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5:42-43 아리마대 출신의 존경받던 공회원이었던 요셉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걸고 빌라도에게 가서 담대히 예수의 시체를 달라고 요구했다.
이전 말씀에서 유대인들이 경멸하던 이방인 백부장은 예수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증언했고 유대인들이 사람취급 안하던 여인들도 그 모든 기적을 목격한 증인들이었다. 이어지는 말씀은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요구하는 장면이다.
42절은 이미 날이 저물었다 라고 했다. 오후 세시 경에 돌아가셨는데 아직 준비일 곧 안식일 전날이라면 해가 지기 전이다. 해가 지면 안식일이 시작된다. 따라서 날이 저물었을 때에 라는 말은 오후 4-5시 사이이다. 이제 해가 지면 바로 안식일이 시작된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는 일을 하지 않았다. 더구나 경건한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시체를 매달아 두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을 했다. 만약 안식일에도 시체를 그냥 둘 경우에는 땅을 더럽힌다 생각했다. 따라서 경건한 유대인 입장에서 보면 시체를 치워야 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이다.
이처럼 예수께서 숨을 거두신 후의 상황을 설명한 뒤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라는 사람이 등장했다. 요셉에 대해 두가지 내용이 소개된다. 하나는 명망있는 의회 의원이라는 것이다. 명망있다는 말은 말이나 행동에 기품이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사도행전 13:50절과 17:12절에서는 여인이라는 말에 덧붙여서 귀부인이라는 뜻으로 쓰인 말이다. 이는 사회적으로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귀족이고 우리 말식으로 말하면 신분이 아주 높은 양반이라는 뜻이다. 또 의회 의원이라는 말은 산헤드린 공회 의원일 것이다. 지방의 작은 의회의 의원일 것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그럴 경우 로마 총독에게 직접 가서 말을 할 수 없다. 로마총독을 직접 찾아가서 만날 정도라면 산헤드린 공회의 의원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요셉은 공회원 중에서도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도 대단한 영향력이 있던 높은 사람이었다는 뜻이다.
두번째로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이라 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은 모든 경건한 유대인들의 소망이다. 누가복음 2:25절에 보면 예수님을 안고 찬송을 한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나온다.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라고 했다. “이스라엘의 위로” 라는 말이 바로 다윗과 같은 왕 메시야가 와서 이스라엘을 회복시켜주는 것이다. 시므온과 같이 의롭고 경건한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렸다. 그렇다면 모든 경건한 유대인들이 기다리던 하나님 나라를 기다린다는 것을 특별한 것처럼 말했을까?
이는 마가복음에서 “하나님의 나라” 라는 말이 예수님의 사명과 직접 연결되는 구체적인 표현이기 때문이다. 요셉은 예수님이 바로 이스라엘의 위로가 될 메시야라고 믿고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를 기다렸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겉으로 드러난 제자는 아니지만 예수님의 사역을 공감하며 비공개적으로 따르던 사람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사람은 자신이 가진 것들을 잃을까 두려워 공개적으로 예수님을 따르지 못했던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 사람은 대담하게 빌라도에게 갔다. 빌라도에게 갔다는 말은 안으로 들어갔다는 뜻이다. 빌라도가 임시로 와 있던 로마군 사령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는 뜻이다. 대담하게 라는 말은 용감하게 라는 뜻이다. 빌라도가 로마제국의 반역자로 정죄해서 처형한 시체를 달라고 하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다. 로마의 통치자들은 십자가에서 처형당한 죄수들을 장사지내는 것을 금지시켰다. 가끔은 총독의 직권으로 시체를 내 주는 일도 있었지만 공개적으로 슬퍼하는 것은 금지시켰다.
원칙은 십자가에 달린 채 날짐승들이 뜯어먹게 놔 두는 것이다. 아무도 내리거나 손을 댈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요셉은 빌라도를 찾아가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한 것이다. 이는 자신도 예수님과 같은 편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여 질 수 있는 일이다. 요셉은 이런 위험을 무릅쓰고 용감하게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한 것이다. 어쩌면 자신이 누리고 있던 모든 사회적 지위와 정치적 권력과 경건한 사람이라는 명망까지 다 잃을 수 있는 정말 위험한 행동이었다.
요셉이 이렇게 행동한 것은 물론 요셉이 경건한 유대인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시체가 달려 있으면 땅이 더럽혀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다 건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더구나 땅이 더럽혀 지는 것은 자신 때문이 아니라 이방인들 책임이었기 때문이다. 요셉이 이렇게 변한 이유를 14:62절에서 찾을 수 있다. 제사장이 예수님을 죽일 꼬투리를 잡으려고 예수님께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냐고 물었을 때 요셉도 그 자리에 있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계속 아무 말씀도 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렇다고 대답만 했어도 신성모독까지는 아니었다.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란 뜻은 이스라엘을 해방시켜줄 다윗 같은 왕이냐는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했다면 단순한 조롱거리였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죽이려고 하는 자들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분명히 자신이 하나님의 우편에 앉을 자이고 하나님과 동등한 존재라고 증언하시는 것을 보고 요셉은 충격을 받았을 것이고 자신이 부끄러웠을 것이다. 대제사장들과 다른 공회원들을 따라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갔을 것이다. 그 자리에서 세가지 기적들을 체험하고는 예수님이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확신했을 것이다. 그래서 요셉은 예수님처럼 용기를 내어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한 것이다. 이것은 자신이 예수님을 따르는 자라는 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드러내는 아주 위험한 행동이었다.
예수님 살아 계시던 동안에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 죽겠다며 큰소리를 치며 예수님을 따랐다. 당시 사회의 하층민이었던 제자들은 잃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때 최고의 존귀와 명예를 누리던 요셉은 자신이 누리고 있던 모든 것을 다 잃게될까 두려워 조용히 숨어있었다. 그러나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수치스러운 죽음을 당하자 서로 완전히 반전된다. 큰소리 치던 제자들은 모두 다 두려워서 도망갔다. 그때 숨어있던 요셉은 나타나서 담대하게 시체를 달라고 한 것이다.
사실 제자들의 속마음은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같은 지위를 얻는 것을 기대하고 예수님을 따라다녔다. 하지만 요셉은 세상적으로는 더 이상 얻을 것이 없었던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다 걸고 시체를 달라고 한 것은 정말 예수님에 대한 특별한 믿음이 없다면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요셉의 용기있는 행동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의 분명한 증거들을 남겼다. 예수께서 죽지 않고 기절해 있었다고 거짓말 하던 자들의 입을 로마총독부의 공식적 확인을 통해 막은 결과가 되었기 때문이다. 요셉이 로마 총독에게 찾아가 시체를 달라고 했을 때 죽음을 확인하고 내어주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부활을 부정하기 위해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가 숨기고 부활했다고 거짓말 했다는 헛소문을 퍼뜨리던 자들의 입을 요셉의 용기있는 행동으로 완전히 막은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를 믿는 것 때문에 모든 것을 잃거나 죽음을 당하는 사회에서 살고 있지 않는다. 우리가 사는 이곳은 오히려 정직하고 경건한 사람으로 존경을 받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도 제자들과 같이 그중에서도 특별히 베드로와 같이 말로만 큰소리 치기 쉬운 세상에서 살고 있다. 하지만 믿음이란 베드로처럼 말로만 큰소리치는 언어유희가 아니다. 요셉처럼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다 빼앗긴대도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님을 위해 행동하는 것이 진짜 믿음이다. 우리도 우리 모든 것을 다 걸고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 그러면 예수님과 함께 고난도 받겠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와 늘 함께 계시며 물이 흐르는 강가의 안전한 길로 인도해 주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