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1:5-8 예수께서는 기도를 가르쳐주신 뒤에 한 밤중에 찾아온 친구를 위해 이웃에 가서 빵을 꾸어달라 하면 아무도 거절할 사람이 없다는 것을 비유를 통해 말씀하시며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기도를 들어주신다고 하셨다.
이전 말씀에서는 예수께서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이 자신들의 특징을 나타낼 수 있는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하자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셨다. 이어지는 말씀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신다는 것을 밤중에 찾아온 친구의 비유로 말씀하시는 내용이다.
5-8절은 이처럼 기도한다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응답하실 것이라는 비유이다. 이는 예수님의 기도의 비밀을 공개한 것이다. 응답받는 능력의 기도는 자기 자신의 욕심을 위한 기도가 아니다. 하나님 나라와 이웃을 위한 중보기도가 바로 능력있는 기도의 비밀인 것이다. 이 비유는 원어에서는 “너희 가운데 누구에게”라는 말로 시작한다. 이 공식은 누가복음에서 항상 “절대로 그럴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대답을 기대할 때 쓰는 공식이다. 오늘 비유를 들은 예수님의 청중들도 모두 다 아무도 그렇게 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한 사람이 밤 12시쯤에 옆집에 사는 친구에게 찾아가 빵 세개를 달라고 했다. 손님이 먼곳에서 자신의 집에 찾아왔는데 대접할 빵이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친구라는 말은 단순히 사회적 지위가 비슷한 사람들을 말한다. 주인과 소작인의 관계가 아닌 같은 소작인 신분일 때 유대인들끼리는 친구라고 불렀다. 이웃에 살아도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이 있다면 절대로 친구가 아니다. 이 친구는 친한 친구가 아니고 전혀 모르는 사람일 수도 있다. 이 친구는 아마도 먼 나라에 살던 디아스포라 유대인일 가능성도 있다. 예루살렘 성전으로 예배를 드리러 가려고 가다가 밤 12시쯤 남의 집 문을 두들겼을 수도 있다. 서로 모르더라도 함께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라면 반갑게 맞아주는 것이 예의였다. 당시 팔레스틴 사람들은 먼길을 여행할 때 밤중에 걷는 경우가 많았다. 낮에는 햇볕이 너무 뜨겁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셀폰도 없었기 때문에 예고 없이 찾아올 수 밖에 없었다. 잠을 자다가 깨어 손님을 맞이한 것이다.
7절은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을 가상으로 말한 것이다. 빵 세개만 빌려달라고 했는데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잠자리에 들었기 때문에 줄 수 없다고 할 사람이 있겠느냐는 것이다. 저와 여러분이라면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예수님 당시의 청중들은 아무도 그럴 사람이 없다라고 입을 모아 대답했을 것이다. “너희 중에 누가” 라는 공식은 세상에 그럴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8절은 실제 당시 사람들이 대부분 취할 행동을 말한다. 8절에서는 친구됨을 인해서는 주지 않을지라도 졸라대는 것 때문에 줄것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졸라댄다는 말은 “부끄러움없는이라는 말이다. 계속 졸라대기 때문에 주는 것이 아니다. 안주면 마을 사람들 전체로부터 손님대접도 안한 사람이라는 부끄러운 낙인이 찍히기 때문에 주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 청중들은 7절처럼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두가 8절처럼 일어나 줄것이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명예와 마을의 명예가 땅에 떨어지기 때문이다.
7절에서 문이 닫혔기 때문에 줄 수 없다는 말은 말도 안된다. 문을 여는 것이 오늘날 처럼 간편하지는 않았어도 어린 아이들도 쉽게 풀 수 있는 것이 문빗장이었다. 아이들이 잠자리에 들었기 때문에 줄 수 없다는 말을 이해하려면 당시 집 구조를 알아야 한다. 당시 팔레스틴의 농부들의 집은 오늘날의 스튜디오와 같은 구조이다. 마태복음 5:15절에 보면 등불 하나가 집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비춘다고 했다. 이는 집이 창고와 같은 형태로 되어 있다는 뜻이다. 한곳에서 매트리스를 깔고 아이들과 부모가 한자리에 누워 잠을 잤다. 한 사람이 일어나면 모두가 다 깰 수 밖에 없는 가옥 구조였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런 경우 누구나 다 일어나 빵을 주었다.
오늘날 미국이나 유럽사람에게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7절처럼 거절할 사람있느냐고 물으면 대부분 Yes 라고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중동사람들에게 같은 질문을 한다면 오늘날도 100퍼센트 No 라고 대답한다. 왜 그럴까? 이를 이해하려면 문화를 알아야 한다. 서구 성경학자들은 흔히 현대 서양문화와 고대 지중해 연안 문화의 차이라고 말한다. 현대 서양문화는 개인 중심의 문화이고 고대 지중해 연안 문화는 그룹 중심의 문화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룹 중심의 문화는 단순히 고대 지중해 연안의 문화만은 아니었다. 고대 지중해 연안뿐 아니라 인도나 중국 한국 일본까지도 근대화 이전에는 모두 다 그룹 중심의 문화였다. 개인 중심의 사회는 개인과 개인간의 경계가 명확한다. 개인중심의 사회에서는 도시나 국가 같은 공동체는 단지 개인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개인의 연합에 불과한다. 하지만 그룹중심의 사회에서는 개인간의 경계보다 그룹 전체의 경계가 훨씬 더 명확한다. 이런 사회에서는 개인은 공동체의 명예를 위해 희생해야 했다.
