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9:9-13 예수께서는 당시 유대인들의 가르침을 따라 고난 없는 영광만 바라보던 제자들에게 고난과 멸시를 받을 것이라고 기록된 말씀을 인용하시며 이미 엘리야가 왔는데 사람들이 제멋대로 죽였다고 하셨다.
이전 말씀에서 예수께서는 자기들 생각을 따라 예수님을 책망하며 대적하던 제자들을 데리고 산으로 올라가셨다. 하나님께서 장차 임할 하나님의 영광을 미리 보여주셨고 음성으로 들려주시며 자기 생각을 버리고 십자가의 길을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을 들으라고 하셨다. 이어지는 말씀은 아직도 자신들의 생각을 따라 고난없이 영광만 바라보는 제자들에게 메시야가 고난과 멸시를 받을 것이라고 기록된 말씀을 인용하시며 이미 엘리야가 왔는데 사람들이 제멋대로 해석하고 엘리야를 죽였다고 하시는 내용이다.
9절에서 예수님 일행이 산에서 내려올 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엄하게 명령하셨다. 엄하게 명령하셨다는 말은 본래 어원은 칼로 자르기 위해 가운데로 보낸다는 뜻이다. 창세기 30:40절에서는 양과 염소를 나눈다고 할 때 썼고 레위기에서 신명기까지는 주로 따로 분명하게 구별한다는 뜻으로 썼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모두 다 엄하게 명령하셨다는 뜻으로 썼다. 칼로 딱 자르듯 따로 구별하여 분명하게 명령하셨다는 뜻이다.
그 내용은 인자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것이다. 제자들은 고난없는 영광만 기대했다. 그러나 예수님의 고난은 메시야이신 예수님의 사명의 결정적 요소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난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고난과 부활을 통해서 영광이 비추어지고 선포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난과 부활은 전혀 믿지도 않고 따르지도 않을 사람들에게 제자들이 본 영광만 누설되면 예수님의 고난의 길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의 반응이 10절에 나온다. 먼저 제자들은 이 말씀을 간직했다 했다. 마음에 간직한다는 붙잡아 두었다는 뜻이다. 마가복음 7:3절에서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어” 라는 말에서 나온다. 바리새인들이 장로들의 전통을 마음에 붙잡아 둔 것처럼 세 제자들도 예수님의 이러한 가르침을 마음에 붙잡아두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한가지 조건이 달려 있다. 그 조건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난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고 자기들끼리 서로 토론하며 간직했다는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마음에 간직하기는 했는데 그 뜻이 무엇인지 몰라서 서로 물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물은 것이 11절이다. 제자들의 질문은 “어찌하여 율법학자들은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합니까” 이다. 말라기 4:5절은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라고 기록하고 있다. 크고 두려운 날이란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심판하시는 날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엘리야가 다시오는 날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이스라엘이 회복될 것이라고 믿었다. 당시 율법학자들의 가르침을 기록한 Ben Sira 48:10에 보면 마지막 때에 엘리야가 올 것이라며 끝부분에는 “야곱의 지파들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라는 말이 있다. 당시 율법학자들은 구약의 예언을 자기 중심적으로 해석해서 그렇게 바꾸어 가르친 것이다. 제자들도 당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엘리야가 와서 이스라엘을 회복시킨다는 말만 마음에 담고 있었던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이 12절이다. 원문에 보면 12절은 “그러나” 이라는 말로 시작한다. 이는 반대의견이 시작된다는 것을 뜻한다. 예수님은 엘리야가 먼저와서 모든 것을 회복한다는 말이 맞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자가 와서 많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할 것이라고 기록한 것은 어찌된 일이냐” 라고 반박하셨다. 저들은 엘리야가 와서 회복된다는 기록만 보고 좋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구약성경에 보면 인자가 와서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한다는 예언이 있다. 이것은 생각도 안하고 있다는 것이다.
제자들이나 오늘날 사람들이나 이점에 있어서는 똑같다. 다가올 천국을 기대하며 소망하지만 현재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갈 고난은 생각하지도 않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메시야가 나타날 때 자신들이 누릴 영광만 생각하고 메시야에 대한 고난은 무시하고 있다는 것을 책망하고 계신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 말씀을 자신들이 원하는 부분만 골라 자신들의 원하는 방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우상숭배보다 더 악한 죄이다.
13절은 원문에서 그러나 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메시야가 올 때 누릴 영광만 생각하고 있지만 그러나 이미 엘리야는 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엘리야를 사람들은 함부로 대했다는 것이다. 이는 침례요한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고 결국 죽인 것을 뜻한다. 예수께서는 엘리야와 침례요한을 연결한 것이다. 그러나 또 동시에 침례요한의 고난과 죽음을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과도 연결하고 있다. 예수님도 침례요한처럼 고난받고 죽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는 제자들도 역시 침례 요한처럼 예수님처럼 고난 받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 유대인들이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고난은 생각하지 않고 영광만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제자들은 당시 유대인들처럼 메시야가 고난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은 보지 않고 엘리야가 와서 자신들의 나라를 회복시켜줄 것이라고만 믿고 있었다. 그러나 엘리야가 와서 회복시킬 것은 그 땅이 아니라 그 백성들의 마음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 다니며 메시야이신 예수님과 함께 받을 영광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께서 고난과 부할을 반복해서 가르치셨는데도 귀에 들어오지 않고 오직 당시 랍비들의 가르침만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도 제자들처럼 성경을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들에게 복을 줄 분으로 믿거나 훌륭한 사회운동가로 보며 하나님 말씀을 왜곡시켜 가르치고 간직한다. 그런 사람들은 말라기의 4장의 예언도 1절부터 봐야 한다. 말라기 4:1절은 용광로의 불 같은 날이 올 것인데 그날에는 교만한 자 악한 일을 하는 자는 다 태워버릴 것이라고 했다. 마지막 때 엘리야가 올 때 다 태워버리신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말라기의 예언은 침례요한을 통해 성취된 것이라 하셨다. 그렇다면 침례요한의 말을 듣고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사람은 회복되는 것이다. 그러나 침례요한의 말을 듣지 않고 대적하고 죽이고 나중에는 예수님까지 죽인 저들은 다 태워버리신다는 것이 말라기의 예언이다. 그런데 이것은 보지 않고 회복의 영광만 기대하는 것은 최고 큰 죄악이다. 8:34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야 한다. 그 길만이 영원히 살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