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2:41-44 예수께서는 한 가난한 과부가 자신의 전 재산을 넣는 것을 보시고 그 여인의 진실된 경건을 보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이전 말씀에서 예수께서는 일상 생활에서도 예복을 입고 다니며 거룩한척하면서 실제로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율법학자들처럼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하셨다. 이어지는 말씀은 예수께서 두 렙돈을 헌금하는 과부를 보시고 거짓된 거룩의 예복을 입은 율법학자의 경건과 과부의 옷을 입은 과부의 경건을 비교하시는 말씀이다.
12:35-44절은 전체가 제자들을 가르치시는 장면이다. 먼저 35-37절은 질문과 성경과 논리를 사용해서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것을 부정하던 율법학자들의 거짓된 가르침이 잘못된 것을 지적한 것이다. 38-40절은 말로 가르치신 예수님은 그 다음에 사람들 앞에서 거룩한 척하는 율법학자들의 거짓된 행동을 지적한 것이다. 41-44절은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과부는 하나님 앞에서 진실된 행동을 했다는 것이다. 율법학자들처럼 거룩한 옷만 입고 말로만 가르치면 안된다는 것이다. 과부처럼 수치스러운 옷을 입고도 진실된 행동으로 가르침을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다. 비교되는 것은 사람들에게 잘보이려고 거짓된 행동을 하던 율법학자들과 하나님 앞에서 진실된 행동을 한 과부이다.
41절부터 장면이 바뀐다. 41절을 보면 예수님은 아직도 성전 뜰에 계신다. 헌금함 맞은쪽에 앉아서 사람들이 헌금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계셨다. 38절에서 “율법학자들을 조심하라” 는 말도 잘 살펴보라는 말인데 여기서도 예수님은 보고 계셨다. 그 목적은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함이다. 이 헌금함은 의무적으로 드려야 하는 반세겔을 드릴 때 사용하기도 했고 또 자발적인 헌금을 드릴 때도 사용했다. 이 헌금은 성전 건물이나 번제를 위해 사용했다. 본문의 문맥을 보면 많이 넣은 사람들도 있었기에 이는 자발적인 헌금이다.
41절에는 많이 넣는 부자가 여럿 있었다 했는데 원문은 “많은 부자들이 많은 헌금을 넣었다” 이다. 이와 비교되는 것은 42절의 한명의 과부가 두렙돈을 넣었다 이다. 많은부자와 한명의 과부가 비교되고 많은 헌금과 두렙돈이 비교된다. 렙돈은 당시의 최소 화폐단위였다. 두렙돈은 당시 밀가루 한주먹 값도 안되던 것이다.
여기 나오는 많은 부자들은 율법학자들과는 다른 사람들이다. 당시 윫법학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기 위해 온 삶을 드렸던 사람들이다. 제사장이나 레위인들과는 달리 이들의 수입은 따로 없었다. 율법학자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경건한 자들이 이들의 가르침에 감사해서 자발적으로 후원하는 것으로 살았던 사람들이다. 40절에서 과부의 가산을 삼킨 율법학자들은 41절의 헌금을 많이한 부자들과는 연결하면 안된다.
이 과부가 헌금하는 것을 본 예수님은 제자들을 곁에 불러 놓고 말씀하기 시작했다. 곁에 불러 놓았다는 말은 흩어져 있던 제자들을 불러 모았다는 뜻이 아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었지만 특별히 가르치려고 집중해서 잘 보라고 부르신 것이다. 예수님은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라고 말씀을 시작하셨다. 이는 당시 율법학자들의 가르침과 반대되는 중요한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칠 때 쓰시던 말이다. 율법학자들은 말로만 가르치며 사람들 앞에서 잘보이려고 거짓된 행동을 했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율법학자들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니 잘 들으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어떻게 이 여자가 과부인 것을 알아보았을까? 창세기 38:14절을 보면 “다말이 과부의 의복을 벗고” 라는 말이 나온다. 그렇다면 과부는 과부의 옷을 입어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창세기 시대만 그랬을까? 구약 외경인 유딧 8:5절에 보면 “그녀는 베옷을 입고 과부의 옷차림으로 지냈다” 라는 말이 나온다. 유딧은 구약 외경인데 예수님 오시기 전 시대인 마카비 왕조 때 기록된 소설 같은 글이다. 예수님 오시기 전에도 과부들이 과부의 옷차림을 해야 했다면 예수님 시대의 과부들도 같은 옷차림을 했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여자가 과부인 것을 금방 알아보신 것이다.
