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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섭 목사Dr Ahn's NT OT

새벽말씀 › 마가복음 › 14:66-68

Dawn Word

마가복음 14:66-68

하녀의 말에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

잔잔해진 바다 위의 작은 배 · 마가복음 4장

2022. 10. 1. · 안정섭 목사 · 마가복음 14장 강해 설교

마가복음 14:66-68 불빛에 비춰진 베드로의 얼굴을 보고 멀리 떨어져 있던 대제사장의 하녀 하나가 다가와 얼굴을 자세히 보면서 예수님과 한편이라고 말하자 베드로는 강력히 부인하며 어두운 바깥 마당으로 숨었다.

이전 말씀에서는 사람들의 증언이 일치하지 않자 대제사장이 직접 나서 대답 안하면 죽인다고 협박을 하며 그리스도냐고 묻자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있는 것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구름과 함께 올것이라고 대답하셨다. 이어지는 말씀은 예수께서 예언하신대로 베드로가 한 하녀 앞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는 내용이다.

66절은 “베드로가 안뜰 아래쪽에 있는데” 라는 말로 시작한다. 새번역에서 안뜰 아랫쪽이라고 번역한 말은 54절에도 안뜰이라는 말이 나온다. 개역이나 새번역 모두 같은 말을 다르게 번역했다. 개역개정은 “아랫뜰” 이라 번역했는데 원어는 새번역처럼 “안뜰 아랫쪽”이라고 되어있다. “Burnt House” 라는 불리우는 집의 유적이 발굴되었다. 이 집이 예수님 당시 대제사장의 집이라 확신할 수는 없지만 대제사장이 살았던 집도 이와 구조가 같다고는 볼 수 있다. 54절은 안뜰까지 따라 들어갔다 했는데 66절에서는 안뜰 아랫쪽이라 했으니 베드로는 두려움에 조금 뒤로 물러나 이곳에서 불을 쬐며 안뜰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베드로를 보고 대제사장의 하녀 가운데 하나가 베드로에게 다가 왔다.

67절에서는 불을 쬐고있는 베드로의 모습을 멀리서 알아본 것이다. 54절에서는 베드로가 쬐고 있던 불이라는 말은 원어에서는 빛이라는 말이다. 이 하녀는 모닥불 불빛에 비추어진 베드로를 멀리서 알아본 것이다. 개역에서 "주목하여"라는 말은 더 가까이 와서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 보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를 빤히 노려보고서" 라고 번역한 새번역이 훨씬 더 원어의 장면을 생생하게 번역했다. 모닥불 불빛이 어둡기 때문에 가까이 다가와 자세히 들여다 보고 확인을 한 것이다.

그 다음에 나오는 “말하였다” 는 말은 원어에서는 “말한다” 라는 현재형이다. 66절에서 이 하녀가 “왔다”라는 말도 역시 현재형이다. 이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실을 실감나게 극적으로 전달할 때 쓰던 표현 방법이다. 이는 “하녀 하나가 오고있다” “그 하녀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라는 뜻이다. 마가의 증언을 듣던 청중들은 이를 통해 마치 현장을 보고 있는 것처럼 들었을 것이다. 이는 예수님의 예언이 “짜잔!” 하고 드디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 하녀가 한 말은 “당신도 저 나사렛 사람 예수와 함께 다닌 사람이다” 라는 말이다. 함께 다녔다는 말은 계속해서 함께 있었다는 뜻이다. 당신이라는 말은 원어에서는 없어도 되는데 특별히 앞에 넣은 것은 베드로를 지적하며 힘을 주어 강조한 것을 나타낸 것이다. 또 나사렛 사람이라는 말도 순서를 바꾸어 앞에 넣은 것도 예수라는 이름보다 나사렛 사람이라는 것을 특별히 강조한 것이다. 이는 베드로도 역시 갈릴리 사투리를 쓰고 있었기 때문에 나사렛 사람이라는 말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자 68절에서 베드로는 드디어 첫번째 부인을 한다. 알아듣지 못한다는 말과 깨닫지 못한다는 말 사이에 원래 연결하는 말이 있어야 하는데 생략되어 있다. 이는 숨쉴틈도 없이 두마디를 연이어서 퍼붓는 장면을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먼저 알지도 못한다는 말은 이 하녀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겠다는 말이다. 이 하녀가 유대지방 사투리로 말했기 때문에 갈릴리 지방 사투리를 쓰는 베드로가 못 알아듣는 척 하는 것이다. 또 깨닫지도 못하겠다는 말은 알아 들었다 해도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말이다. 앞뒤도 없이 뜬금없는 말을 하기 때문에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뜻이다. 이는 실제로 못 알아들은 것이 아니다. 사람들에게 잡혀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이 하녀가 지적하자 베드로는 두려움 때문에 바깥마당으로 나갔다. 하지만 하녀는 당시 아주 하찮은 존재였다. 절대로 두려워할 대상이 아었다. 두려워할 대상은 예수님 앞에 있던 산헤드린 공회원들이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으셨다. 그런데 베드로는 하찮은 한 하녀의 말에 두려워 떨며 예수님을 부인하고 바깥마당으로 나가버렸다. 따뜻하고 밝은 불빛을 떠나 춥고 어두운 바깥마당으로 숨은 것이다.

