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4:43-47 예수를 배신하고 예수를 잡는 자들의 편에 선 유다나 칼을 휘둘러 정의의 심판을 내렸다고 착각하는 제자나 칼과 몽둥이로 예수님을 잡아오라고 명령을 내린 산헤드린 공회원들은 모두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대로 행한 자들이다.
이전 말씀에서 예수께서는 잠만 자고 있는 제자들을 일어나라고 하신 뒤에 함께 고난의 길을 가자고 권유하셨다. 이어지는 말씀은 기도하지 않았기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따라 행동하는 사람들이 나온다.
먼저 하나님 뜻에 순종할 준비가 안된 사람들 모습이 나온다. 이들은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지 않고 자신들이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고 있다. 그 첫번째 사람은 유다이다. 43절에서 예수께서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에 유다가 왔다는 것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이 즉시 이루어졌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왔다” 라는 말은 마태복음 2:1절에서 동방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왔다는 말에서도 나오고 마태복음 3:13절에서는 예수께서 요단강에 오셨다는 말에도 나온다. 이 말은 단순히 왔다는 말이 아니라 도착했다 또는 나타났다는 뜻이다. 드디어 유다가 도착했다 또는 나타났다 라는 극적인 효과를 나타내는 말이다. 드디어 유다가 예수님과 제자들의 시야에 들어온 것이다. 열두 제자 중 하나인 유다 라는 말은 배신자임을 강조하는 말이다. 열두제자 중 하나로 예수님과 가장 가까웠던 유다가 예수님을 잡으러 나타났다 는 것이다. 그것도 예수께서 말씀하고 계실 때 즉시 나타났다는 것인데 예수님 말씀이 아주 신속하게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유다는 혼자 온 것이 아니라 칼과 몽둥이를 든 무리들과 함께 왔다. 칼은 로마병정들을 가리킬 것이고 몽둥이는 성전 경비대를 가리키는 말일 가능성이 높다. 이 사람들은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과 장로들이 보내서 왔다. 이 세 종류의 사람들은 산헤드린 공회의 구성원들이다. 산헤드린 공회가 함께 모여 결의하고 성전 경비대를 보내면서 로마군대에 협조요청을 한 것일 것이다. 공회는 이들에게 예수를 잡아오라 한 것이다. 성전 경비대는 원래 폭동이 일어났을 때 대제사장을 보호하고 성전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생긴 것이다. 예수님이 성전 폐기를 선언했기에 성전을 지키기 위해 잡아오라 한 것이다.
새번역에서 44절은 “그런데” 라는 말로 시작한다. 그런데 라는 말은 43절에서 유다가 단순히 무장한 무리들과 함께 오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어서 무장한 무리들과 신호를 짜주기를 “내가 입을 맞추는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니 그를 잡아서 단단히 끌고 가시오” 라고 했다. 유다는 단순히 무장한 무리들을 데려오기만 한 것이 아니라 치밀한 계획 하에 비밀 신호까지 짜 주었다는 것이다. 단단히 끌고 가라는 말은 유다가 경비병들에게 단단히 감시하며 끌고가라고 명령하는 말이다. 이는 14:18절에서 열두 제자 중 한 명이 예수님을 넘겨줄 것을 예언한 것이 성취되었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45절에는 유다가 왔다는 말이 두 번이나 나와있다. 이미 43절에서 도착했다고 했는데도 45절에서 다시 “유다가 와서” 라는 말을 다시 또 반복하고 있다. 게다가 “예수께로 곧 다가가서”라고 또 기록하고 있다. 이것을 보고 쓸데없는 반복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이는 절대로 쓸데없는 반복이 아니다. 이는 마치 동영상을 보여주듯 표현한 것이다. 43절에서 유다가 왔다는 말은 유다가 예수님과 제자들의 시야에 들어왔다는 뜻이다. 하지만 45절의 “유다가 와서” 라는 말은 유다가 예수님과 제자들 일행이 있는 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 누구에게 다가오고 있는지 모른다. 그 다음에 나오는 “예수께로 곧 다가가서” 라는 말에서야 비로소 유다가 예수님께로 오는 것이 분명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마가는 이처럼 배신자 유다의 움직임 하나 하나를 이처럼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마가는 대부분의 경우 다른 복음서보다 아주 간략하게 사건 중심으로 기록했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는 아주 자세한 동작까지 증언하고 있다. 이는 배신한 유다가 얼마나 가증한 위선자인지를 증언하기 위해 이 부분에서는 필름을 아주 천천히 돌리는 것과도 같이 기록한 것이다.
유다가 예수님께 다가와 한 말은 “랍비!” 이다. 이는 예수님을 아주 높여서 존경하는 태도로 부르는 호칭이다. 그리고 이어서 입을 맞추었다. 입을 맞추는 것은 아주 친밀한 관계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어에서 입을 맞추었다라고 하면 입과 입을 대고 키스했다는 말처럼 이해하기 쉽기 때문에 정확한 번역이 아니다. 이 말의 정확한 뜻과 당시 유대인들이 인사하던 관습을 알면 유다가 어떻게 키스를 했는지 알 수 있다.