이 과부의 옷차림은 앞에서 나온 율법학자의 발끝까지 내려오는 흰색 베옷과 비교가 된다. 율법학자의 옷은 최고의 명예의 상징이다. 반대로 이 과부의 옷차림은 명예롭지 못한 여자의 상징이다. 율법학자는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예복을 입고 다녔지만 이 여자는 보호막이 사라진 무시당하는 존재라는 것을 나타내는 옷을 입고 다녔다. 성경에는 나와있지 않지만 마가복음이 처음 들려지던 초대교회 성도들은 금방 이 두가지 옷을 비교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도 이 본문에서 율법학자의 옷차림과 이 여인의 옷차림의 비교를 놓치면 안된다.
43절의 “이 가난한 과부” 라는 말은 원어에서는 “이 과부, 곧 가난한 자” 라고 되어 있다. 당시엔 과부라고만 해도 정말 불쌍한 존재였다. 그런데 그 뒤에 한박자 늦게 “가난한 자” 라고 따로 덧붙인 것은 이 여인은 과부 중에서도 특별히 더 불쌍한 존재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과부일 뿐 아니라 특별히 아주 가난한 여자 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가난한 과부가 어느 누구 보다도 더 많이 넣었다고 했다. 이는 앞에서 돈을 많이 넣은 많은 부자들보다 더 많이 넣었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이어서 44절에서 그 이유를 설명한다. 원문에는 44절 맨 앞에 왜냐하면 이라는 말이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모두 다 넉넉한 데서 얼마씩을 떼어 넣었다는 것이다. “넉넉한 데서” 라는 말은 넘친다는 뜻이다. 많은 부자들이 많이 드렸지만 그들은 자신의 그릇에 이미 흘러 넘쳐서 더 이상 담을 수 없는 것 중에서 일부를 드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여인은 가난한 가운데서 가진 것 모두 곧 자기 생활비 전부를 털어 넣었다는 것이다. “가난한 가운데서” 라는 말은 원래 부족하다는 뜻이다. 이 여인의 그릇은 넘치지 않고 부족하다는 것이다. 얼마나 부족한가 하면 겨우 두 렙돈 밖에 안들어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그릇 안에는 자신이 살아가기에도 부족한데도 가진 모든 것을 다 드렸기에 이제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다. 자기 생활비의 전부를 넣었다는 말은 본래 문자적으로는 그녀의 모든 생명 전부를 던져 넣었다는 뜻이다. 흘러 넘쳐서 어차피 자신이 가질 필요가 없는 것 중에 일부를 드린 것과 자신이 가진 부족한 것을 다 던져 넣어 자신의 생명 전체를 던져 넣은 것이 비교되는 것이다.
당시 성전을 맡았던 유대교 지도자들은 부자들의 헌금을 좋아했고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자의 많은 헌금은 어차피 남아도는 것 중에 일부 드린 것으로 낮게 평가하셨다. 반대로 세상 사람들 보기에는 아무것도 아닌 과부의 헌금은 높이 평가했다.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의 기준에 따라 평가하지 않고 하나님의 기준으로 평가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과는 달리 하나님의 기준을 가르치겠다는 뜻이다. 본문의 초점은 사람의 기준으로 평가하지 말고 하나님의 기준으로 그 진실된 마음을 보라는 것이다.
