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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섭 목사Dr Ahn's NT OT

새벽말씀 › 마가복음 › 10:1-9

Dawn Word

마가복음 10:1-9

하나님 말씀의 참 뜻에 순종하라

잔잔해진 바다 위의 작은 배 · 마가복음 4장

2022. 7. 19. · 안정섭 목사 · 마가복음 10장 강해 설교

마가복음 10:1-9 예수께서 유대지방에 오셔서 가르치실 때 바리새파 사람들은 이혼에 관한 질문으로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려 죽이려고 했지만 예수께서는 두 사람이 결혼하면 한 몸이라며 하나님께서 짝지어주신 것은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며 하나님 말씀의 참 뜻에 순종하라고 하셨다.

이전 말씀에서 예수께서는 모든 사람이 다 소금이 뿌려지듯 불 같은 시험을 만날 것이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겸손의 소금을 간직하여 서로 평화하라고 하셨다. 이어지는 말씀은 이혼에 관한 말씀인데 가장 가까운 부부관계에서 먼저 겸손의 소금을 간직하여 서로 평화하라는 뜻이다.

오늘 말씀은 “거기에서 떠나” 라는 말로 시작한다. 원어는 “거기에서 일어나서” 라는 뜻이다. 집 안에 앉으셔서 제자들을 가르치다가 거기서 일어나셨다는 뜻이다. 일어나신 예수님은 유대지방과 요단강 건너편으로 가셨다. 예수께서 유대지방에 가시자 무리들이 다시 예수께 모여들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전에 늘 하시던대로 무리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가르치셨다는 말은 계속 가르치셨다는 뜻이기 때문에 가르침이 한참동안 지속되었다는 뜻이다. 몇시간이 아니라 며칠동안 계속 가르치셨을지도 모른다. 이 부분에서는 예수님의 가르치시는 장면은 바리새파 사람들과 논쟁을 시작하는 배경이 된다.

예수께서 유대지방에서 무리들을 가르치신다는 소문을 들은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께 나와서 질문을 했다. 그 질문은 한 남편이 한 아내를 버려도 되느냐는 것이다. 버려도 되느냐는 말의 본래 뜻은 “버리는 것이 율법에 합당하냐” 는 질문이다. 사실 율법에 관해서는 바리새파 사람들이 전문가였다. 몰라서 질문한 것이 아니다. 백성들을 가르치는 것은 바리새파 사람들이 독점하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놀라운 가르침으로 무리들을 가르치자 바리새파 사람들은 자기들의 권한을 빼앗아갔고 권위에 도전했다고 생각해서 적대감을 가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께서 유대지방에 오셔서 가르치시자 무리들이 예수님께로 몰려간 것이다. 그래서 그동안 가졌던 적대감이 폭발한 것이다. 이 질문은 시험하려는 것이라 했는데 사실은 예수님을 죽게 하려는 함정이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대부분 이혼과 재혼을 합법적이라 생각했다. 예수님 시대에 살았던 필로나 요셉푸스가 남긴 글을 보면 당시 랍비들도 이혼과 재혼을 금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당시 권위있는 랍비들의 가르침에 따라 이혼이 율법에 맞는다 생각하고 있었다. 비록 소수이지만 이혼을 엄격하게 금했던 사람들도 있었다. 쿰란에서 숨어지내면서 공동체 생활을 하던 에세네파들은 이혼과 재혼을 엄격히 금했다는 것을 사해문서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침례요한은 에세네파에 속해있던 사람이다. 침례요한도 이혼과 재혼을 반대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갈릴리 지방을 다스리던 사람은 헤롯 안티파스였다. 헤롯은 동생네 집에 갔다가 헤로디아와 눈이 맞았다. 헤로디아는 대단한 야심을 가지고 있던 여인이었다. 헤롯 안티파스가 훨씬 더 장래가 유망한 사람이라 보고 살아있는 남편을 버리고 헤롯 안티파스에게 갔다. 하지만 헤롯 안티파스는 이웃나라 나바티아 왕국의 왕 아레타스의 딸과 정략결혼을 한 상태였다.

요셉푸스에 따르면 아레타스의 딸은 헤롯의 이러한 낌새를 알아채고 아버지에게로 도망갔다. 이는 나바티아 왕국과 갈릴리 간의 전쟁이 벌어질 상황이었다. 하지만 로마제국이 개입해서 전쟁을 막았다. 로마제국이 개입하지 않았더라면 헤롯은 자신의 왕국을 잃었을 것이다. 이런 민감한 상태에서 침례요한은 헤롯의 이혼과 결혼이 잘못되었다고 비판을 했다. 하지만 침례 요한이 대중들에게 인기가 있었기 때문에 함부로 죽이지는 못했다가 기회가 되었을 때 죽인 것이다.

