기 위해 날마다 로마의 귀족들처럼 호화롭게 사는 부자와 그 집에서 개들과 함께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던 나사로의 이야기를 비유로 전하셨다. 이어지는 말씀은 부자와 나사로가 죽은 뒤에 서로 처지가 뒤바뀐 내용이다.
바로앞부분은부자는가장높은자리에서호화롭게잔치를벌이며살고있는데나사로는가장밑바닥에서개들과함께더럽게살고있다는비교였다.하지만이러한차이는죽음으로인해반전이된다.어느날거지나사로도죽고부자도죽었다.하나님께저주받은자라고생각되던나사로는죽어서천사들이하나님앞에있는아브라함의품에안기게되었다.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있다는 말은 여러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품에 있다는 말은 부모의 무릎에 누워있는 아이의 모습이나 잔치에서 잔치를 베푼 주인에게 가까이에 있는 모습이나 창세가 15:15절에서 조상들과 함께 묻혔다는 의미일 수 있다며 불쌍한 나사로가 종말론적 잔치에서 아버지인 아브라함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모습으로 해석할 수 있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다는 말을 단순히 죽었다는 뜻의 장례용어로 본다면 21절과 연결되어 대비되는 연결 고리가 끊긴다. 21절에서 부자는 땅에서 날마다 잔치에 참여하여 즐겼다면 이제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가족으로 아브라함과 가장 가까운 자리인 아브라함 가슴 앞에 누워있는 장면으로 이해할 수 있다. Triclinium에서 잔치의 주인인 아브라함의 가슴 바로 앞에 눕는 사람은 가족 중에서도 가장 친밀한 관계에 있는 사람이 눕던 자리이다. 21절과는 정반대로 바리새파 사람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자라고 여기던 부자는 개역은 장사되었다고 번역했는데 원어는 그냥 땅에 묻혀버렸다는 뜻이다. 여기까지만 듣고도 바리새인들은 엄청난 충격과 함께 분노를 느꼈을 것이다.
그 다음에 나오는 묘사는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훨씬 더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부자는 지옥에서 고통 중에 고개를 들어 높이 쳐다보니 저 멀리 높은 곳에 아브라함이 보이고 그 품에 나사로가 있는 것이 보였다. 21절을 보면 살아있을 때는 부자가 높은 곳에서 잔치를 벌이고 나사로는 낮은 땅에서 개처럼 기어다니며 부자들이 손을 닦고 버린 빵 조각을 주워 먹었다. 이제 정반대로 나사로는 높은 자리에 있고 부자는 낮은 곳에 있다.
지옥에서고통받고있던부자는울부짖는목소리로아버지아브라함을불렀다.나사로를보내서그손가락끝에물을적셔자기혀를시원하게해달라고부탁한다. 부자는지옥에서도 나사로를시켜서 자신을위해일하도록하게할수있다고생각하고있다며여전히소경이고전혀회개하지않은것이라고말한다. 나사로에대한부자의태도는전혀변하지않았다.
이 부자의 잘못이 무엇인가? 아직도 자기의 유익을 위해 물을 달라고 간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부자는 세상에서 살때와 달라진 것이 없다. 이 부자의 간구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점은 때가 늦었는데도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에서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잠깐 주어진 시간을 활용하라고 했다. 그러나 부자는 그 때를 놓쳤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는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와 전혀 다른 내용인 것 같지만 사실 예수께서 말씀하시려는 가르침은 똑같다. 우리는 이미 해고 통보를 받은 사람들이고 해고될 날은 정해져 있다. 해고될 날이 점점 다가오는데 그 주어진 짧은 시간 동안에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며 살라는 것이다. 우리도 부자와 나사로처럼 이미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들이다. 형이 집행될 날을 기다리며 산다면 남은 삶의 시간동안 하나님의 마음으로 자비를 베풀며 용서하고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 그러면 우리도 우리 주님의 잔치 자리에서 주님과 가까운 자리에서 그 잔치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