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5:36-39 예수께서는 계속해서 새 옷 조각으로 낡은 옷을 꿰매는 사람이 없다는 비유와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사람이 없다는 비유로 예수님의 가르침은 낡은 유대교의 틀에 맞지 않는다며 새 포도주를 좋아하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예수님의 가르침을 좋아하는 유대인들도 없다고 하셨다.
이전 말씀에서 바리새파와 그들의 율법학자들은 요한의 제자들과 자신들은 자주 습관적으로 금식하며 기도하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먹고 마신다며 비난하자 예수께서는 자신을 혼인잔치의 신랑으로 비유하시며 신랑을 빼앗길 날에는 금식할 것이라고 하셨다. 이어지는 말씀은 옷을 깁는 비유와 새술은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는 비유로 낡은 유대교의 틀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넣을 수 없다는 것을 비유로 말씀하시는 내용이다.
36절은 예수께서 또 다른 비유로 말씀하시는 내용이다. 이 부분은 마태 마가 누가에 모두 나오는데 내용은 같지만 그 표현은 서로 다르다.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누가가 마가의 것을 보고 고쳐썼다는 식의 설명을 장황하게 한다. 하지만 원문을 비교해 보면 보고 고쳐서 썼다고 보기에는 너무 다르다.
누가는 "한 조각을 새옷으로부터 찢어서" 라고 했는데 마가는 "오그라들지 않은 헝겊 한 조각을" 이라고 했다. 그런데 마가가 사용한 "헝겊"이라는 말은 본래 다른 옷에서 찢어낸 조각이라는 뜻이다. 마가가 사용한 "오그라들지 않은" 이라는 말도 물에 빨아본 적이 없기에 오그라들지 않은 새것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마가가 사용한 말도 분석해 보면 결국 누가와 같이 새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냈다는 뜻이다.
마태는 누가와 똑같이 "오그라들지 않은 옷조각"이라는 말을 썼지만 다른 말들은 마가와 다른 표현을 썼다. 이는 결국 예수께서 말씀하신 같은 내용을 서로 다른 사람들이 듣고 각자 자기 말로 표현했다는 증거이지 마가가 쓴 것을 보고 마태와 누가가 베끼면서 혹시 표절시비에 걸려 학교에서 제적당할까봐 바꾼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 가르치신 것이나 행하신 기적을 듣고 본 사람들은 각자 자기의말로 표현하게 된다. 마태 마가 누가가 이렇게 다른 말로 표현한 것은 실제 들은 것을 자기 말로 증언을 했다는 뜻이다.
누가가 마가보다 훨씬 더 알기 쉽고 의미가 명확한 말을 써서 전한 것이다. 새 옷에서 찢어낸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새것이 낡은 것을 찢을 것이고 새것으로부터 붙인 것이 낡은 옷에 어울리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새옷에서 찢어낸 헝겊 조각이란 예수님의 가르침을 뜻한다. 낡아서 헤어진 옷이란 유대교의 가르침을 뜻한다. 예수님의 가르침 하나를 떼어 유대교의 가르침에 붙여 놓으면 유대교의 가르침이 다 찢어져 차라리 꿰매지 않은 만도 못하다는 것이다. 누가 전달하는 예수님 말씀의 초점은 새옷에서 찢어냈기에 새옷도 못쓰게 되고 낡은 옷도 못쓰게 된다는 것이다. 누가는 마가보다 그 의미를 훨씬 정확하게 전달한 것이다.
37절에서는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새 포도주가 가죽 부대를 터트려서 포도주가 쏟아지고 가죽 부대도 못쓰게 된다는 것이다. 새 포도주는 발효가 되지 않은 것이기에 발효과정에서 이산화탄소가 많이 나와 신축성이 없는 낡은 가죽 부대는 터지게 되는 것이다. 38절은 새 포도주는 새 가죽 부대에 넣어야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새 포도주와 낡은 가죽 부대 둘 다 못쓰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36절에서 말한 비유의 핵심을 다른 비유로 바꾸어 말씀하신 것이다. 누가는 같은 내용을 전달하는 두개의 다른 비유를 마가보다 훨씬 더 정확하고 알기 쉽게 전달한 것이다.
39절은 오래된 포도주를 마시고 나서 새 것을 원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오래된 것을 마신 사람은 "오래된 것이 좋다" 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오래된 포도주는 오래된 유대교의 가르침을 뜻하고 새 포도주는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을 뜻한다. 그런데 오래된 포도주의 맛에 익숙해진 사람이 새 포도주를 맛보면 누구나 다 오래된 포도주가 좋다고 한다는 것이다. 이는 모든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을 거부하고 오래된 유대교의 가르침이 좋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의 기적은 좋다고 하면서 예수님의 가르침은 거부했던 것이다.
오늘 말씀에 나온 누가가 증거하는 예수님의 비유들은 바리새파와 그들의 율법학자들이 당신의 제자들이 어째서 금식하고 기도하지 않는지 따지듯 물은 것에 대해 혼인잔치의 비유로 대답하신 것에 이어지는 대답이다. 형식적으로 반복하는 금식과 기도는 그들의 가르침의 한 예일 뿐이다. 유대교의 가르침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들의 의를 드러내는 것이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은 하나님 앞에서 의로움을 얻으려는 것이고 사람들 앞에서 자신들의 의를 드러내는 것이 아닌 것이다.
우리도 사람들 앞에서 금식하고 기도하는 것과 같은 눈에 보이는 경건을 행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낡은 유대교를 믿는 것이다. 우리는 사람들 앞에서 눈속임을 멈추고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경건을 행해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