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6:53-56 게네사렛 사람들은 예수께서 배에서 내리시는 것을 보고 온 지방을 달려다니며 알려서 병자들을 침상채로 예수께 데리고 와서 옷술에라도 손을 대게 해 달라고 했고 손을 댄 사람들은 다 구원을 받았다.
이전 말씀에서는 예수께서 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멈추었는데도 마음에 완악한 껍질이 덮여있던 제자들은 놀라기만 할 뿐 예수님이 누구신지 깨닫지 못했다. 이어지는 말씀은 예수님과 아무 관계도 없는 게네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정신없이 뛰어 다니는 믿지 못하는 제자들의 모습과 대조된다.
53절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은 갈릴리 바다를 건너서 게네사렛 땅에 도착했고 거기서 배를 정박했다. 원래 벳세다 방향으로 가려고 했는데 바람 때문에 게네사렛까지 온 것이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에서 내릴 때 사람들이 즉시 예수님을 알아 보았다. “내리니” 라는 말은 NASB 처럼 “내릴 때”나 NIV처럼 “내리자마자”로 번역해야 옳다. 예수님 일행이 배에서 내리자 마자 즉시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았다는 것이다.
33절에서도 사람들이 알아보았다고 했다. 그러나 33절에서 사람들은 그들을 알아보았다고 했기에 예수님 보다는 제자들을 알아본 것이다. 그러나 게네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왜냐하면 게네사렛 사람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직접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서 제자들이 전한 말씀과 행한 능력의 근원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33절과는 달리 55절에서는 게네사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았다고 마가는 기록한 것이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에 있어서는 예수님을 알아본 게네사렛 사람들과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 사이에는 정말 큰 차이가 있다. 예수님에 대해 배우고 알 기회는 제자들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았다. 무리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비유로 가르치시고 제자들에게는 항상 따로 비밀리에 가르치셨다. 수많은 기적들을 통해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드러내시는 것을 모두 가까이에서 목격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 오늘 말씀 바로 앞에 나온 말씀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배에서 내리자 마자 알아본 게네사렛 사람들은 온 지방을 달려 다니며 병든 자들을 침상채로 메고 예수가 계시다는 곳으로 나아왔다. 33절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달렸다고 했다. 33절에서는 모두 함께 예수님과 제자들이 가는 곳을 향해 떼거리로 우르르 몰려 달려간 것이다. 그러나 55절에서는 각자가 사방으로 흩어져서 게네사렛 지방의 이곳 저곳을 두루 달리고 있는 것이다. 이들이 게네사렛 지방 이곳 저곳을 두루 달리는 목적은 “예수께서 오셨다”는 소식을 알리기 위한 것이다.
사람들은 그 소식을 듣고 환자를 침상에 눕혀서 예수님이 계시다는 곳을 가보니 이미 떠나셨을 것이다. 그래서 다시 병자를 침상에 눕힌 채 이리저리 예수님이 계신 곳을 두루 찾아 다닌 것이다. 물론 게네사렛 사람들도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분명히 이해하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정말 능력이 많은 분이고 예수님께로만 가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사실 만큼은 분명히 믿고 있었다.
그래서 저들은 예수님께 직접 배운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도 저들은 예수님을 절대적으로 믿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자마자 사방으로 흩어져서 게네사렛 지방을 샅샅이 누비고 달려 다니면서 “그분이 오셨다” 라고 알린 것이다. 하지만 마가복음을 처음 듣던 초대교회 성도들은 마가가 무엇을 증언하고 있는지 안다. 마가와 마가의 성도들은 “그분이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오신 것이다!” 라고 속으로 외쳤을 것이다. 게네사렛 사람들은 제자들보다 예수님을 알 기회는 훨씬 적었다. 하지만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제자들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컸다. 예수님에 대한 분명한 믿음이 있기에 게네사렛 사람들은 모든 지역을 정신없이 두루 뛰어다니고 있는 것이다.