오늘 한밤중에 찾아온 친구 이야기도 마을 공동체의 명예를 이해하지 못하면 이해할 수 없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의 손님 접대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마을 전체의 문제였다. New Living Translation 은 8절의 “졸라대는”이라는 말을 직역하지 않고 잘 살려 의미를 살려 번역했다. NLT에 보면 “so his reputation won’t be damaged”라고 되어 있다. 만약 이웃이 빵 세개만 달라고 하는 요청을 거절하면 다음날 해가 뜬 다음 이 사실이 모든 마을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된다. 그리고 그는 온 마을 사람들로부터 손님접대를 거절한 사람들으로 부끄러움을 당했을 것이다. 그는 마을 전체의 명예를 더럽혔기 때문이다.
손님접대는 개인의 문제가 아닌 마을 전체의 문제였다. 이 비유에 나오는 손님이 개인의 손님이 아닌 마을 공동체 전체의 손님이었고 공동체 전체의 명예가 달린 문제였던 것이다. 마태복음 10:14절에도 보면 영접하지 않으면 그집이나 그 마을에서 나가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라고 했다. 복음 전하는 자들을 손님으로 영접하지 않는 것은 친구가 아닌 적으로 보는 행위이다. 이는 개인의 책임이 아닌 마을 전체의 책임이기에 그 마을에서 나가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라고 한 것이다. 사도행전 13:51절에서 바울과 바나바도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갔다고 했다. 따라서 손님을 맞이한 사람이 이웃에게 빵을 달라고 한 것은 당연한 요구한 것이었다. 내 손님이 아니고 마을 공동체 전체의 손님이기 때문이다.
왜 빵 세개만 달라고 했을까? 이 빵의 크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Rihbany가 쓴 “Syrian”이란 책에 보면 지름이 2피트가 안되는 크기의 납작한 빵이라고 했다. 당시 팔레스틴의 소작농들을 흔히 매일 빵을 구웠다. 그리고 저녁에는 약간의 빵을 남겨놓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 집에도 분명히 빵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손님에게 쪼개진 빵을 대접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기 때문에 빵을 얻으러 간 것이다. 쪼개진 빵을 대접하는 것은 먹다남은 밥이나 빵을 대접하는 것과 같은 것이기에 손님을 거지 취급하는 것과 같은 모욕이다.
성경 해석자들은 흔히 빵 세개에는 특별한 의미가 없고 단지 필요한 양을 뜻한다고 해석한다. 빵 세개라는 숫자에 특별한 의미가 있다기 보다는 한 사람이 먹기에는 충분하고도 남을 넉넉한 양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당시 유대 사람들에게는 손님에게 모자라게 주는 것도 예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본문의 이해를 돕기 위해 고대 팔레스틴 사람들의 음식먹는 습관을 알아보겠다. 당시 사람들은 한국의 찌개처럼 공통으로 사용하는 음식접시가 식탁 가운데 있었다. 이들에게 빵이란 칼이고 스푼이고 포크였다. 당시 사람들은 빵 한쪼가리를 떼어 가운데에 있는 접시에 담근 다음 전체를 한입에 넣어야 했고 한번 입에 넣은 조각은 다시 공통으로 사용하는 음식접시에 넣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정말 가난한 사람들은 소금을 찍어 먹었다. 그래서 빵을 소금찍어 먹는다는 말은 한국식으로 표현하면 똥구명이 째지게 가난하다는 말과도 같은 것이다.
이사람에겐 더럽혀지지 않은 빵을 찍어먹을 요리가 있었다. 하지만 쪼개지지 않은 빵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웃집에 가서 달라고 한 것이다.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공동체의 명예를 위해 부끄러움 없이 한밤중에 가서 달라고 한 것이다. 개역은 "강청함을 인하여" 라고 번역했고 새번역은 "졸라대는 것 때문에" 라고 번역한 말은 부끄러움이 없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어의 NIV와 NLT는 "persistense" 대신에 "sameless"로 번역한 것이다.
계속해서 졸라댄다는 뜻의 "persistense"가 말이 안되는 이유는 6-7절에서 찾을 수 있다. 손님이 찾아왔는데 먹을 것이 없다고만 했지 거절하는데도 불구하고 제발 달라고 간청하는 내용은 6-7절의 어느부분에서도 찾을 수 없다. 손님 대접할 빵이 없다고만 하면 아무도 밤이 늦어 줄 수 없다고 거절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는 원어의 문자적인 의미 그대로 부끄러움이 없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 이는 부끄러운줄도 모르는 뻔뻔함 때문이라는 뜻이 아니다. 너무나 당연한 요구이기에 부끄러움도 없이 달라고 한다는 뜻이다.
이 비유를 통해서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를 다시 비추어보면 교회 공동체를 위해 필요한 것을 담대히 하나님께 구하라는 것이다. 특히 어려운 형제 자매를 주님의 마음으로 섬기고 서로를 용서할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라는 것이다. 주님의 마음으로 사랑을 실천하려는 마음이 내 욕심 때문에 흔들릴 때 벗어나게 해 달라고 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도는 내 욕심을 위해 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담대히 구하라는 것이다. 이러한 기도를 안들어주시면 내 망신이 아니고 하나님 망신이기 때문에 들어주신다는 것이다. 잠을 자던 친구를 보고 하나님께서도 주무신다고 해석하면 엉터리 해석이다. 하나님은 이런 기도를 언제든지 들어주신다는 뜻이다.
이 비유는 앞에서 가르치신 기도에 대한 해설이다.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사람들에게 거룩히 여김을 받는 그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해 달라는 기도에 대한 해설인 것이다. 따라서 이는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이웃 사랑을 실천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기도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들어주신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