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6:19-21 예수께서는 재물을 우상으로 섬기며 사랑하면서 거짓된 거룩의 옷을 입고 살던 바리새파 사람들을 가르치기 위해 날마다 로마의 귀족들처럼 호화롭게 사는 부자와 그 집에서 개들과 함께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던 나사로의 이야기를 비유로 전하셨다.
이전 말씀에서 예수께서는 구약성경은 요한의 때까지이고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선포되고 있고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고 애를 쓴다며 하나님 말씀을 왜곡하는 바리새파 사람들을 이혼의 예를 들어 책망하셨다. 이어지는 말씀은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로 바리새파 사람들의 속 마음에 있는 탐욕을 책망하시는 내용이다.
이혼 문제와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는 연결이 안되는 것 같지만 분명히 연결되는 내용이다. 비유는 앞에서 가르치신 내용을 설명하기 위한 증거로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원어에 보면 접속사로 앞부분과 연결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아내를 버리고 새로운 아내를 맞이할 수 있는 사람은 돈이 많아야 가능하다. 아내를 데려오려면 그 부모들에게 돈을 지불해야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난한 남자는 있는 아내와 그냥 살 수 밖에 없었고 더 가난한 남자는 결혼 조차도 할 수 없었다. 아내를 버리며 이혼 증서를 써주면 그만이라고 하던 바리새파 사람들의 탐욕을 책망하시려고 부자와 나사로에 대한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다.
바리새파 사람들의 비극은 하나님께서 혐오하는 우상숭배를 하면서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돈이 많은 것 은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축복하신 증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저들에게 예수께서는 누가복음18:25에서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제자들까지도 “그러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라고 질문을 했다. 이 말은 제자들도 역시 바리새파 사람들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 질문이다.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다 부자였기 때문이다. 바리새파 사람들의 이런 주장은 신명기 28:13의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실 것이라는 말씀에 근거한 것이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정결법을 잘 지키면서 돈도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하신 증거라고 생각했다. 반대로 정결법을 지키지도 않고 가난한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들이라고 했다. 바리새파 사람들의 문제는 저들이 자기 만족에 빠져 있고 돈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사두개파 사람들처럼 큰 부자는 아니기에 재물에 대한 비유는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맞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바리새파 사람들은 상당한 재산을 소유하고 있던 상류층 사람들이었고 경건한 사람들이라는 최고의 명예도 갖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저들이 돈이 있었기에 아내를 함부로 버리고는 이혼 증서를 써주며 합법이라고 했기에 그 속 마음에 숨겨두고 있던 우상인 돈을 사랑하는 마음을 드러내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았다고 생각되던 거지를 믿음의 영웅으로 묘사해서 말씀하신 것이다. 부자는 바리새파 사람들 입장에서 축복받은 영웅이지만 예수께서는 반대로 지옥에 떨어진 악한 죄인으로 묘사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저들의 속 마음을 다 아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먼저 이 땅 위에서 부자와 나사로의 처지를 묘사한다. 첫번째 등장인물인 부자는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증거라며 높임을 받지만 정작 하나님께서 혐오하시는 우상숭배자였다. 반대로 거지 나사로는 사람들 중에는 저주 받은 죄인이라고 멸시당하지만 하나님께는 높임을 받던 자였다. 부자는 자색옷과 고운 베옷을 입었다고 했는데 이는 아주 고귀한 사람들만 입던 값비싼 옷들이다. 이런 옷을 입고 살았다는 말만 들어도 예수님 당시 사람들은 저가 얼마나 큰 부자인지 상상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옷을 입었다는 것은 깨끗하고 고귀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 부자는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는 말은 날마다 최고의 파티를 열면서 살았다는 뜻이다. 이는 팔레스타인의 부자들이 로마의 상류층들이 하는 것을 모델로 삼아 흉내낸 삶의 방식이다. 오늘날로 말하면 수백만 달러 짜리 집에서 살면서 수십만 달러짜리 차를 타고 다녔고 날마다 사회 명사들을 불러 호화로운 파티를 벌였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두번째 등장인물인 나사로라는 거지는 부자의 집 대문 앞에 온몸이 상처로 뒤덮인 채 누워있었다. 누워있다는 말은 원문에서는 다른 사람들이 문 앞에 침대 째로 계속해서 완전히 집어 던져졌다는 뜻이다. 이 사람은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사람이고 아프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침대 째로 들어다가 부자 대문 앞에 던져놓고 간 것이다. 더구나 온 몸이 헐어서 그 상처로 뒤덮여 있었다. 상처로 뒤덮여 있었다는 말은 부정하다는 말이다.
21절에서 이 사람은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배를 채우려고 했다고 했다. 이 사람은 불편한 몸을 이끌고 기어다녔을 것이다. 배를 채운다는 말은 누가복음 15:16절에서 굶주리던 작은 아들이 돼지 쥐염 열매로 배를 채우려 했다라는 말과 같은 말이다. 부자는 날마다 호화롭게 잔치를 하는데도 부자의 마당에 기어다니던 나사로는 굶주려 죽을 지경이었다는 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식사를 할 때 빵조각으로 손을 닦은 뒤 집어 던졌다. 그러면 개들이 와서 받아 먹었다. 어떤 학자는 개들이 상처를 핥은 것을 개들이 나사로를 불쌍히 여긴 것이 아니라 그 상처에 있는 진물을 핥아먹은 것이라고 말한다. 본문의 문맥 자체가 개들이 나사로의 상처를 핥는 것이 아픈 거지가 구걸하는 것보다 나쁜 상태인 것처럼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를 키워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개들이 핥아준다는 것은 호의를 베푸는 것이다. 나사로는 개들과 친구였던 것이다. 개들처럼 기어다니며 함께 주워 먹었다. 때로는 자기가 가진 것을 개들에게도 나누어 주었을 것이다. 개들의 친구였기에 개들이 상처를 핥아준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는 개들까지도 핥는 것을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을 주워 먹으려는 것보다 더 나쁜 것처럼 썼을까?
이는 유대인들에게 개들은 부정한 동물이었기 때문이다. 개가 핥았다는 것은 상처로 뒤덮인 것보다 더 부정한 것이다. 상처로 뒤덮인 나사로를 개가 핥았다는 말은 때가 덕지덕지 붙은 거지에게 똥물을 퍼부은 것과도 같이 말할 수 없이 부정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러나 성경에서 부정하다는 말은 위생적인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는 더러운 죄인이라는 뜻이다. 바리새인의 관점에서는 나사로는 정결법을 위반한 불결한 사람이었다. 이러한 것을 바리새파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땅에서는 부자는 하나님의 가장 사랑받는 사람으로 인식되었고 나사로는 최고로 저주를 받은 죄인이고 부정한 사람으로 인식되었다.
이 세상에서 재물이 많거나 신분이 높은 사람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증거는 절대로 아니다. 이 세상에서 가난한데다가 질병으로 많은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세상 사람들은 많이 가졌고 많이 배웠고 많은 것을 누리고 사는 사람들이 복을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는 절대로 그런 태도를 가지면 안된다. 우리 주님께서 가장 낮은 자리에서 종의 모습으로 섬기시며 우리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고통 받는 사람들과 함께 하며 우리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그들을 존중해줘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