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토용 미리보기 · 교수님 확인 뒤 확정합니다 · NanuriWeb
안정섭 목사Dr Ahn's NT OT

새벽말씀 › 마가복음 › 7:27-30

Dawn Word

마가복음 7:27-30

말씀의 능력의 부스러기를 얻어 딸에게 준 이방여인

잔잔해진 바다 위의 작은 배 · 마가복음 4장

2022. 6. 11. · 안정섭 목사 · 마가복음 7장 강해 설교

마가복음 7:27-30 예수께서 빵을 먼저 자녀에게 먹여야 한다고 하시며 여인의 청을 거절하셨다. 그러자 여인은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는다며 주인의 자녀와 동시에 먹을 수 있다고 답변하여 그 말씀의 능력의 부스러기를 받았다.

이전 말씀에서 예수께서 두로 지역으로 피신을 가시자 한 이방 여인이 듣고 와서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 달라고 간청을 했다. 이어지는 말씀은 예수께서 모욕적인 말로 거절했는데도 화를 내지 않고 대답하는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 치료해 주시는 장면이다.

예수님은 이 여자에게 “자녀들을 먼저 배불리 먹여야 한다” 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말은 “먼저” 라는 말이다. 기회가 되면 자녀 뿐 아니라 개도 먹일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지금은 자녀의 배를 채워줘야 할 시간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이방인들은 나중에 구원 사역에 포함된다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바울도 로마서 1:16절에서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고 한 것도 복음은 유대인 먼저 전해진 후 나중에 유대인들을 통해 이방인에게 전해진다고 한 것이다.

이어서 그 이유를 설명하신다. 자녀의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는 것이다. 비교되는 말은 자녀들과 개들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녀들이란 유대인들 전체를 가리킨다고 해석한다. 개들이란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가리키는 말로 주로 썼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유대인 전체를 자녀들이라고 부르시지 않으셨다. 여기서 자녀들이란 예수님의 제자들이다. 예수님이 두로 지역으로 피난 오신 것도 자녀인 제자들을 조용히 가르치기 위함이었다.

자녀라는 말과 대조되는 말은 개이다. 그러나 특이한 사실은 여기서 마가가 사용한 개라는 말은 다른 곳과는 달리 “작은 개” 라는 뜻이다. 바울은 빌립보서 3:2절에서 “개들을 조심하라” 했는데 이 때 바울이 말한 개는 큰 개이다. 큰 개는 주로 욕으로 썼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개라고 불렀지만 바울은 할례를 주장하는 유대주의자들을 개라고 불렀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나 바울이 사용한 개라는 말은 욕이다.

하지만 오늘 본문의 개들이란 말은 작은 개들이란 뜻이다. Gundry는 이 여인의 딸을 비롯해 이방인들의 자녀들을 작은 개로 부른 것이라고 했다(Gundry, 373). 그렇다면 여인은 작은 개의 어미라는 뜻이 되기에 여전히 심각한 욕이다. 그렇기 때문에 Guelich는 식탁 아래에 있기에 애완견이나 집안에서 키우는 개라고 말한다(Guelich, 386). 그 밖의 다수의 서구 주석가들도 이 개는 마당에서 키우는 개가 아니라 집 안에서 키우는 애완용 개라고 말한다(Brooks, 121; Edwards, 220; France, 298). 예수께서 개를 가족처럼 생각하며 사는 서구학자들은 예수께서 그렇게 심한 욕을 했을 리가 없다는 생각에서 그렇게들 해석한다.

그러나 이것은 시대착오적 해석이다. 왜냐하면 오늘날처럼 일반인들이 개를 애완용으로 키운 것은 19세기 영국에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고대 이집트의 왕들도 개를 키웠다는 증거가 있다. 왕들도 개를 키운 기록들이 남아 있다. 하지만 대부분 고대에는 대부분 사람들이 먹고 사는 것 조차도 힘들었다. 가뭄이 들면 사람들 조차도 굶어죽는 경우가 허다했기에 개를 애완용으로 키울 수 없었다.

