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4:60-65 사람들의 증언이 일치하지 않자 대제사장이 직접 나서 대답 안하면 죽인다고 협박을 하며 그리스도냐고 묻자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있는 것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구름과 함께 올것이라고 대답하셨다.
이전 말씀에서 대제사장들과 산헤드린 공회원들은 죄없는 예수를 불법으로 체포하고 불법 재판을 통해 죽일 증거를 찾고 있었지만 그 증거들이 서로 일치 하지 않았다. 이어지는 말씀은 대제사장이 직접 나서 대답 안하면 죽인다고 협박하며 그리스도냐 묻자 예수님은 맞다며 또한 하나님의 영광과 함께 오는 존재라고 대답하시는 내용이다.
사람들의 증언이 서로 일치하지 않자 60절을 보면 이번에는 대제사장이 직접 일어나 예수를 심문하기 시작했다. 대제사장의 질문은 한가지처럼 되어 있지만 사실 원문은 두가지이다. 첫번째 질문은 “왜 아무 대답도 안하냐?” 는 것이고 두번째 질문은 “이 사람들이 당신을 향해 고소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느냐? 이다. 두번째 질문은 이 사람들이 당신을 죽이라고 고소하는 것을 알기냐 하냐? 라는 뜻이다. 아무 말도 안하면 그냥 죽을 것이라며 협박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거짓 고소와 협박에 대해서는 침묵하셨고 아무 대답도 안하셨다.
그러자 대제사장은 “그대는 찬양 받으실 분의 아들 그리스도요?”다시 물었다. 갑자기 엉뚱한 질문으로 바뀐 것 같이 보이다. 하지만 이 질문은 앞의 거짓 고소와 연결되는 질문이다. 사람들은 예수를 죽게 하려고 예수님 말을 바꾸고 부풀려서 이런 거짓 고소를 했지만 이는 당시 유대인들의 믿음을 반영한 것이다. 스가랴 6:12절에 보면 “그의 이름은 새싹이다. 그가 제자리에서 새싹처럼 돋아나서 주의 성전을 지을 것이다.” 라고 했다. 유대인들은 이 구절을 근거로 마지막 때에 메시야가 와서 새 성전 건물을 세울 것을 믿었다. 그렇다면 이 고소는 예수가 메시야라는 것이다. 그래서 대제사장은 60절 뒷부분에서 네가 메시야냐고 물은 것이다.
하지만 이 말은 새번역처럼 “그대는” 이라고 말한 것이 아니다. 원어는 경멸하고 조롱하는 투로 “네 따위가 그리스도냐?” 라는 투로 이해해야 한다. 마가복음 12장에 나온 악한 포도원 소작인들의 비유로 성전 파괴를 말한 것이 네가 메시야이기 때문이냐는 질문이다. “찬양 받으실 분” 이란 말은 하나님의 이름을 직접 부르길 꺼려했던 유대인들이 다른 표현으로 하나님을 부른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있어 하나님의 아들이란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이고 다윗의 왕가의 사람이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대제사장은 네 따위가 다윗의 왕위를 물려받을 왕이냐고 물은 것이다.
그동안 거짓 고소들에는 침묵하던 예수님은 자신이 메시야인가 묻자 예수님은 “내가 바로 그이요” 라고 대답하셨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은 대제사장이 상상하지도 못했던 말이다. 예수님의 입에서는 어느 유대인들도 감히 상상하지도 못했던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예수님은 시편 110:1절을 인용하시며 인자가 전능하신 분의 오른편에 앉아 있는 것을 너희들이 볼 것이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봐줄 만 했을 것이다. 유대인들도 메시야는 장차 하나님 오른편에 앉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다음에는 하늘의 구름과 함께 오는 것을 볼 것이라 했다. 하늘의 구름과 함께 온다는 말은 다니엘 7:13절에서 온 말인데 이는 하나님의 임재를 가리키는 말이다. 구름과 함께 임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 뿐이기 때문이다. 이 두가지는 따로 따로 진행되는 사건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온 우주 만물을 다스리는 주권적 권위를 가진 분이라는 것을 나타낸 말이다. 하나님 오른 편에 앉아 계시면서 동시에 구름과 함께 임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대제사장은 네 따위가 이스라엘을 구원할 다윗의 후손인 왕이냐 라는 질문이었는데 예수님은 맞다 라고 시인하면서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대답하신 것이다. 이 대답에 대제사장이 할 수 있는 일은 한가지 뿐이다. 그래서 63절에서 옷을 찢으며 더 이상 증인들이 필요 없다고 한 것이다. 신성모독의 경우에는 증인이 필요없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그 자리에서 돌로 쳐 죽이는 것이다. 산헤드린 공회원들 모두가 다 그 말을 들었기 때문에 더 이상 증인이 필요 없다는 것이다. 모든 공회원들은 사형이라고 판결을 내렸다.