당시 이혼은 이 두사람 때문에 매우 민감한 문제였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께서 랍비들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침례요한과 에세네파처럼 반대할 것을 알고 이러한 민감한 문제를 가지고 질문을 한 것이다. 알면서도 예수께 와서 이런 질문을 한 것은 예수님도 요한과 연계되어 있는 것으로 헤롯에게 고발해서 예수님을 죽이려는 것이다. 당시 바리새파 사람들은 헤롯과 밀착되어 있었다. 헤롯은 침례요한을 죽였으니 예수님도 이혼과 재혼을 반대한다는 것을 자신들이 알리기만 한다면 헤롯은 분노해서 예수님도 죽일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이런질문에대해3절을보면예수님은답을하시지않고바리새파사람들에게다움과같이다시질문을하셨다. “모세가너희에게어떻게하라고명령했느냐?” 라며저들이한질문을다시저들에게되돌려보내신것이다.원문에보면 “너희” 라는말을앞에넣었다. 특별히“너희”를특별히강조하려고말의순서를바꾼것이다. 영어에서는말의순서가바뀌면말이안되지만그리스어는한국말처럼말의순서를바꾸어강조하는경우가많이있다. 2절에서바리새파사람들은막연히“한남자” 라고해서자신들은피해가려했기에예수님은율법에서는너희에게뭐라고명령했는지되물으신것이다.

이러한 예수님의 반대질문에 대해 바리새파 사람들이 대답한 것이 4절이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이혼증서를 써 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을 모세는 허락하였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바리새인들의 대답은 신명기24:1-4절에 나온다. 예수님은 너희에게 모세가 뭐라고 명령했느냐고 질문하셨다. 모세의 명령은 함부로 아내를 버리지 못하도록 금지한 것이다. 그런데 바리새파 사람들은 모세가 이렇게 허락했다고 엉뚱한 대답을 했다. 예수께서는 "너희에게"라는 말을 특별히 강조해서 질문하셨는데도 이들은 “우리” 라는 말도 빼버렸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이 자신들에게 준 것이라고 늘 떠들어왔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모세가 뭐라고 명령했느냐?” 라는 질문에 대답할 수 없어 자신들은 빼고 엉뚱한 대답을 한 것이다. 이 말이 아내를 버리지 말라는 뜻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자신들은 피해가려고 한 것이다.

신명기 24:1-4절의 핵심은 아내를 버린 남편이 자신이 버린 여인과 재혼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는 이혼과 제혼을 허락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가나안 땅을 더럽히지 말라는 것이다. 그 땅에 살던 가나안 사람들이 함부로 이혼하고 다시 그 아내를 맞아들여 그 땅을 더럽혔다는 것이다. 너희들은 그렇게 하지 말라는 뜻이다.

이혼증서를 써주라는 것도 민수기에는 나오지 않고 신명기에만 나오는 것은 광야에서태어난 신명기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구원의 기적을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신명기의 세대들은 가나안 사람들의 더러운 관습을 따라갈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이혼증서를 써주는 것도 모세가 명령한 것이 아니다. 흔히 신명기 세대가 하고 있던 것을 가지고 상황을 가정을 하며 그렇게 했을 경우 다시 원 아내를 맞아들이지 말라는 명령한 것이다.

여기서 이혼증서라는 말이 당시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알아야 이 구절을 이해할 수 있다. 당시 남자들은 다른 여자가 더 좋아보이면 원 아내를 버리고 재혼을 했는데 조금 살다보니 원 아내가 훨씬 나았던 것이다. 그래서 새로 결혼한 아내를 버리고 처음에 버린 아내를 자기 아내라고 주장하며 빼앗아 온다. 그러면 다시 시작한 한 가정이 깨어지고 마는 것이다.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당시 남자들은 이혼증서를 썼다. 여기 나오는 이혼증서란 말은 재산권을 포기한다는 뜻을 가진 전문적 용어이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여자를 재산으로 생각하고 돈을 주고 사고 팔았기 때문이다. 결혼할 때 신부의 아버지에게 돈을 주는 것은 바로 신부를 돈주고 사는 것이다. 자신들의 재산권을 행사하는데 서로 문제가 되기 때문에 남자들끼리 약속해서 재산권 포기 각서를 써 주던 관행을 예로 든 것이지 절대로 모세가 명령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이렇게 마음대로 이혼했던 것은 바로 “수치되는 일” 을 잘못 해석했기 때문이다. 당시 샴마이 학파는 수치되는 일이 바람나는 것을 가리킨다고 해석해서 바람난 경우에만 이혼할 수 있다고 해석했다. 이렇게 해석한다면 마음대로 이혼할 수 없다. 하지만 힐렐학파는 이 말을 저녁을 망쳤어도 이에 해당한다고 했다. Rabbi Aqiba는 한걸음 더 나아가서 “더 예쁜 여자를 발견한 경우에도 해당한다" 고 주장했다.

