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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섭 목사Dr Ahn's NT OT

새벽말씀 › 마가복음 › 13:14-20

Dawn Word

마가복음 13:14-20

하나님 노릇 하는 사람을 보면 불을 피하듯 정신없이 도망가라

2022. 8. 31. · 안정섭 목사 · 마가복음 13장 강해 설교

마가복음 13:14-20 속임수와 협박과 직접적인 핍박으로도 통하지 않자 사탄은 그 다음 전략으로 스스로 교만해져서 하나님의 자리에 서게 할 것이니 그런 것을 보면 산불을 피하듯 정신없이 달아나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이전 말씀에서 예수께서는 사탄이 직접적인 핍박을 통해 우리가 복음 전하는 것을 멈추게 하려 하지만 끝까지 견디며 복음을 전하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라 하셨다. 이어지는 말씀에서는 사탄이 전략을 바꾸어 눈치채기 어려운 속임수를 쓸 것이니 정신없이 달아나라는 내용이다.

14절에서 핵심적인 말은 “달아나라”이다.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 달아나라는 것이다. 멸망의 가증한 것이란 사막처럼 황폐하게 하는 가증한 것이란 뜻이다. 다니엘 9:27절과 11:31과 12:7절에 나온다. 이 말들은 모두 예배하는 장소를 더럽히고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하는 경우에 썼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멸망의 가증한 것을 많은 사람들이 조각상이나 우상이 그려진 군기가 성전에 서는 것과 같은 역사적 사건으로 설명하려 하지만 세운다는 말은 남성형이기에 조각상이나 군기에 적용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서지 못할 곳에 선 멸망의 가증한 것은 분명 남성인 사람이다. 이는 분명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소를 더럽히는 남자 사람을 뜻한다.

또 멸망의 가증한 것은 반드시 이방인들에 의해 더럽혀지는 것으로만 생각해서는 안된다. 예레미야 44:22절에 보면 “가증” 이라는 말과 “황폐” 말이 다음과 같이 동시에 나오는데 이 두 단어가 유대인들의 가증한 행위 때문에 그 땅을 황폐하게 하셨다는 말이 나온다. 여기서 황폐라는 말은 마가복음 13:14절의 멸망이란 말과 같은 말이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그 지도자들의 가증한 행위 때문에 바벨론을 시켜서 그 땅을 완전히 파괴하여 그 땅이 황폐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말씀에 나온 멸망케하는 가증한 것은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가 타락하여 그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성전에서 제사를 인도하면 그 사람이 바로 멸망의 가증한 것이다. 또 교회 지도자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예배를 인도하면 그 사람이 바로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이다.

바울도 데살로니가후서 2:4절에서 이런 사람을 멸망의 아들이라 했다. 이 멸망의 아들은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자신이 하나님이라 한다” 했다. 바울에 따르면 누구든지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하나님 행세를 하면서 자신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면 그가 바로 멸망의 아들이고 멸망케하는 가증한 것이다.

그 다음에 괄호 안에 있는 “읽는 사람은 깨달아라” 라는 말씀은 멸망의 가증스러운 것이 무엇인지 깨달아야 할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다. 오늘날과는 달리 당시에 성경을 읽는 사람은 예배를 인도하고 성경을 가르치는 자들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읽는 사람은 당시 교회 지도자들을 뜻한다. 성경은 회당에 하나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은 성경을 읽는 사람은 반드시 목회자일 필요는 없다. 누구든지 말씀을 읽고 깨달은 성숙한 신자들이면 이런 가증한 것을 알려야 할 책임이 있다. 지도자들이 영적으로 깨어있어서 이러한 멸망의 가증스러운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이 무엇인지를 분별하고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 주목해야 할 말은 “그 때에는” 이라는 말이다. 이는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지도자들이 깨달았을 때 이다. 그 때 유대에 있는 사람들은 산으로 도망하라 했다. 따라서 성경을 이해한 지도자들의 역할이 이러한 때에 매우 중요하다. 유대란 예루살렘을 둘러싸고 있는 지역으로 당시의 이스라엘의 중심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자들은 그곳에 머물면서 성전을 중심으로 유대인들에게 전도하려 했고 다른 지역으로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성전이 바로 하나님이 계신 곳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인 성전에 선 것을 보면 그곳을 떠나 산으로 달아나라는 것이다. 더 이상 하나님은 그곳에 계시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도 성전 파괴를 선언하신 것이다.