오늘날 상당수의 성경 해석자들은 40절에서 율법학자들이 과부의 가산을 삼켰다는 것의 증거가 바로 이 말씀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헌금을 강요한 것이 40절에서 율법학자들이 과부의 가산을 삼킨 것이라고 해석한다. 이러한 해석은 40절에서 과부의 가산을 삼킨다는 말에 꽂혀 있다가 42절에서 과부가 두 렙돈을 넣었다는 말을 보고는 새로운 발견을 했다며 이렇게 자의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하지만 이 여인은 성전에 헌금한 것이지 율법학자들에게 헌금한 것이 아니다. 이 헌금은 율법학자들에게 주는 것이 아니다. 성전에서 드리는 헌금은 성전을 위해 쓰여졌기 때문이다. 이 여인은 하나님께 감사를 표현하고 싶지만 가진 것이 없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넣어 자신의 감사를 표현한 것이다. 하나님을 향해 진실된 마음을 표현한 과부를 예수님은 율법학자의 거짓된 경건과 비교하신 것이다. 초점을 헌금에 맞추면 예수님 말씀의 핵심을 놓친 것이다. 38-40절에 담긴 율법학자가 예복을 입은 그림과 41-44절에서 한 과부가 과부의 옷을 입은 그림이 대조가 되는 것이다. 본문에는 과부가 어떤 옷을 입었다는 것이 나오지 않지만 마가복음을 처음 듣던 성도들은 본문을 들으며 과부가 입은 옷을 떠올렸다.
이 과부는 과부의 옷을 입고 겨우 정말 길에 버려도 주워가지 않을 정도의 돈을 헌신을 했다. 본문의 초점은 사람들 보기엔 무시할 정도의 금액이지만 하나님은 그 마음을 보시고 아신다는 것이다. 이 여인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을 하나님께 드렸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앞에서 진실된 마음을 보인 과부를 거짓된 경건을 자랑하던 율법학자와 비교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참된 경건 즉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본받으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는 율법학자의 옷을 입고 거룩한 척 과시하기 쉽다. 경건한 모습으로 예배에 잘 참석하고 헌금도 많이 드리고 교회에서 여러가지 봉사를 하면서 사람들의 눈을 의식했다면 이미 율법학자의 옷을 입은 것이다. 우리는 율법학자의 거짓된 경건의 옷을 벗고 부끄러운 과부의 옷을 입어야 한다. 과부의 옷을 입고 이 과부처럼 진실된 마음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이 구절을 가지고 헌금을 잘하라고 한다면 본문이 본래 말하는 초점에서 벗어난 것이다. 이는 성경에서 출발하여 성경이 말하고 있는 본래 의미를 뽑아 전달한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에서 출발하여 성경을 도약의 발판으로 삼아 자기 하고 싶은 말을 전달한 것이다. 반대로 이 구절을 가지고 교회가 헌금을 강요하는 것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도 역시 본문의 초점에서 벗어난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절대로 헌금을 잘 하라고 하신 것이 절대로 아니다. 예수님은 율법학자들처럼 사람들을 의식하고 위선적인 행동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대신 이 과부처럼 사람들보다 하나님을 의식하고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하라는 것이다. 사람들 보기엔 겨우 두렙돈 같은 헌신이지만 하나님께 온 마음 다해 우리 자신의 마음을 드리라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사람들이 받는 존경을 다 누리면서 동시에 모든 것을 다 바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몸처럼 사랑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사랑은 물질로 십일조를 드리듯 나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도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고 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마음이 세상으로 가 있던 종교적 연극배우들의 마음 속을 다 확인해 보시고 책망하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당시 사회의 최고 가난한 자였고 아무런 명예도 없던 과부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가지고 있는 것을 보시고 진실된 믿음의 본보기로 보여주며 제자들을 가르친 것이다. 우리 주님은 우리 속마음을 다 아신다. 사람을 속일지 몰라도 우리 주님은 속일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율법학자 같은 위선의 옷을 벗고 멸시 천대 받는 과부의 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 진실된 마음을 드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