당시유대인남자들은대부분힐렐학파의가르침을따랐고랍비들도거의대부분이다힐렐학파였다. 마음대로이혼할수있기때문이다. 자신들의탐욕과죄악을합법화하기위해하나님말씀을제멋대로해석해서가르치고는자신들은이혼증서를써주고아내를버렸으니하나님뜻에순종한것이라고했던것이다. 오늘날도힐렐학파처럼성경을가르치면열광을하고샴마이학파처럼가르치면욕을먹을것이다.

바리새파 사람들의 이러한 대답에 대해 예수님은 5절에서 “모세는 너희의 완악한 마음 때문에 이 계명을 너희에게 준 것이다” 라고 반박하셨다. 완악함이란 말은 원래 목이 곧다는 말이다. 주로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경우에 쓰인 말이다. 이 말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거만하다는 뜻으로 쓰이지 않았다. “너희의 완악함 때문에” 라는 말을 앞에 배치하여 바리새파 사람들의 완악함을 강조하셨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자신들을 쏙 빼고 신명기를 이용해서 변명했지만 예수님은 모세가 바로 바리새파 사람들의 완악함을 미리 알고 그렇게 예언한 것이라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최고로 열심히 섬긴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에게 완악한 놈들이라고 한 것은 최고의 욕이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신명기 24:1-4절을 조작해서 자신들의 입장을 변호했지만 예수님은 창세기를 인용해서 다시 반박하셨다. 예수께서 창세기를 인용하신 것은 첫째로 신명기의 이러한 기록은 바리새파 사람들 같은 사람들의 완악함을 미리 알고 막기 위해 기록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먼저 기록된 에덴동산에서 결혼에 관한 기록이 신명기의 기록보다 우선이라는 것이다. 둘째로 완악한 유대인들은 남자만 권리가 있다고 하고 여자는 남자들의 재산으로 취급했는데 예수님은 그러한 해석이 하나님의 창조원리에 어긋난다는 것을 지적하신 것이다. 창세기의 기록은 “하나님은 창조 때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다” 라는 것을 인용하셨다. 원어는 남자와 여자라는 말이 아니고 암컷과 수컷이라는 뜻이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인용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 암수를 동등하게 만드셨다는 것이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간음이란 한 남자가 부모가 소유하고 있는 혼인 적령기의 딸을 범하거나 다른 남자가 성적으로 독점하고 있는 여자와 성관계를 한 경우에만 해당된다. 쉽게 말하면 남자가 재산을 빼앗겼을 경우 빼앗아 간 사람을 고소하는 것이 바로 간음죄이다.

여자는 남자를 빼앗겼다고 간음죄로 고소할 권한이 없었고 그런 경우에는 간음죄가 성립되지도 않았다. 당시 유대인들은 여자를 사람취급하지 않고 당시 아프리카와 중동 지방에 살던 대부분의 이방 사람들처럼 재산 취급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창세기에 나오는 하나님의 창조 원리를 인용하신 것은 간음죄는 여자들이 남편과 관계의 독점권을 빼앗긴 경우에도 해당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창조의 원리를 말씀하심으로 당시 유대인 남자들이 여자를 재산취급한 것을 거부하신 것이다.

신명기 24:1-4절은 이혼을 막고 힘없는 여성들이 피해를 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기록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저들은 신명기 10:12절 이후에 나오는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의 명령에서 이웃 사랑의 명령을 어긴 것이다. 당시 사회적 약자인 자녀와 아내들의 권리를 보호할 책임은 무시하고 자신들의 권리만 주장한 것이다.