산이란 어디를 말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이것도 역시 예수께서 구체적으로 어디라고 말씀하지 않은 것을 여기가 맞다 저기가 맞다 추측할 필요가 없다. 분명한 것은 당시 예루살렘 성전을 하나님을 섬기는 중심지로 여기며 전도하던 크리스천들에게 그 지역에서 탈출하라는 것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위험에 처하면 성전으로 숨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역시 같은 태도를 가졌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반대로 성전으로부터 달아나 산으로 가라는 것이다. 갈릴리에 있는 사람들은 도망칠 필요 없다. 그냥 그곳에서 복음 전하면 된다. 단지 유대에 있는 제자들만 예루살렘 성전에 멸망의 가증한 사람이 서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 성전을 뒤로 하고 산으로 도망하라는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에게 산으로 도망하라고 하면 사람들은 배낭을 꾸려 도망하려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당시 제자들도 역시 집에 들어가 여행할 준비를 하고 도망하려 했을 것이다. 15절은 “그러나” 라는 말로 시작한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도망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어떻게 도망해야 할지 말씀해 주신 것이 15-16절이다.

먼저 15절은 지붕에 있는 자는 내려가지도 말고 무엇을 챙기려고 집 안에 들어가지도 말라 했다. 그만큼 급히 도망가야 한다는 것이다. 도망할 때 짐 챙길 시간도 없이 그냥 급히 달아나라는 것이다. 또 16절은 밭에서 일하는 사람의 모습이다. 밭에서 일하는 사람이 뒤돌아서서 뒤에 있는 옷을 집으러 가지도 말라는 것이다. 내려가서 짐 챙길 시간이 없을 뿐 아니라 돌아서서 바로 뒤에 있는 옷을 챙길 시간조차도 없다는 것이다. 깨닫는 즉시 도망가라는 것이다.

17-18절은 그렇게 급히 도망할 때 장애물을 말한 것이다. 17절은 그렇게 급히 도망해야 하는데 그 날에는 아이 밴 여자들과 젖먹이가 딸린 여자들은 불행하다 했다. 이는 그냥 불행한 정도가 아니라 복의 반대말이고 저주 받는다, 화가 있다 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급히 도망가야 하는데 뱃속에 있는 아이와 안고 있는 아이가 짐이 되어 급히 도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17절은 아이라는 짐이 장애물이라는 것인데 18절은 지형적인 장애물을 말한 것이다. “이런 일이 겨울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여라” 라는 말이 어떻게 지형적인 장애물일까? 이스라엘은 겨울철에 주로 비가 내린다. 다른 계절에는 강이 말라 있어 마음대로 건너 도망을 갈 수 있지만 겨울이 되면 갑자기 많은 비가 내리기에 wadi 라고 불리우는 건천에 물이 흘러 넘쳐 큰 강이 되어 건너지 못한다. 이는 지형적인 장애물 때문에 도망갈 수 없는 계절에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는 것이다.

19절은 “그날에 환난이 닥칠 것” 이라 했다. 그런데 “그런 환난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이래로 지금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라고 했다. 그렇다면 더욱 더 유대-로마 전쟁 때의 이야기가 아니다. 유대-로마 전쟁과 같은 환난은 수도 없이 많이 있었다. 그 때는 예수님을 믿는 자들만 환난을 받은 것이 아니라 모든 유대인들이 다 받았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환난은 믿는 자들에게 임할 환난이다.

