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1:29-33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와서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예수께 묻자 예수께서는 답변 대신 요한이 침례를 주는 권위가 누구에게서 온 것인지를 물으셨다. 이에 공회원들이 답변하지 못하자 예수께서도 답변하지 않으시겠다고 하셨다.
이전 말씀에서는 예수께서 다시 예루살렘에 들어오셔서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모두 몰려와 무슨 권위로 이런 일들을 하는지 물었다. 이어지는 말씀은 이들의 질문에 대해 예수께서 요한이 침례를 준 권위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인지 아니면 사람인 너희들이 준 것인지 질문하심으로 저들의 입을 막으신 내용이다.
무슨 권위로 이런 일들을 하는지 누가 이런 권한을 주었는지 물은 것에 대해 29절에서 예수께서는 직접 직접 답변하지 않으셨다. 대신 한가지 반대질문으로 답변을 대신하셨다. 이는 마치 예수님의 대적들은 예수님을 향해 칼을 휘둘렀는데도 헛손질만 했는데 예수님은 단칼에 저들의 급소를 향한 것과도 같다. 예수님의 단 한번의 반격을 제대로 방어하면 예수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들을 하는지 대답하시겠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반격은 30절에 나오는 요한의 침례가 하늘에서 온 것이냐 아니면 사람에게서 온것이냐 라는 질문이다. 하늘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대신해서 쓰던 말이다. 사람은 예수님 앞에 있던 유대교 지도자들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요한이 침례를 준 권위는 하나님께서 준 것이냐 아니면 너희들이 준 것이냐 라는 질문이다.
31절을 보면 제대로 한방 맞은 공회원들은 서로 의논하기 시작했다. 장기판으로 말하면 외통수에 딱 걸린 것이다. 만약 요한의 권위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면 저들은 예수님도 믿었어야 했다. 왜냐하면 요한은 자신을 증거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뒤에 오실 분을 준비하러 왔다고 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뒤에 오실 분을 맞이하려면 회개하고 침례를 받아야 한다며 침례를 주었기 때문이다.
32절은 만약 요한의 침례가 사람으로부터 왔다고 말한다면 요한은 하나님의 예언자가 아닌 셈이다. 단지 자신들이 임명한 사람에 불과한 것 되는 것이다. 그렇게 말한다면 유대교 지도자들은 모든 유대인들의 적이 된다. 왜냐하면 모든 무리들이 요한을 하나님의 선지자로 믿고 침례를 받았기 때문이다. 공회원들은 자신들이 요한을 임명하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또 하나님께서 요한을 보내셨다는 것도 믿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자신들의 생각을 드러내면 무리들이 하나님을 모독한다며 돌을 들어 치려고 했을 것이다. 진퇴양난에 빠진 공회원들은 무리들을 두려워하여 대답을 회피한 것이다.
이에 대해 예수님도 역시 대답하지 않겠다고 하셨다. 만약 저들이 옳게 대답했다면 예수님도 자신의 권위가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분명히 밝히셨을 것이다. 그러나 저들이 대답하지 않았기에 예수님도 대답하지 않으신 것이다. 저들의 대답은 자신들의 입장을 방어하기에 너무 약했다. 또 답한 것도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답이 아니었다. 많은 무리들이 이 모습을 보고 있었고 첫번째 결투에서 공회원들은 참패를 당했다. 정말 큰 망신을 당한 채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예수님은 단 한번의 질문을 통해 저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있다는 것을 모든 무리들 앞에서 드러낸 셈이다. 저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은 채 하나님의 성전을 독점하고 성전을 이용해서 백성들을 착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단칼에 저들의 탈을 베어 본 모습이 다 드러나게 하신 것이다. 대부분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회개하고 침례를 받은 뒤 하나님이 보낼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백성들의 지도자들인 공회원들은 하나님을 믿지도 않으면서 잘 믿는 척 했다. 저들은 가면을 쓰고 자신들의 본 모습을 숨기며 백성들 위에 군림했던 것이다. 예수님은 한번의 질문으로 저들의 탈을 벗긴 셈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던 열매는 바로 하나님의 통치와 그로 인해 하나님 닮은 사람들의 공동체가 번영하는 것이다. 그런데 유대교 지도자들은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거룩한 사람들이라며 자신들이 성전의 모든 권위를 차지하고 사람들을 함부로 정죄하기만 해서 죄인으로 몰아 내쫓았다. 하나님 말씀을 이용하여 사람들을 착취하여 자신들만이 풍요롭게 살면서 존경 받는 자리에 있었던 것이다.
이는 마치 한 사람이 자기 집 뒷뜰에 허밍버드 먹이통를 설치했는데 허밍버드 한 마리가 그것을 독차지하고 있는 것과도 같다. 그 사람이 뒷뜰에 있는 나뭇가지에 허밍버드 먹이통을 설치한다면 그 목적은 수많은 허밍버드를 몰려와 함께 먹이를 먹으며 노는 모습을 보려는 것이다. 그런데 허밍버드 한 마리가 와서 그곳을 차지하고는 다른 허밍버드들을 계속 쫓아내는 것과도 같다. 그 먹이통은 그 허밍버드의 것이 아니다. 그 통은 허밍버드들이 먹는 모습을 보려고 설치한 사람의 것이다. 먹이가 떨어지면 그 주인은 언제든지 또 채워줄 것이다. 하나님은 수많은 허밍버드들이 자기 집 뜰에 몰려와 먹으며 어울려 노는 모습과 같은 공동체를 원했는데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은 모두 다 정죄하고 다 쫓아 버린 것이다.
예레미야 22:16절에도 요시야 왕이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신원하고 형통하였다고 했다. 요시야는 가난하고 궁핍한 자들의 입장에서 억울함을 풀어주고 그들과 친구가 되어 함께 살았다는 뜻이다. 이어서 "이것이 나를 앎이 아니냐?" 라고 했는데 여기서 안다는 말은 여호와와 친밀한 친구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다. 요시야는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알고 깊이 이해했기에 하나님의 뜻대로 통치했기에 하나님께서 하나님과 마음이 잘 통하는 친구로 인정해 주신 것이다. 요시야 왕은 주인의 마음을 알고 많은 허밍버드들을 불러 함께 먹게 하며 함께 즐겁게 사는 공동체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냐 반대로 여호야김은 자신만 잘먹고 잘 살기 위해 백성들의 것을 탈취하고 백성들을 노예로 부리고는 품삯도 주지 않았다고 했다. 예수님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이 마치 다른 허밍버드들을 다 쫓아버리고 먹이통을 혼자 차지하려한 허밍버드 같고 여호야김 왕과도 같았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도 자신들만이 거룩하다고 생각하며 다른 사람들을 함부로 비판하고 정죄하여 교회를 떠나게 만든다면 허밍버드 먹이통을 독차지하고 다른 새들을 내쫓는 새와 같고 여호야김 왕과도 같고 오늘 말씀에 나온 산헤드린 공회원들과도 같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