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3:15-17 사람들은 요한이 그리스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때 요한은 자신을 한없이 낮추어 그리스도의 신발 끈을 푸는 종이 되기도 감당할 수 없다며 자신은 물로 침례를 주었지만 그분은 불과 성령으로 침례를 준다고 했다.
이전 말씀에서는 세리와 군인들이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러 와서 임박한 심판에서 구원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할지 물었을 때 요한은 받는 것에 만족하고 그 이상 백성들에게 빼앗지 말라고 했다. 이어지는 말씀은 사람들이 요한을 그리스도가 아닐까 생각하자 요한은 자신은 아니라고 부인하는 장면이다.
15절은 백성들이 기다리고 있으면서 라는 말로 시작한다. 기다린다는 말은 기대한다 또는 생각한다는 말 앞에 앞을 향하여 라는 뜻의 말을 합쳐진 말이다. 따라서 미래를 향하여 기대하면서 라는 뜻이다. 게다가 백성이라는 단어를 쓴 것은 메시야를 기다리는 종교 공동체로서의 유대인들을 반영하는 것이다. 백성이라는 말이 단순히 쏟아져 나온 무리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받는 하난님의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을 의미하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늘 다윗과 같은 메시야가 와서 자신들을 구원해서 온 세상을 다스리는 강력한 제국을 이루어주길 기대하고 있었다. 그래서 누가는 특별히 백성이라는 말과 미래를 향하여 기대한다는 말을 함께 쓴 것이다. 이렇게 미래를 기대하고 있었다는 말과 나란히 놓인 말은 "그들 모두의 마음 속에서 생각하면서" 라는 말이다. 생각한다는 말은 다른 사람과 토론한다는 뜻이다. 마음 속으로 토론한다는 말은 생각이 발전되는 과정을 나타내는 셈어적인 표현이다. 따라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메시야가 오기를 기다리면서 그 생각을 발전시켜 나갔다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발전시켜 나간 것은 바로 "요한이 혹시 메시야가 아닌가?" 라는 것이다.
16절은 요한이 그렇게 생각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대답하며 말하길 "한편 나는 물로 너희에게 침례를 준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는 나보다 강한 이가 지금 오시는데 나는 그의 신발 끈을 풀기에도 충분하지 않다"고 말했다. 신발 끈을 풀어주는 일은 이방인 노예들이 그 주인인 유대인들에게 하던 천한 일이다. 그렇다면 요한이 자신을 이렇게 최고로 낮춘 것은 그리스도의 높고 위대하심을 나타내려는 것이다.
많은 백성들이 요한에게 와서 죄를 고백하고 침례를 받고 있는 모습은 무리들에게 강력한 인상을 주었고 요한을 위대한 선지자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생각을 더 발전해서 혹시나 요한이 메시야가 아닌가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요한은 그분과 비교하면 자신은 모든 노예중에 가장 천한 노예보다 더 낮은 존재라고 한 것이다. 요한이 자신보다 더 강한 이가 오신다고 한 말은 현재형이기에 지금 오고 계시는 중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요한이 비교한 것은 자신이 행한 침례의 능력과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행하실 불과 성령으로 주시는 침례의 능력을 비교한 것이다.
성령과 불로 침례를 준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 성령이라는 말은 원어에서 거룩한 바람이다. 왜 거룩한 바람과 불을 짝을 지어 말할까? 이에 대해 네가지 가능한 해석이 있다. 첫째 거룩한 바람과 불은 정결하게 하시는 성령님의 역사라고 보는 것이다. 둘째 성령과 회개하지 않는 자는 완전히 멸망시키고 회개한 자에게는 성령을 선물로 준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다. 셋째 거룩한 바람을 기독교 신앙에서 말하는 성령으로 보지 않고 심판의 강한 바람으로 보는 것이다. 넷째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해 성취된 기독교적 해석으로 보는 것이다. 쿰란 문서들에도 정결하게 하는 것과 멸망케 하는 불과 바람이 나온다(1QS 3.7-9; 4.20-21; 1QH 16.12).
다수의 주석가들은 두번째 해석을 따라 거룩한 바람과 불의 역할을 따로 나누어 설명한다. 거룩한 바람은 성령을 가리키는 말로 회개한 자에게 주는 선물이고 불은 불신자들을 완전히 멸망시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심판의 불이라기 보다는 정결하게 하는 불이라고 말한다.
이해하기 어려울 때는 전후 문맥을 연결해서 봐야 한다. 요한은 자신의 침례는 정결하게 하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침례는 멸망하게 하는 것으로 보지 않고 연결선상으로 보았다. 요한의 침례가 공동체를 물로 정결하게 하는 것이라면 그리스도의 침례는 공동체를 거룩한 바람과 불로 정결하게 하는 것으로 본 것이다. 그리스도의 침례가 비교도 안될만큼 더 강력한 것으로 비유한 것이다.
17절에서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결하게 하신다는 말은 16절의 거룩한 바람과 연결해서 읽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거룩한 바람으로 침례를 주신다는 말은 알곡과 쭉정이를 골라내는 그림인 것이다. 그래서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로 태우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16절에서 사용된 성령이라는 말은 17절의 타작마당에 부는 바람과 연결해서 읽어야 한다. 단순히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 강림하신 성령과 그 모습이 불의 혀와 같다는 것으로만 읽으면 17절은 전혀 다른 내용이 된다. 문맥으로 본다면 여기서 사용한 비유는 거룩한 바람과 불 모두 알곡과 쭉정이를 골라내는 장면으로 이해해야 한다. 성령은 믿는 자와 불신자를 갈라내는 구실을 한다. 불도 역시 믿는 자는 연단의 불이고 불신자는 영원한 멸망의 불인 것이다.
요한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았다. 많은 사람이 위대한 예언자라고 하다가 그 생각이 점점 발전하여 그리스도인지도 모르겠다고 할 때 그는 분명히 아니라고 하며 자신을 가장 낮은 자리에 낮추어 모든 종들 중에서 최고로 낮은 종으로 묘사했다. 우리도 주님의 사역을 할 때 사람들이 우리를 높이려고 하더라도 절대로 높아지면 안된다. 우리도 요한처럼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한없이 낮추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