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6:37-38 예수께서는 우리를 해친 원수들을 심판하지도 정죄하지도 말고 대신에 용서해 주고 넘치도록 가득 선물까지 줘서 보내면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우리를 심판하지도 정죄하지도 않으시고 용서하시며 넘치도록 채워주신다고 하셨다.
이전 말씀에서 예수께서는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좋게 대하며 되돌려 받을 소망은 멀리 내다버리라며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장차 큰 상을 주실 것이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이라며 하나님의 자비하신 성품을 닮은 쏙 빼닮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라고 하셨다. 이어지는 말씀은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지 말고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자녀가 되면 하나님으로부터 상을 받을 것이라는 내용이다.
37-38절은 두개의 하지 말라는 명령과 두개의 하라는 명령이 같은 구조로 대칭을 이루고 있다. 37절에서는 먼저 심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심판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새번역은 계속해서 하나님이라는 말을 넣어 번역하고 있지만 원어에는 하나님이라는 말이 없다. 새번역은 의미를 분명하게 하기 위해 하나님이라는 말을 넣어서 번역한 것이다. 심판이란 말의 어원은 나누거나 해체하거나 쪼갠다는 뜻이다. 법정용어로 쓰일 때는 재판한다는 뜻이다. 이는 법정에서 죄인을 심문할 때 완전해 쪼개고 해체하여 낱낱히 잘못을 밝힌다는 뜻일 것이다.
이에 이어지는 하지 말라는 명령은 정죄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면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정죄한다는 말은 법정용어로 재판을 한 후에 형을 확정하여 선포한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심판이라는 말은 법정에서 죄를 심문하여 그 죄를 완전히 밝히는 것이고 정죄라는 말은 그 형을 확정해서 선고하는 것이다. 이 두 단어를 연결하여 말한 것은 분명히 법정에서 재판하는 그림이다. 물론 비유적으로 이해해서 개역처럼 일상의 삶에서 비판하지 말고 정죄하지 말라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의역을 하면 본래 원어에서 전달하고 있는 재판 과정의 그림이 뭉개진다. 그런 의미에서 새번역은 심판과 정죄라고 번역해서 원어의 그림을 잘 살린 것이다.
이는 분명 일상의 삶에서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것을 하지 말라는 뜻이고 실제 제자들이 재판관이 되어 종교재판을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닐 것이다. 그렇기에 예수께서는 일상의 삶에서 제자들은 다른 사람들을 심판하고 정죄함으로 하나님의 자리를 강탈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스스로 재판관이 되어 남의 죄를 파헤쳐 기소하고 그 죄를 확정하여 선고하는 것과 같은 행위는 36절에 나온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쏙 빼닮은 사람이 되라는 것과 정확히 반대가 된다.
하나님께서는 자비를 베푸는 것을 원하신다. 하지만 다른 사람을 심판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의 잘못을 심판하시도록 초대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유죄판결을 내리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유죄판결을 내리도록 초대하는 것이다. 이는 마치 마태복음 18:21-35절에 나오는 일만 달란트를 왕에게 탕감받은 자가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자를 용서하지 않아서 왕을 분노하게 하는 것과도 같다. 따라서 남의 잘못을 심판하는 사람은 자비하신 하나님을 분노하게 해서 자기의 심판과 유죄판결을 자초하는 일이다. 심판은 하나님의 고유 권한이다.
하지 말라는 두개의 명령에 이어 하라는 명령 두개가 이어진다. 먼저 하라는 명령은 용서하라는 것이다. 원어에서 용서라는 말은 "멀리" 라는 말과 "풀어준다" 는 말이 합쳐진 말이다. 따라서 이는 앞에서 기소하고 형을 확정하는 그림과 연결되는 그림이다. 다른 사람을 기소하고 형을 확정하여 선포하는 대신에 석방시켜 멀리 가도록 하라는 뜻이다. 그리하면 너희도 멀리 석방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는 법을 철페하라는 뜻이 아니라 자비하신 하나님의 흉내를 내라는 뜻이다.
38절에서 주라는 말은 37절 끝부분에 나온 용서하라 즉 석방하라는 말과 짝을 이루고 있기에 함께 연결해서 해석해야 한다. 남을 기소하고 형을 선고하는 대신에 무죄방면을 하여 보낼 때 그냥 보내지 말고 선물을 줘서 보내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나를 해친 원수를 심판도 정죄도 하지 말고 무죄 방면하라는 것은 정말 대단한 원수 사랑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여기에 하나 덧붙여 선물을 줘서 보내라고 명령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수님의 요구는 앞에서 말한 세가지 명령보다 훨씬 더 급진적이다.
주라는 것은 이어지는 말을 보면 곡식을 자루에 가득 담아 주라는 뜻이다. 이어지는 그림은 쌀을 되는 말에 곡식을 가득히 붓되 넘치도록 가득히 붓고는 그 말을 흔들어서 다시 가라앉게 한 다음 또 부어주는 그림이다. 우리를 해친 원수를 무죄방면하면서 그냥 보내지 말고 그렇게 곡식을 가득히 되어 주라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곡식되는 말에 넘치도록 부어주시고 다시 그 말을 흔들어 가라앉게 하신 다음에 또 부어 주신다는 것이다. 이어서 왜냐하면 이라는 말로 그렇게 줘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신다. 그 이유는 그렇게 너희가 넘치도록 붓고 흔들어서 또 부어 후하게 되어주는 그 말로 너희가 그대로 돌려받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미제라블이 생각나게 하는 구절이다. 자베르라는 형사는 계속해서 죄를 밝혀 정죄하려고 추격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미리엘 주교는 은혜를 원수로 갚은 장 발장을 용서해 주고 훔쳐간 은 촛대를 선물로 준것이라며 줘서 보낸다. 형제의 죄를 심판하지도 정죄하지도 않고 오히려 용서한 뒤 넘치도록 선물까지 줘서 보낸 것이다. 우리도 우리를 원수 삼고 해를 끼친 사람들을 심판하지도 정죄하지도 않고 용서하고 넘치도록 부어주고 흔들어 꾹꾹 눌러 담은 뒤 다시 넘치도록 부어준다면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그렇게 풍성한 것으로 넘치도록 주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