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8:40-42 예수께서 호수 건너편 유대인 지역으로 오실 때에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환영했고 그 중 회당장은 예수님 발 옆에 엎드려 죽어가는 딸을 살려달라고 간청을 했는데 무리들이 많아 숨이 막혀 죽을 지경이었다.
이전 말씀에서 거라사 지역 사람들은 모두 몰려와서 완전히 변화된 사람을 보고 두려워하면서도 예수님을 믿기 보다는 예수님께 떠나달라고 요청을 했다. 예수께서는 떠나시면서 귀신 나간 사람에게 명하여 가족들에게 전하라 하셨지만 귀신 나간 사람은 그 도시의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설교자가 되었다. 이어지는 말씀은 예수께서 유대인 지역으로 돌아오시니 회당장 야이로가 죽어가는 딸을 살려달라고 요청하는 장면이다.
40절은 예수께서 돌아오시니 무리들이 환영을 했다고 했다. 왜냐하면 이들 모두가 기다렸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수많은 무리들을 남겨두고 이방인 지역으로 가셔서 잠시 쉬시려고 하셨다. 떠나올 때 배 위에서도 주무셨다는 것만 보아도 얼마나 피곤하셨는지 알 수 있다. 이제 다시 그 무리들에게 돌아오시니 무리들이 열렬이 환영하는 장면이다. 이는 18:1-18절과 다시 연결이 된다. 예수께서는 하나님 말씀을 전하시는데 듣고 결실을 맺는 자는 적다고 하셨다. 예수께서 기적을 행하시는 것은 가르치신 말씀의 권능을 보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무리가 기다린 이유는 예수님의 말씀 듣기를 간절히 기다린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행하시는 치료의 권능을 간절히 기다린 것이다. 그래서 아주 반갑게 환영을 하는 장면이다.
41절은 원어에서 "보라!" 라는 말로 놀라운 구경거리가 생겼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 구경거리는 회당장 야이로라 하는 사람이 와서 예수의 발 아래 엎드려 자기 집으로 오시길 간청했다는 것이다. 회당장은 그 지역 유대교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정치적인 영향력이나 권력은 없지만 유대인 전체가 유대교를 믿는 상황에서 한 도시의 회당장이란 정말 대단한 존경을 받는 존재이다. 특별히 백성들을 가르치는 역할을 맡았던 바리새파 사람들의 우두머리였을 것이기에 그는 늘 예수님과 충돌을 했던 사람들의 우두머리인 셈이다. 그런 사람이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렸으니 정말 놀라운 구경거리이다.
원어는 개역처럼 발 아래도 아니고 새번역처럼 발 앞도 아니다. 원어의 문자적인 의미는 "발 옆"이다. 발 옆에 엎드렸다는 말은 제자가 되겠다는 자세이다. 예수님의 발 옆에 앉아서 듣는 제자가 되겠다는 의미일 수 있다. 엎드려서 한 말은 자기 집으로 들어오시라는 것이다. 간청했다는 말은 계속해서 간청을 했다는 뜻이기에 예수께서 즉시 응하신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존경받는 회당장이 자기 체면을 내려놓고 이렇게 계속해서 간절히 청하는 것은 정말 간절한 일이 있기 때문이다.
42절은 이유를 나타내는 말로 시작한다. 그에게 열 두 살 먹은 외동 딸이 하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녀가 계속해서 죽어가는 중에 있었다는 것이다. 열 두 살이면 이제 사춘기가 되어 여인의 모습을 갖춘 나이이고 꽃같이 아름다운 때이다. 당시 유대인 사회에서는 곧 결혼하게 될 나이였다. 그런 외동 딸이 꽃을 피우지도 못하고 죽어가고 있으니 야이로의 마음이 얼마나 안타까웠을지 알 수 있다. 그래서 야이로는 모든 체면도 내려놓고 예수님 발 옆에 엎드려 응답하지 않는 예수께 계속해서 간청했던 것이다.
드디어 예수께서 가겠다고 대답하시고 야이로를 따라갈 바로 그 때에 개역은 무리가 "옹위하더라" 라고 번역했다. 옹위한다는 말은 둘러싸서 보호한다는 의미이기에 잘못된 번역이다. 그래서 개역개정은 밀려들었다고 고쳐 번역했고 새번역은 밀어댔다고 번역한 것이다. 원어는 "함께" 라는 말과 숨이 막히거나 익사하거나 아니면 고문을 당하는 장면을 묘사할 때 쓰는 말이 합쳐져서 된 말이다. 이 말은 거의 짓뭉개지고 있다는 뜻이거나 거의 숨이 막혀 죽을 지경을 뜻할 수 있는데 이 구절에서는 숨이 막혀 죽을지경이라는 뜻으로 쓰인 것이다.
이는 마치 70년대 서울에서 출퇴근 시간의 시내버스를 탔을 때를 연상하게 하는 말이다. 숨이 막힐 정도로 가득찬 버스를 차장 아가씨가 온 몸으로 밀어대면 정말 숨이 막혀 죽을 지경이었다. 밀어댔다고 번역한 말은 바로 그런 장면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래서 개역개정과 새번역은 사전적인 의미로 번역하지 않고 밀어댔다고 의미를 살려 번역한 것이다. 빨리 가야 하는데 사람들에 떠밀려 압사할 지경이다. 야이로의 마음이 얼마나 급했을 지 알 수 있는 말이다.
딸이 죽어가지 않았더라면 회당장은 예수님의 발 옆에 엎드려서 간청하지 않았을 것이다. 계속 간청해도 아무런 응답이 없는 예수님께 계속해서 제발 자기 집으로 가달라고 간청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반대하고 대적하던 바리새파 사람들도 예수께서 죽어가는 사람도 살릴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고 모두 인정한 것이다. 그런 능력을 가지신 분은 하나님 뿐이기에 그들은 귀신의 두목의 힘을 빌어 능력을 행한다고 했던 것이다. 자신들이 잠시 누리고 있는 세상의 권위와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그렇게 했던 것이다. 그런데 딸이 죽게되자 그런 것 다 내려놓고 예수님의 발 옆에 엎드려서 모두의 구경거리가 된 것이다.
오늘날 우리도 예수님 당시 야이로처럼 자기 생각을 따라 하나님 말씀을 판단하고 해석하며 하나님 말씀의 참 뜻을 거부하기 쉽다. 문제는 자신이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 조차도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다. 자신은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야이로처럼 큰 위기가 닥칠 때에야 진정으로 자신을 내려놓고 예수님 앞에 엎드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위기는 우리의 잘못된 믿음을 깨달을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이다. 그 능력을 체험하고 나서야 우리는 우리 생각을 내려놓고 전적으로 그 말씀만 의지하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