이렇게 급히 도망해야 할 환난을 대부분의 학자들은 전쟁의 그림으로 해석한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주고받은 그림언어는 전쟁이라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AD 70년의 유대-로마 전쟁이라고 해석한다. 하지만 전쟁일 수 없는 것이 전쟁시 성전에 우상이나 우상을 나타내는 깃발이 꽂힌 것은 이미 전쟁이 끝났다는 신호이기에 그걸 보고 도망가라는 것은 말이 안된다. 또 유대-로마 전쟁은 그렇게 금방 끝난 전쟁이 아니고 66년에 시작되어 70년에 끝났다. 네로가 죽은 후 1년 사이에 로마황제가 4번이나 바뀌는 혼란이 그 사이에 있어서 전쟁이 잠시 중단되기도 했고 베스파시안 장군이 황제가 되기 위해 또 중단되어 그 아들 Titus가 전쟁을 끝냈다. 따라서 이것이 유대-로마 전쟁을 뜻한다면 그렇게 급히 도망하라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처럼 급히 도망가야 하는 그림은 전쟁의 그림이 아니라 화재와 전염병의 그림이다. 예수께서 비유로 사용하신 그림은 화재나 전염병인 것이다. 하지만 고대인들은 전염병이 퍼지는 것을 보고 도망할 줄 몰랐기 때문에 예수께서 사용하신 비유는 분명히 화재이다. 만약 집에 불이 났다면 이 경우 만약 뒤를 돌아 보거나 무엇을 가지러 간다면 바로 끝장이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께서 매우 긴박한 상황임을 말씀하신 것은 전쟁의 상황이 아니라 화재의 상황으로 이해해야 한다. 물론 이것은 실제 역사적 화재가 아니라 비유이다. 마귀가 가증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불처럼 삼키는 그림을 그리신 것이다.

그 환난의 날이 얼마나 견디기 힘든지 “주님께서 그 날들을 줄여 주지 않으셨다면 구원받을 사람이 하나도 없을” 라고 했다. 그런데 이 환난의 날은 모든 사람을 위해 줄여주신 것이 아니다. “주님께서 뽑으신 선택받은 사람들을 위하여” 라고 했기 때문이다. 개역개정은 단순히 “택하신 자” 라고 했지만 원어는 새번역처럼 “뽑으신 선택받은 사람”이다. 이는 “주님께서 선택하신 선택받은 사람” 이란 뜻이다. 이처럼 같은 말을 두번 반복해서 쓴 것은 특별히 강조하는 셈족 계열의 표현방식이다. 이러한 환난의 날도 특별히 주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생각해서 줄여주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큰 환난은 믿는 자들의 마음에 모신 성령님의 전이 완전히 파괴되어 황폐한 사막처럼 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대신 다른 것을 하나님의 자리에 놓고 섬기게 하는 가증한 것 때문에 그렇게 황폐화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제자들이 하나님께서 계신 곳으로 알아서 선교의 중심지로 삼고 있던 예루살렘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당시 대제사장이 스스로 하나님처럼 행세하고 영광을 가로챈 것이 바로 가증한 것이다. 교회 역사에서 교황이 바로 하나님의 자리에 서서 혼자 영광을 가로채면서 믿는 자들을 핍박한 것이 바로 가증한 것이다. 오늘날도 누구든지 교회에서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서 자신이 영광을 받는다면 그 사람이 바로 멸망의 가증한 것이다. 물론 이 가증한 것은 마지막 때에 분명히 나타날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경고는 누구든지 그러한 가증한 것이 되지 않도록 하라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산불이나 들불처럼 아주 빠른 속도로 퍼져나간다는 것이다. 머뭇거리고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가는 자신도 모르게 멸망하기 때문에 깨달은 지도자들은 즉시 사람들에게 알려 주어야 하고 들은 사람들은 정신없이 도망해야 한다. 아니면 자신들이 모두 가증한 우상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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