먼저 뺨에 키스하면 동등한 관계이다. 그런데 예수님을 “랍비” 라고 불렀기에 유다는 뺨에 키스한 것이 아니다. 게다가 입을 맞추었다는 말은 원어에서 다른 곳의 입맞춤이라는 말과는 달리 입맞춤이라는 말 앞에 “kata” 라는 말이 붙어 있다. 이 말은 본래 “아래로” 라는 인데 “그 아래로 전부 다” 라는 뜻으로 쓰일 때도 많이 있다. 이 말이 입 맞추다는 말 앞에 붙으면 두가지 해석이 가능한다. 먼저 그 이후로 오랫동안 계속 진한 입맞춤을 했다는 뜻일 수 있다. 누가복음 15:20절에서 아버지가 돌아온 탕자에게 입맞춤을 했을 때 이 말을 썼다.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에게 키스를 시작한 이후 계속 그렇게 오랫동안 키스하며 부둥켜 안고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유다가 아무리 위선적이라고 해도 그렇게 오랫동안 계속 키스를 하며 감격스럽게 포옹을 하고 있었을 리가 없다. 유다의 인사는 잘해야 밤사이 안녕하셨습니까 정도의 인사일 뿐이다. 그렇다면 아버지가 돌아온 아들에게 한 것처럼 그 이후로 계속 오랫동안 키스했을 수 없다. 그렇지 않다면 이 말은 이 말의 본래 뜻 그대로 아래에 키스했다는 말일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손이나 발에 키스했다는 뜻이다.
발에 키스하는 것은 자신을 최대한 낮추어 절대 복종을 표시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다가 예수님 발에 키스 했을리는 없으므로 손에 키스하며 랍비라고 부르고 거짓으로 존경을 표시한 것이다. 하지만 이 모습은 진짜 존경이 아니다. 마치 사무엘하 20:9-10에서 요압이 아마사에게 키스하며 칼을 꽂는 것과도 같은 장면이다. 이처럼 마가가 유다가 배신하는 동작을 하나하나 아주 자세하고도 정확히 기록한 것은 유다의 가증스러운 배신을 믿는 자들이 영원히 기억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46절 이후 유다는 완전히 사라진다. 마가는 유다의 최후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마가의 증언의 초점은 예수님께서 예언한 것이 그대로 이루어 졌다는데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46절에서는 “그러자” 라는 말로 시작하는데 유다에게 맞추었던 카메라의 초점이 이제 무장한 무리들에게로 옮겨졌다는 것이다. 이제 유다는 무장한 무리들 중의 한명일 뿐이다. 이제 유다는 더 이상 예수님의 편에 서 있지 않고 있는 것이다.
46절은 무리들이 예수께 손을 대었고 예수님을 잡았다. 이는 14:41절에서 인자가 죄인들의 손에 넘어간다고 예언하신 말씀이 성취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은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고 있는 모습이다. 예수님은 이미 밤새도록 기도하시면서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로 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능력은 이처럼 하나님께 순종할 때 나타나는 것이다. 이러한 순종의 모습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약한 것처럼 보이다. 하지만 이처럼 약한 모습으로 잡히시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처럼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잡히시는 예수님과 저항하는 제자의 모습이 47절에서 비교된다. 47절도 “그런데” 라는 말로 시작하는데 이 말은 이제 카메라의 초점이 잡히시는 예수님에게서 예수님 곁에 서 있던 사람에게로 살짝 옮겨지는 것을 나타낸다. 앞에서 유다를 말할 때는 제자 중 한명이라 했는데 이번에는 곁에 서 있던 사람들 중의 한명이라 기록하고 있다. 이는 오직 순종하시는 예수님께 증언의 초점을 맞추려고 다른 이름들은 모두 생략한 것이다. 만약 이름들을 밝힌다면 이 말씀을 듣는 사람들의 관심이 흩어지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군중 속에 있는 한 인물을 부각시키기 위해 그 사람에게만 초점이 맞게 하고 나머지는 흐리게 처리한 사진기술과도 같은 것이다.
예수님 곁에 서 있던 예수님의 사람들 중 한 사람이 칼을 뽑아서 대제사장의 종을 칼로 쳐서 그의 귀를 떨어뜨렸다는 것이다. 앞에서는 대제사장들이라 했는데 여기서는 대제사장이라고 단수로 말했기 때문에 이 종은 현직 대제사장의 심복 부하이다. 종이라고 해서 단순히 하인 중 한명은 아니다. 이는 성전 경비대를 이끌고 와서 맨 앞에 서 있던 성전경비대장일 것이다.