창세기나 신명기나 다 모세가 기록한 율법서이다. 세상 법에서도 다른 법들이 서로 충돌할 때는 상위법이 우선이다. 창세기가 신명기보다 먼저 기록된 것이고 하나님의 창조원리에 따른 포괄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신명기는 악한 인간들의 악행을 막기위해 기록된 창세기의 하위규칙이다. 더구나 이혼증서를 써 주라는 것은 당시 악한 유대인들이 행하던 관습을 예로 들며 자신이 버린 여자가 재혼했을 경우 다시 빼앗아 오지 말라는 뜻이다. 그런데 저들은 자신들에게 필요한 부분만 왜곡해서 이용하기만 했고 창세기의 하나님 뜻은 완전히 무시했다. 저들은 하나님의 대적들이었다. 하나님 말씀을 자기들에 맞게 바꾸어 놓고는 순종하는척 했기 때문이다.

7-9절은 결혼의 세가지 단계를 담고 있다. 첫번째 단계는 7절에 나온 “부모를 떠나서” 이다. 자녀는 부모를 떠나야 한다. 부모를 떠난다는 말의 문자적인 뜻은 부모를 버려두고 간다는 말이다. 완전히 떠나가야 하는 것이다. 부모도 자녀를 완전히 떠나 보내야 한다. 한국 사람들은 결혼한 자식도 계속 자신의 소유라고 생각하기에 고부간의 갈등도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아버지 어머니를 버리고 완전히 떠나라고 했다. 자식은 결혼하면 남인 것이다. 두번째 “자기 아내와 연합하여” 이다. 연합이란 말은 풀이나 접착제 같은 것으로 붙인다는 말에 "향하여" 라는 말을 합친 말이다. 따라서 이는 두 사람을 접착제로 붙여 완전히 하나로 만든다는 뜻이고 단순히 함께 사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이 연합이 무엇인지 세번째 단계에 나온다. 세번째 단계는 8절에 나오는 “한몸이 된다” 이다. 한번 접착제로 붙인 후에는 완전한 한 몸이고 이제 더이상 둘이 아니라 하나의 육체라는 것이다. 이는 절대로 뗄 수 없다는 뜻이다.

아들을 자기아들이라고 자꾸 주장하며 아들과 며느리에게 서운하다고 하는 분들은 이미 자신을 떠나 며느리와 완전히 하나가 된 아들을 자꾸 잡아 당겨서 찢어 놓으려는 행동이다. 이러한 부부간의 연합에 대해 Whitaker 라는 학자는 “결혼이란 원래 재료를다시 분리해서 원래모습으로 되돌려 놓을 수없는 특성을 가진 찌개와 같다고 했다. 요리할 때 여러가지 재료와 양념들을 넣어 한번 요리하면 그 식재료들과 양념들은 다시 분리해서 원래 모습으로 돌려놓을 수 없다. 그런데 결혼한 아들을 계속 자기 아들이라 생각하는 분은 찌개 끓여놓고는 소금을 도로 건져내려고 휘젓고 고춧가루도 건져내려고 하는 사람과도 같은 것이다.

예수님이 말한 부모를 떠나 두사람이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는 것이 성경적인 결혼의 원리이다. 이는 다시는 되돌릴 수 없다는 뜻이다. 마지막 9절이 이러한 논쟁에 종지부를 찍는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 놓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두사람을 합쳐서 하나의 찌개로 끓여 완성해 놓으셨는데 그걸 다시 원래대로 되돌려 자기 마음에 드는 요리를 하겠다는 것과도 같은 것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따라 끝까지 한 몸으로 살아야 한다.

이처럼 하나님의 창조원리에 따르면 결혼은 나눌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바리새파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을 자기들 입맛에 맞게 고쳐 해석해 놓고는 형식적으로 순종하는 척 했던 것이다. 이혼에 관한 바리새파 사람들의 해석은 자기들 원하는대로 성경을 해석하던 것의 대표적인 예일 뿐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보면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본 뜻을 왜곡하여 해석하던 것을 바로 잡으신 것이다.

이 말씀을 단순히 이혼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해석하면 예수님의 초점을 놓치는 것이다. 예수님 말씀의 초점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말씀을 주신 하나님의 본래의 의도를 알고 그 말씀에 담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믿는 자들도 역시 예수님 당시 바리새파 사람들처럼 하나님 말씀의 참 뜻에 순종하기 보다 하나님 말씀을 자신들의 뜻에 맞게 왜곡하여 믿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고 하나님을 공격하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에 담긴 본래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깨닫고 그대로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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