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7:39-43 예수님을 초청한 바리새파 사람 시몬은 예수께서 더러운 죄인인 여인이 자신을 만져 더럽게 하는 것을 보고 마음 속으로 불평을 했을 때 예수께서는 그 생각을 아시고 500 데나리온과 50 데나리온 빚진 자들을 둘 다 탕감해 주었을 때 누가 더 사랑하겠느냐고 질문하셨고 시몬의 대답이 옳다고 하셨다.
이전 말씀은 예수께서 한 바리새파 사람의 집에 초대를 받아 갔을 때 죄인인 여자가 눈물로 예수님의 발에 비를 내리고 머리털을 수건삼아 닦아 드리며 그 발에 감사의 입맞춤을 하고 가장 귀한 향유를 그 발에 부어드렸다는 내용이었다. 이어지는 말씀은 시몬의 불평에 대해 빚을 탕감 받은 두 사람의 비유로 말씀하시며 누가 더 사랑하겠느냐고 질문하시는 내용이다.
39절은 앞에서 여자가 눈물의 비를 내리고 머리털로 닦아드리며 그 발에 입을 맞추고 귀향 향유를 부은 것을 본 집주인이 속으로 혼자서 마음 속으로 불평을 한 내용이다. 혼자서 중얼거렸다는 말은 원어에서 자기 자신에게 말했다는 뜻인데 개역처럼 자서 마음에 말했다는 뜻이지 불평을 말로 내뱉었다는 뜻이 아니다.
이 사람이 혼자서 생각한 말은 "이 사람이 만일 예언자였더라면 자기를 만지는 누구이며 어떠한 자인지 알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여자는 죄인이었기 때문이다" 라고 했다. 당시 유대인들은 죄인들과 접촉하면 접촉한 사람도 부정해져서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에 한 말이다. 예수님이 만약 예언자라서 그 여인이 어떤 사람인지 알았다면 못만지게 했을 것이라는 뜻이다.
4-5세기의 아주 중요한 대문자 사본 세개가 있는데 그 중 두 개의 사본에는 관사가 있어 "그 예언자자" 라는 뜻으로 기록되었다. 이는 예수가 바로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에 보내시겠다고 하신 바로 그 종말론적 예언자라는 뜻으로 관사를 넣은 것이다(신 18:15; 요 1:21; 6:14; 7:40). 그 밖의 대부분 사본들은 관사 없이 썼기에 단순히 예언자 중 한명이라는 뜻으로 쓴 것이다. 그러나 시몬은 예수가 종말론적 예언자라고 믿었다기 보다는 그 능력을 보고 예언자 중 한명이라고만 여겼을 것이다.
40절은 바리새파 사람이 마음 속으로 생각만 했는데도 예수께서 대답하셨다는 것이다. 이 바리새파 사람의 생각이 틀렸다. 예수께서는 그의 생각도 알았고 예수님을 만지던 여자가 누구인지도 다 알았다. 예수께서는 그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생각도 읽어낼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시몬에게 보여준 것이다. 예수께서는 시몬이 혼자서 중얼거린 소리를 듣고 대답하신 것이 아니라 마음 속으로 생각만 한 것에 대해 대답하셨다는 것이다. 마음 속의 생각까지 다 아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 뿐이다.
예수께서는 시몬에게 할 말이 있다고 하자 시몬은 예수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말씀해 달라고 말했다. 선생님이라는 말은 바리새파 사람들이 율법을 가르치는 사람들을 부르는 말이다. 바리새파 사람인 시몬은 예수께서 가르치시고 행하신 것에 대해 보고 듣고 나서 그 가르침을 들어보려고 초청했을 것이다. 이 호칭으로 보아 이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가 아닌 것이 분명하다. 누가복음에서 이러한 호칭은 대부분 제자가 아닌 사람들이 예수님을 부를 때 쓴 말이기 때문이다(눅 9:38; 10:25; 11:45; 12:13; 18:18; 19:39; 20:21, 28, 39).
41-42절은 예수께서 죄인인 여인과 바리새인 시몬을 두 빚진 자의 비유로 말씀하시는 내용이다. 41절에서 한 사람은 500 데나리온의 빚을 졌고 다른 한 사람은 50 데나리온의 빚을 졌다고 하셨다. 한사람은 약 1년 6개월치 품삯을 빚진 셈이고 한사람은 약 50일정도의 품삯을 빚진 셈이다. 새번역은 돈놀이꾼이라고 했는데 이는 오늘날 사채업자처럼 생각하면 안된다. 이들의 관계는 주인과 종의 관계 같은 것이다. 먹고 살기 힘들어 자신이 일하는 집의 주인에게 돈이나 양식을 빚진 것이다.
42절은 갚을 길이 없는 것을 안 주인이 두 사람의 빛을 다 탕감해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둘 중에 누가 더 그 주인을 사랑하겠느냐고 예수께서 시몬에게 질문한 것이다. 시몬은 이 때까지도 예수께서 말씀하신 비유가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마치 나단선지자가 부자와 가난한 자의 양의 비유를 들었을 때 깨닫지 못한 다윗왕과도 같다. 예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 죄인들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치시려는 것이다.
43절에서 시몬은 대답하기를 더 많이 탕감 받은 사람이라고 했다. 39절에서는 시몬은 이 여인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갖고 더러운 여인이 자신을 만지도록 내버려둔다고 마음 속으로 비난했다. 하지만 예수께서 말씀하신 비유에서는 자신을 가리킨다고 생각 못하고 이 여인 편을 들어준 것이다. 알았더라면 시몬은 대답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자 예수님은 시몬에게 옳게 판단했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비유는 시몬이나 이 여인이나 똑 같은 죄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 관점에서는 바리새인 시몬이 여인보다는 죄를 적게 지었어도 결국 똑 같이 더러운 죄로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인 것이다. 이는 마치 한달동안 한번도 씻지도 못하고 옷도갈아 입지 못한 노숙자가 석달 동안 한번도 씻지 못하고 갈아입지 못한 노숙자에게 더럽다고 멸시하는 것과도 같다. 둘 다 깨끗이 씻겨주고 새옷을 입혀주었다면 과거의 모습을 비교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과거에 더 많이 더러웠던 사람이 더 큰 감사를 하지 않겠느냐는 뜻이다.
예수님은 이 여인이 더러운 죄인이라는 것을 다 아시고도 그냥 두셨다. 예수님은 그녀의 죄를 보지 않으시고 용서해 주셨고 그녀의 감사와 사랑을 보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이 목욕하고 새옷을 입어 새사람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적인 기준으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여 더럽다고 멸시해서는 안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