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48-52 예수의 부모는 성전에서 선생들과 토론하는 예수의 모습을 보고 놀라며 찾느라 걱정했다고 책망하자 소년 예수는 자신이 하나님의 집 안에 있어야 할 줄 몰랐느냐고 대답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그 부모와 함께 나사렛으로 돌아와서 계속 순종했고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사랑받으며 성장하셨다.
이전 말씀에서 그 부모는 소년 예수가 친척들의 무리 중에 있는 줄 알고 하룻 길을 가다가 없다는 것을 알고 되돌아와 보니 예루살렘 성전 마당에서 선생들에게 듣기도 하고 묻기도 하는 모습을 발견했다. 이어지는 말씀은 예수께서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으며 성장하는 모습을 담은 내용이다.
48절은 "그들은 그를 보고서 놀랐다" 라는 말로 시작한다. 여기서 놀랐다는 말은 47절에서 경탄했다 또는 기이히 여겼다는 말과는 다른 말이다. 놀랐다는 말은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 13번이 나오는도 모두 다 예수의 가르치심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나타내는 말로 쓰였다. 이번에 그 부모가 소년 예수가 성전 뜰에서 율법 선생들과 토론을 하는 모습을 보고 놀랐다는 것도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대한 사람들의 놀람과 전혀 무관하지 않다. 잃었던 아이를 사흘만에 찾았다면 깜짝 놀라기보다는 반가움이나 기쁨으로 표현했어야 했다. 사흘 만에 찾은 아이가 놀랍게도 율법 선생들과 토론을 하는 장면이라니 정말 놀랍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놀란 사람은 그들이지만 말한 사람은 그 어머니이다. 새번역은 "이게 무슨 일이냐!" 라고 의역을 했지만 원어는 개역처럼 그 어머니는 예수께 "아이야!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라고 말했다고 되어있다. 이어서 마리아는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며 너를 찾았는지를!" 이라고 했다. 근심한다는 말은 신약성서에서는 누가가 기록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만 나온다. 누가복음 16:24절과 25절에서는 부자가 지옥에서 고통을 받는 모습을 나타낼 때 썼고 사도행전 20:38절에서는 에베소 장로들이 바울을 다시 보지 못할 것을 슬퍼할 때 썼다. 따라서 이 말은 아주 큰 근심을 나타내는 아주 강한 표현이다. 어린 아이를 잃어버려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이 말이 나타내는 고통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48절에서 마리아는 요셉을 "네 아버지"라고 했는데 49절에서 예수께서는 그 부모에게 하나님이 자신의 아버지라고 대답하셨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길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습니까?" 라고 하신 것이다. 사실 원어에는 집이라는 말이 없고 단지 "내 아버지의 것들 안에서" 라고만 되어있다. 문맥은 내 아버지의 집이라는 뜻으로 보이기에 대부분의 영어 번역들도 문맥을 통해 집이라는 말을 넣어 번역한 것 뿐이다.
"내 아버지의 것들 안에서"라는 말은 "아버지의 집 안에서" 일 가능성 외에도 세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다음 세가지 가능한 해석들이 존재한다. 먼저 "내 아버지의 것들 안에서" 라는 말은 "내 아버지의 일들 안에서"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내 아버지의 일들 안에서 참여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습니까?" 라고 번역할 수 있는 것이다. 또 이 말은 44절에 나온 "친척들 안에서" 라는 말과 대조적으로 "내 아버지에 속한 사람들 안에서 있어야 할 줄 알지 못하셨습니까?" 라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예수에 대한 다른 전해내려오는 말들과 통합되기에 어려움이 있다. 마지막으로 제시한 것은 "해야만 한다"는 표현이 신적 필요성을 뜻하기에 좁은 의미로는 십자가의 필요성이고 또 넓은 의미에서 신적 필요성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가장 분명하고 널리 받아들여지는 해석은 "아버지의 집 안에서" 라는 해석이다. 아버지의 집이 성전 건물들을 뜻하기도 하지만 눈에 보이는 건물은 단지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의 집을 형상화한 것 뿐이다. 예수께서도 눈에 보이는 건물은 진짜 하나님의 집이 아니기에 헐면 사흘만에 다시 세운다고 하신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계시는 그 존재 안에서 있어야 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예수의 이상한 대답이 그와 그 부모 사이의 이별을 암시하는 것이다.
50절은 그 부모는 소년 예수가 그들에게 한 말을 깨닫지 못했다고 했다. 예수님은 분명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하나님의 집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있어야 한다고 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육신의 부모들은 예수님과 하나님과의 진정한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기에 예수님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장차 육신의 부모가 아닌 진짜 아버지인 하나님 안에서 사역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기에 그 부모는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장 그 부모를 떠나 하나님의 일을 한 것이 아니다. 51절에 보면 그 부모와 함께 내려가서 나사렛으로 들어갔고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고 했다. 지냈다는 말은 계속해서 그렇게 지냈다는 뜻이다. 따라서 예루살렘에서 육신의 부모에 대해 불순종하신 것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미리 잠깐 암시적으로 보여주신 것이고 장차 하나님 안에서 하실 사역을 미리 암시하신 것이다.
이는 마리아에게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계시임에 분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 어머니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계속해서 간직하고 있었다고 했다. 하나님께서 마리아에게 아이가 태어날 것을 보여주신 것과 어린 시절 이 사건을 통해 보여주신 것을 연결하여 생각하고 간직했다는 것이다. 마리아만이 탄생에서부터 소년시절 있었던 일과 예수님의 지상사역과 부활하신 후의 일들을 하나로 연결하여 간직했던 사람이다. 초대교회 시절 마리아의 증언을 통해 이런 일들이 전해져서 누가가 기록했을 것이다.
52절은 예수께서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더욱 사랑을 받았다고 했다. 이는 사무엘상 2:26절과 비슷하지만 몇가지 말이 사무엘의 경우와는 다르다. 먼저 사무엘에게는 커져갔다는 말만 있고 지혜라는 말이 없다. 게다가 자라갔다는 말은 앞을 자르며 나아간다는 뜻이다. 선발대가 앞에서 나무나 풀들을 자르며 길을 내는 경우에 쓰이는 말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지혜로 성장하시는 모습이 모든 사람들의 앞에서 길을 내는 본보기로 성장하셨다는 뜻이다. 그래서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완벽한 모습으로 성장하고 계셨다는 뜻이다. 예수께서 선발대가 되셔서 하나님의 지혜로 성장해 자는 본보기를 보여주신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어느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계시를 받으시고 사역을 시작하신 것이 아니다. 침례를 받으면서 성령이 임하셔서 그 때부터 하나님의 지혜로 사역하기 시작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모든 성장 과정에 함께하시며 계속해서 하나님의 지혜로 자라게 하셨다는 것이다. 성전에서 선생들과 토론하시는 장면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지혜로 키우고 계셨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이다.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 예수님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성장해 나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