또 칼을 휘둘러 귀를 자른 사람은 단순히 충동적으로 그렇게 했다고 볼 수 없다. 죽이려 했는데 칼이 빗나가 실수로 귀를 자를 확률도 매우 적다. 이 사람은 기습적으로 갑자기 칼을 뽑아 경비대장의 귀를 정조준해서 칼을 휘두른 것이다. 귀를 자르는 것은 페르샤 시대부터 강도들에 대한 형벌이었다. 이 사람이 예수님을 잡으러 대제사장을 대신해서 온 경비대장의 귀를 자른 것이다. 이는 대제사장을 강도로 취급하고 정의의 칼을 휘둘러 징계한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많은 사람들이 대제사장들은 실제 강도 같은 자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증거가 역사 기록에도 있다. 요셉푸스의 기록을 보면 Ananias (AD 47-52)라는 대제사장 때 이러한 성전 경비대가 제사장들의 집에 침입하여 그 제사장들에게 속한 십일조를 강제로 빼앗아가고 마치 그 십일조가 그 제사장들의 몫이 아닌 것처럼 두들겨 패기까지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제사장들 중 굶어 죽은 사람들조차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요셉푸스의 이러한 기록은 예수님 돌아가신 뒤 20년도 안된 때의 실제 역사기록이다. 요셉푸스는 AD 37년에 태어나서 100년에 죽은 사람이므로 예수님과 거의 같은 시대를 살았던 유대인 역사가이다. 그렇다면 예수님 때도 대제사장들은 성전경비대를 보내 힘없는 시골의 제사장들을 두들겨 패고 그들이 받은 십일조를 빼앗아오게 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예수님께서도 마가복음 11:17절에서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하셨다. 이는 당시 대제사장들이 그렇게 타락했다는 분명한 증거이다.
그런데 이제 거꾸로 강도들인 유대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강도로 몰아 강도를 잡듯 무장한 사람들을 보내 잡아 오도록 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이 예수님 곁에 서 있던 이 사람은 칼을 뽑아 강도 떼의 우두머리의 귀를 베어 정의의 심판을 내린 것이다. 이 사람은 세상적 기준으로 보면 참으로 용감한 사람이다. 혼자서 수많은 성전 경비대를 이끌고 온 경비대장의 귀를 베었기 때문이다. 이 사람이 베드로라면 자신이 약속한 대로 죽을 각오로 용감한 행동을 한 것이다. 이제 이 경비대장은 성전에서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레위기 2:18절에 보면 “무릇 흠이 있는 자는 제단 가까이 나올 수 없다” 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님 편에 서서 칼을 휘두른 사람은 스스로 옳은 일을 한다 생각하며 목숨을 걸고 이렇게 했을 것이다. 다른 모든 제자들도 다 하나님 편에서 정의의 심판을 내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당시 대부분의 이스라엘 사람들의 생각에 따른 정의의 심판이지 하나님의 심판은 아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구약의 예언대로 사악한 유대교 지도자들과 로마제국 지배자들을 몰아내고 이스라엘을 회복시켜줄 메시야를 기다렸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바로 기다리던 메시야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 것이다. 유다도 역시 그런 생각으로 예수님을 따른 것이다. 그러나 유다는 머리가 좋고 상황판단이 빨랐기에 이미 아니라고 생각하고 배반한 것이다.
하지만 이 사람을 비롯해 예수님을 따라 다니던 모든 사람들은 아직도 그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아직 뭘 몰라서 자신의 생각대로 정의의 칼을 휘두르고 있는 것이다. 이는 목숨을 건 매우 용감한 행동이지만 자신의 생각대로 한 것이지 하나님 뜻에 따르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생각대로 행동한다는 면에서는 이 사람이나 예수님을 랍비라고 부르며 예수님께 칼을 꽂고 있는 유다나 아무 차이가 없다. 또 예수님을 잡으러 온 성전 경비대나 그들을 보낸 유대교 지도자들이나 아무 차이가 없는 사람이었다. 모두가 하나님 뜻을 전혀 몰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밤을 새워 기도하면서 제자들에게 기도하라고 한 것이다. 이 사람은 기도하지 않았기에 자기가 한 행동이 의로운 행동인 줄 알고 정의의 칼을 휘둘러 악한 강도의 무리들의 우두머리 종의 귀를 벤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한다며 목숨을 걸고 열심히 하는 일도 칼을 휘두른 제자처럼 인간적인 생각으로 하는 열심일 수 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한다고 스스로 생각하며 열심히 교회를 위해 일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뜻에 따라 자신의 영광을 위해 열심히 일할 수 있다. 사사기 기록자도 사사기의 마지막절을 "사람들은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더라" 라고 끝을 맺었다.
오늘 말씀에 나온 배신자 유다나 칼을 휘두른 제자나 예수님을 잡아오라고 명령한 산헤드린 공회원들이나 모두 똑같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대로 행한 사람들이다. 어쩌면 우리가 교회에서 섬기고 봉사하는 모습도 역시 그와 같은지도 모른다. 우리 주님처럼 자신을 내려놓고 간절히 기도하며 하나님 뜻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우리 모두 다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동하면서 그것이 하나님 뜻이라고 착각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