65절에서 그들 가운데 더러는 이라고 했는데 이는 산헤드린 공회원들 중에 일부가 침을 뱉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또 얼굴을 가리고 주먹으로 치면서 “알아 맞춰 보아라” 라고 했는데 원어는 “예언해 봐라” 라는 뜻이다. 이렇게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먼저 예수님을 능욕했다. 사실 신성모독의 경우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그 자리에서 먼저 돌로 치고 나머지 사람들도 치는 법이다. 그런데 사형 집행권은 로마총독에게 있었기 때문에 저들은 그렇게 하지 못하고 대신 이렇게 조롱한 것이다. 이들의 재판도 불법인데 형 집행도 불법이다. 유대인들에게는 형을 집행할 권한이 없었다. 자신들이 실컷 예수님을 능욕하고는 하인들에게 넘겨 주었다. 65절 끝에 하인들이 예수를 손바닥으로 쳤다는 것은 공회원들이 먼저 실컷 능욕하고 나서 하인들에게 계속 때리라고 지시한 것이다.
거짓 증거를 하고 이에 동조하던 산헤드린 공회원들은 모두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살인 교사범들이다. 죽이려고 미리 정해놓고 거짓 증거를 찾던 대제사장은 살인 교사범들의 우두머리이다. 스스로 하나님의 대리인임을 자처하던 대제사장이 사탄의 대리인이 되어 예수님께 손가락질을 하며 사형판결을 내렸다.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책임자가 된 것이다. 이는 자신들이 누리던 부와 명예와 권력이 너무 크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들은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사탄의 하수인이 되어 영원히 멸망해 버린 것이다. 그래서 저들은 아침안개와 같이 잠깐 있다가 사라질 것들 때문에 영원한 지옥에 던져졌다.
하지만 마가가 증언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어느 특별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인 죄인들이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누구든지 하나님의 이름을 빌려 거룩이라는 종교적 외투를 입고 권력을 남용하며 남을 함부로 정죄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교회 역사를 보면 카톨릭 교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외투로 입은 종교 권력자들이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죄를 덮어 씌워 죽였다. 종교 개혁자들이 개혁에 성공해서 힘을 갖게 되자 역시 같은 일을 반복했다. 오늘날도 교회 안에서 명예와 권력을 가지면 예수님을 정죄하던 대제사장처럼 되기 쉽다. 역사가 그렇게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예수님은 어느 누구에게도 손가락질을 하신 적이 없다. 오히려 예수님은 모두가 손가락질하던 자들을 용서하고 끌어 안으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손가락질 하던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죽임을 당하신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수동적으로 잡혀서 죽으신 것이 아니다. 피하지 않고 당당히 잡히셨고 죽일 질문인 줄 아시면서도 분명하게 자신이 누구신지 분명히 증언하셨다.
John Steinbeck의 소설 중에 나오는 왕은 말하길 “권력은 부패하지 않는다. 두려움이 부패한다, 아마 권력을 잃을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Power does not corrupt. Fear corrupts, perhaps the fear of a loss of power.” (Steinbeck, The Short Reign of Pippin IV, 102) 라고 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유대교 지도자들의 마음을 정확히 표현했다고 본다. 저들은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권력을 잃을까봐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죽였다. 반면에 예수님을 따르던 세리와 과부와 창녀와 죄인들은 잃을 것이 없었기에 예수님을 받아 들인 것 뿐이다.
오늘날 우리도 교회 안에서 명예와 권력을 누리게 되면 누구나 오늘 본문의 대제사장들과 산헤드린 공회원들처럼 되기 쉽다. 자신이 누리고 있는 것을 잃을까봐 두려워서 이다. 그러나 이처럼 세상에서 누리는 것에 집착하는 것은 결국 사람들을 두려워 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두려워 한다면 자기 것을 지키기 위한 거짓 증언 대신 담대히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심판주로 다시 오실 분이라는 참된 증언을 해야 한다. 죽음 앞에서도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담대히 참된 증언를 하신 예수님처럼 말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가며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의 이름을 팔아 세상에서 부귀 영화 누리는 것이 아니라 멸시 천대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면서도 참된 증언을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길을 보이시며 그 길로 따라 오라고 하셨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