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1:12-14 예수께서는 잎이 무성한 무화과 나무를 보시고 열매를 찾으셨지만 찾을 수 없자 그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셨다. 이는 잎만 무성한 무화과 나무 같은 유대교 지도자들을 저주하신 것이다.
이전 말씀은 예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자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들은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정치적 메시야로 생각하고 왕의 대관식 때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환영행사를 했지만 정작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성전을 방문하셨을 때는 아무도 환영하지 않았다. 이어지는 말씀은 성전에서 주인 행세를 하며 예수님을 배척하던 자들을 저주하시는 장면이다.\ 아무도 영접하는 사람이 없는 성전을 방문하고 난 다음날 예수님 일행이 베다니에서 나왔다. 이튿날 이란 말에는 시간이 없기 때문에 하루 중 어느 때인지는 알수 없다. 예수님께서 시장하셨다고 했기에 베다니에서 아침식사를 하시고 나오셨고 점심 때가 가까웠을지도 모르겠다. 시장하시던 중에 멀리서 잎사귀가 있는 무화과 나무를 보시고 혹시 열매가 있을까 해서 그 나무 가까이에 가셨다. 예수께서 가까이 가셔서 찾아보셨는데 잎사귀만 있을 뿐 아무것도 없었다.
13절 끝부분은 “왜냐하면 무화과 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라며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팔레스틴 지방에서 무화과는 6월에 익는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유월절 때이므로 4월이다. 무화과 철이 아닌데 왜 열매를 찾으셨을까? 이는 우리 교회 현관 옆에도 무화과 나무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무화과 나무는 봄철에 열리기도 하지만 가을에도 열리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스라엘에서는 주로 봄에 무화과를 수확하지만 또 가을에도 적은 양이지만 수확한다. 수확이 끝난 뒤에도 늦게 열린 작은 열매가 남아서 겨울을 나기도 하기에 예수님께서 무화과 철이 아닌 때에 무화과를 찾은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또 13절 앞부분의 “열매가 있을까 하여” 라는 말은 원어에서는 원어에는 열매가 아니라 그냥 “뭔가” 라는 말이다. 구체적으로 “무화과”나 아니면 “열매” 라고 하지 않고 그냥 “뭔가” 라고 한 것은 분명한 뜻이 있다. 이것은 열매라고 하기에는 너무 작은 무화과 열매의 싹이라도 있으면 찾겠다는 뜻이다. 다 익은 열매가 아니라 바로 이런 열매를 찾으신 것이다. 무화과는 열매 속에서 꽃이 피기에 마치 꽃도 안피고 열매가 여는 것처럼 보인다. 예수님은 열매라고 부르지도 않는 생긴지 얼마 안된 무화과의 작은 싹이라도 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갖고 찾으신 것이다. 만약 무화과 철이었다면 좀 떨어진 거리에서 보아도 찾을 필요도 없이 분명히 보였을 것이다. 그런데 가까이 와서 찾으셨다는 것은 작은 열매의 싹이라도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다가오셔서 세심하게 찾으신 것이다.
14절에보면 “예수께서 그 나무에게 말씀하셨다” 라고 했다. 원어에서 이 말은 “대답하시며 말씀하셨다” 라는 말이다. 이는 찾고 나서 나무에게 대답하시며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나무에게 말하는 것처럼 쓰는 것은 유대인들의 문서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그렇다면 나무가 질문한 것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일부 성경 해석자들은 "지금은 무화과 철이 아닌데요?" 처럼 물음표를 넣어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무화과 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라는 말 앞에 왜냐하면이라는 말 때문에 그럴 수 없다. 합리적인 사고로 해석하려 하기 보다는 성경 본문 자체에 충실하게 해석하고 이해하도록 해야 한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말씀하시길 “이제부터 영원히, 네게서 열매를 따먹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왜 예수님은 쓸데없이 나무를 이렇게 저주하셨을까? 이는 예수께서 열매없는 무화과 나무를 통해 제자들을 가르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14절 끝부분의 “제자들이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 라는 말이 바로 제자들을 가르치는 상황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들었다는 말은 원어에서 제자들이 계속해서 주의깊게 듣고 있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열매없는 무화과 나무를 비유로 사용하여 제자들을 가르치신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무화과 나무는 어떤 뜻으로 쓰였는지 알아야 한다. 미가 4:4절에 보면 “사람마다 자기 포도나무와 무화과 나무 아래 앉아서 평화롭게 살 것이다” 라고 했다. 또 스가랴 3:10절에서는 “너희가 각각 포도나무와 무화과 나무 아래로 서로 초대하리라" 라고 했다. 무화과 나무는 포도나무와 함께 이스라엘 사람들의 생명을 살리던 중요한 먹거리였기 때문에 평화와 안전을 뜻하는 말로 쓰였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평화와 안전은 성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민족의 침략을 받았을 때에는 성전이 파괴되었고 그 평화와 안전은 깨졌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본문의 무화과 나무는 성전을 상징하는 말로 쓰였을 것이다. 바로 앞인 11:11절에서 성전을 둘러보신 후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심으로 가르친 것도 우연은 아니다. 또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신 이야기 뒤에는 성전을 청결하게 하시는 이야기가 나온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서 무화과 나무는 분명히 성전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14절 끝부분에 “제자들이 계속해서 주의깊게 듣고 있었다” 라는 말은 무화과 나무 이야기가 상징이나 비유로 쓰였다는 분명한 증거가 된다.
만약 무화과 나무가 성전을 상징하는 말이었다면 예수께서 무화과 나무에서 무었이든 찾으시려 한 것은 바로 성전 안에서 일하던 두 종류의 사람들을 뜻하는 것이다. 14절에 나오는 “열매” 라는 말도 주로 상징적인 의미로 쓰이던 말이다. 이 열매가 뜻하는 말은 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다. 제사장은 성전에서 제사를 인도하던 사람들이다. 오늘날로 말하면 예배를 인도하는 자인 셈이다. 율법학자는 성전에서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던 사람들이다. 오늘날로 말하면 성경공부를 인도하는 사람들인 셈이다.
예수님은 완전히 익은 열매를 찾으신 것이 아니다. 뭔가 아주 작은 열매의 싹이라도 있나 해서 찾으신 것이다. 이는 성전 안에서 백성들이 예배하게 하고 하나님 말씀을 배우게 하는 지도자들 중에 아주 작은 무화과 열매의 싹이라도 있는가 하여 찾으신 것이다. 이는 미래의 희망이 될만한 지도자들을 찾으신 것이다. 그런데 하나도 찾지 못하셨다. 그래서 “이제부터 영원히 네게서 열매를 따먹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라고 하신 것이다.
오늘날 교회도 역시 잎만 무성한 무화과 나무는 아닌지 생각해봐야 한다. 음악가들의 연주회보다 더 멋지고 화려한 찬양들이 흘러 넘치는 교회들도 많다. 감동적인 설교를 하는 설교자들도 넘치고 누가 봐도 괜찮은 성도들이 많이 있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들도 예수님 당시 성전 안에 있던 유대교 지도자들처럼 잎만 무성한 무화과 나무가 아닌지 생각해봐야 한다.
다른 사람들을 손가락질하기 보다는 나 자신이 잎만 무성한 무화과 나무가 아닌지 돌아봐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오셔서 찾으시는 것은 풍성한 수확이 아니라 작은 무화과 열매의 싹과 같은 작은 희망이다. 다른 사람들을 향해 손가락질 하며 비판하는 것은 바리새파 사람들과 같은 위선이다. 내가 바로 예수께서 찾으시는 그 희망의 싹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