기록을 찾아보면 19세기 이전까지는 유럽에서 조차도 개들은 음식쓰레기를 알아서 주워 먹거나 쥐같이 작은 동물들을 잡아 먹었다. 오늘날과 같은 작은 애완견들은 주로 19세기 영국에서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다. 당시 영국은 식민지에서 물자를 가져와 풍요로운 삶을 살았기에 다양한 개의 품종을 개발하고 키우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영국에서 조차도 하층민들은 개를 키울 수 없었다고 한다. 이는 다른 의무를 게을리 했다는 것으로 보고 처벌하는 분위기 였다고 한다. 따라서 이 작은 개는 애완용 개가 아니라 새끼 개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자녀라 부르고 이 여인의 딸을 작은 개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비유의 초점은 모욕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우선순위에 관한 것이다. 지금 예수님은 제자들을 양육하는 것이 최우선이다.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이방여자가 와서 귀신들린 딸을 치료해 달라 하니 지금은 먼저 예수님의 제자들을 가르쳐야 한다고 답변을 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지상사역 내내 제자양육에 모든 시간과 정열을 다 쏟았다.

지금 예수님은 사람들을 피해 이방지역까지 와서 방해 받지 않는 집안에서 몰래 제자들을 양육하고 있는 것이다. 이 일이 어떤 것보다 더 중요하기에 자녀들을 먼저 먹여야 한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 자신이 제자들을 가르치는 사역이 정말 시급하고 소중한 일이라는 것이 이 비유의 초점이다. 하지만 아무리 비유라 해도 여인의 입장에서는 심각한 모욕이다. 보통 사람들 같았으면 화를 내며 그 자리를 떠났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은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예수님과 대화를 계속한다.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수수께끼와도 같은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다. 자녀들의 배를 먼저 채워줘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빼앗아 새끼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하셨다. 이러한 모욕을 당하면 욕만 마음에 남고 진짜 말씀하신 초점은 놓치기 쉽다. 먼저 라는 말을 놓쳤다면 그냥 개들에게는 안 준다는 거절로 알아듣기 쉬운 것이다. 그런데도 이 여인은 예수님의 비유의 초점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아차렸다.

이것은 이 여인이 교육을 많이 받은 대단히 지혜롭고 똑똑한 여인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귀한 가정에서 귀하게 자란 지혜롭고 현명한 여인인 것이 분명한다. 상처 속에서 자란 하층민이었다면 욕만 귀에 들어와 화를 벌컥 냈을 것이고 예수님의 비유의 초점을 파악하지 못했을 것이다.

마가복음 8:15에서 예수께서 누룩을 주의하라 했을 때 제자들은 못 알아듣고 빵이 없어 그러는가 보다 라고 생각했다.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실 때 무리들도 깨닫지 못했다. 요한복음 3:4절에 보면 당시 최고의 지성인이었던 니고데모도 거듭나야 한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복음서에 보면 이처럼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면 무리들 뿐만 아니라 제자들 조차도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 여인은 예수님의 비유가 우선순위에 대한 것이란 것도 분명히 파악했다.

더 놀라운 것은 이 여인도 깜짝 놀랄만한 지혜로운 비유로 답변했다는 사실이다. 이 여인은 예수님을 주님이라 부르며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는다고 답변했다. 앞에서 예수님의 거절은 완전한 거절이 아니라 우선순위가 아니라는 뜻이라고 하신 말씀을 정확히 알고 우선순위가 아니라는 말에 정확히 반박을 한 것이다.