새번역 성경의 난하주에 보면 ㉠이라고 되어있고 “그 때 닭이 울었다” 라는 말이 있다. 중요한 4세기 성경 사본들인 Codex Vaticanus에는 이 말이 없고 Codex Alexandrinus에는 있다. 둘 다 아주 중요한 사본들인데 이렇게 다르기 때문에 어느 쪽이 옳은지 알 수 없다. 그리스어 성경 원문이나 대부분의 영어번역들도 그 때 닭이 울었다는 말을 포함하고 있다.

이 말이 포함되어있는 것은 필사자가 예수님의 예언이 문자적으로 성취되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이 말을 넣고 싶은 유혹을 받았을 것이라는 것으로 쉽게 설명할 수 있다고 했다. 또 이 말이 제외되어 있는 것은 마가복음에는 닭이 두번 운 것으로 되어있는데 다른 복음서에서는 세번 운 것으로 되어있기에 다른 복음서와 맞춘 것이라고 쉽게 설명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고대의 성경 필사자들은 자신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여백에 작은 글씨로 적어 넣었고 절대로 본문 자체에 줄을 긋거나 삭제하는 법은 없다. 필자가 CNTTS 신약 사본 연구소에서 일할 때 수많은 사본들을 보았지만 지우거나 줄을 긋고 다시 쓴 것은 단 한번도 본적이 없다. 단지 여백에 작은 글씨로 적어 넣을 뿐이다. 그렇게 여백에 적어 넣은 사본을 보고 그 이후의 필사자가 베낄 때에는 작게 고쳐쓴 글씨를 원문으로 보고 큰 글씨로 베껴 쓴다.

그렇게 해서 두가지 이문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말은 원문에는 본래 없었을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 후대의 필사자가 다른 복음서를 보고 닭이 욿었다는 것을 적어 넣었을 것이다. United Bible Society는 분명하지 않다는 뜻으로 괄호 안에 이 내용을 포함시켰다. 그래서 대부분 영어 번역들에는 이 말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이 말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 이해하기 훨씬 쉽고 앞뒤가 맞는다. 사본학에서 어느 것이 원문인지 결정할 때 이해하기 어려운 본문과 이해하기 쉬운 본문이 있을 때는 이해하기 어려운 본문을 원문으로 본다. 이해하기 어려운 본물을 이해하기 쉽게 여백에 기록하는 경우는 있어도 이해하기 쉬운 것을 어렵게 바꾸는 경우는 없기 때문이다.

이 말이 원문에 포함되어 있든지 빠져있든지 분명한 것은 예수님의 예언대로 베드로는 이제 한번 예수를 부인한 것이다. 베드로는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한 약속을 지키려고 정말 애를 썼다. 목숨을 걸고 칼을 휘둘려 예수를 지키려고 했고 목숨을 걸고 대제사장 관저의 안뜰까지 따라들어갔다. 게다가 담대하고 불을 쬐고 있던 하인들 틈에 들어가 앉기도 했다. 얼굴이 노출되도록 빛으로 나갔던 것이다. 인간적으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목숨 걸고 최선을 다한 셈이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았기에 작고 보잘 것 없는 한 하녀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부인하고 말았던 것이다.

우리 역시 아무리 다짐하고 결심을 하고 사람들 앞에서 맹세하듯 말한다 해도 결국 우리 생각대로 행동할 수 밖에 없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 몸부림치듯 온 힘 다해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지 않으면 우리는 무조건 베드로처럼 행동하게 되고 우리 자신도 모르게 예수를 부인하는 행동을 할 수 밖에 없다. 더 무서운 것은 그렇게 자신의 생각을 따라 행동하면서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종하며 산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어느 나라나 어느 시대나 믿는 자들 대부분이 그렇게 자기 생각대로 선택적으로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이면서 하나님 뜻을 따라 산다고 착각하며 살다 죽었다는 것을 잊으면 안된다. 우리가 바로 베드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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