어째서 이 여인이 말한 작은 개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는다는 말이 우선순위에 대한 반론인가? 예수님의 비유는 제자들 먼저 가르치겠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양육하는 일이 가장 소중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여인은 개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는다고 답함으로써 개도 주인과 동시에 먹을 수 있다고 답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5000명을 먹이신 것은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나로 먹인 것을 생각나게 하는 것이라 했다. 성경에서 만나나 빵은 주로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하는 말이다. 마태복음 4: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라고 하신 것을 보아도 분명히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생명의 빵으로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으니 지금은 방해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제자들 가르치는 것을 그만두고 와서 치료해 달라는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안된다고 거절하신 것이다. 그런데 이 여인은 제자들 가르치는 것 그만두고 와서 고쳐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 가르치는 일과 자신의 딸을 고치는 일을 동시에 할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예수님이 말한 빵이 예수님의 말씀이라면 이 여인이 말하는 빵 부스러기도 예수님의 말씀이다. 이 두 사람은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선문선답을 하는 것과도 같았을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가르치시면서 한 말씀만 해주시면 될거라는 것이다. 귀신에게 나가라고 명령만 한마디 하시면 귀신은 떠나가고 자신의 딸은 나을 것이라고 믿은 것이다. 귀신을 쫓는 말씀 한마디가 바로 이 여인이 말하는 빵 부스러기 이다. 자녀들인 제자들이 예수님의 능력의 말씀을 먹고 있는 중에 자신의 딸도 그 능력의 말씀 한 조각으로 치료되게 해 달라고 간구한 것이다.

마태복음 8:8에서 이방인인 백부장도 말씀만으로 자기 종을 치료하실 수 있다고 믿었다. 이 여인도 백부장과 마찬가지로 예수께서 직접 가지 않으시고 말씀만 하셔도 자기 딸은 치료될 수 있다고 굳게 믿은 것이다. 백부장의 하인이 말씀만으로도 치료받은 것처럼 이 여인의 딸도 예수님의 말씀만으로 치료받을 것을 굳게 믿은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자녀들을 가르치면서 그 말씀의 능력으로 한마디만 하시면 그 능력의 부스러기 한 조각을 자신의 딸에게 줄 수 있다는 것이다. 비유로 말씀하신 것에 비유로 정확히 대답한 여인은 정말 최고로 지혜로운 여인이다.

이런 믿음을 보시고 29절에서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말씀하셨다. 주목해야 할 말은 “네가 그렇게 말하니” 라는 말이다. 이 여인이 예수님께서 말씀만으로도 자기 딸을 치료하실 수 있다고 분명히 말했기 때문이라는 뜻이다. 이 여인 믿음 때문에 그 딸을 치료해 주신다는 뜻이다. 드디어 이 여인은 예수님의 능력의 말씀의 작은 부스러기 한 조각을 얻었다. 예수님은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다고 선포하셨기 때문이다.

이 여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아이가 침대에 누워있는 것을 발견했다. 침대에 누워 있다는 것은 귀신이 나갔다는 증거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 여인의 딸은 미쳐 날뛰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가는 귀신은 이미 나가고 없었다고 다시 한번 확인하여 말하고 있다.

오늘날도 예수님의 생명의 빵으로 훈련 받아 제자가 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말씀을 제대로 배운 제자들도 예수님을 전적으로 믿지 못했다. 오늘 말씀에 나온 여인처럼 말씀을 잘 배우지 못했어도 예수님을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면 그 말씀의 부스러기 한 조각을 주셔서 그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게 하신다. 우리도 예수님의 생명의 말씀 한 조각이라도 우리 자녀들에게 떨어지길 간구하도록 해야 한다.

우리 자녀들이 세상에서 출세하는 것만 바라고 그것을 위해 기도하면서 우리만 제자훈련을 받고 생명의 빵을 먹는다고 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위선이다. 우리 자녀들이 세상의 악한 영에게 사로잡히는 것을 박수치며 좋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 자녀를 사랑한다면 우리만 생명의 빵을 먹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먹지 못하더라도 우리 자녀들에게 생명의 빵 한조각이라도 던져달라고 기도할 것이다.

마가복음 새벽말씀 전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