54-55절에서는 시간이 강조되었다면 56절은 장소가 강조되었다. 56절에서는 예수께서 어디든 들어가시는 곳마다 라고 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들어가시는 장소는 마을이든 도시든 농촌이든 이라 했다. 마을은 성벽이 건축되지 않은 작은 도시를 뜻한다. 도시란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큰 도시를 말한다. 농촌이란 사람들이 아주 적게 사는 들판이란 뜻이다. 이 세가지 장소는 그 지역의 모든 장소를 말한다. 예수님께서 어느 곳을 가시든지 이 사람들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병자를 침상 채로 들고 나왔다는 것이다.
앞의 경우는 이미 예수님이 떠난 장소로 갔다가 예수님께서 이동하신 장소로 뒤따라 가는 모습이다. 그러나 이 경우는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미리 알고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다. 예수께서 어디를 가든지 사람들이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장터에 병자들을 계속 눕혀 놓고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장터는 어느 지역 이든지 중심지에 있었고 반드시 거치도록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게네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이 어느 곳으로 들어가신다는 정보를 미리 알고 병자들을 장터로 운반해 놓고 대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56절 뒷부분에 보면 이처럼 병자들을 예수님 계신 곳으로 운반해 놓은 사람들은 예수님께 간청을 했다. 간청을 했다는 말은 계속해서 쉬지 않고 간절히 애원했다는 말이다. 간절히 애원한 내용은 오셔서 치료해 달라는 말이 아니다. 지나가실 때 병자들이 예수님의 옷술만에라도 손을 대도록 해 달라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유대인들의 옷술이 민수가 15:38-39절과 22:12절에 나오는 것으로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을 뜻한다고 해석한다. 하지만 이렇게 해석하면 문맥을 통해 마가가 강조하는 핵심을 놓치는 것이다. 옷술이란 옷의 가장 끝부분이다. 5:27절에서 혈루증을 앓는 여인은 단순히 예수님의 옷을 만졌다 했다. 그런데 게네사렛 사람들은 옷도 아니고 옷에 달려있는 옷술을 살짝 스치기만 해도 낳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강조점은 혈루증 여인보다 더 살짝만 스쳐도 나울 것이라 믿었다는 것에 있다.
이들의 이런 믿음이 어디서 나왔을까? 이는 분명히 5:27절의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지고도 낳았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기 때문일 것이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치료 받기를 원했기 때문에 어쩌면 자신들이 데리고 온 사랑하는 사람들이 치료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염려를 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그저 지나가면서 옷에 달린 옷술에라도 손을 대게 해 달라는 것이다. 그러면 치료 받을 것이라는 믿음이다.
마가는 이렇게 해서 옷술이라도 만진 사람들은 모두 치료를 받았다고 했다. 치료를 받았다는 말은 원래 구원을 받았다는 뜻이다. 원어에서 이 말은 계속해서 구원을 받고 있었다는 뜻이다. 많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옷술이라도 만져서 구원을 받고 있는 장면을 나타내는 한편의 동영상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계속해서 구원받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들과는 달리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옆에 계셨어도 걱정과 원망만 했던 사람들이다. 제자들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이처럼 간청한 적 없다. 다른 사람들 뿐만 아니라 자신들을 위해서도 이처럼 간절하게 간청한 적이 없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이처럼 간절히 간청하는 게네사렛 사람들 이야기를 전하는 것은 게네사렛 사람들과 같은 간절함이 없는 제자들을 고발하기 위해서이다.
제자들과 게네사렛 사람들을 비교해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기적을 체험한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다. 말씀을 많이 배운다고 생기는 것도 아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직접 배우고 기적을 가까이에서 체험했고 자신들이 행했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믿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탐심이 제자들의 마음을 가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들은 예수님이 왕이 되면 자신들은 인생 역전이라고 생각하고 따라다녔다. 반대로 게네사렛 제자들처럼 예수님께 직접 배우고 기적을 체험하지 못했다. 대부분 예수님에 대해 소문으로만 들었다. 하지만 저들은 예수님이 아니면 자신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구할 수 없었기에 예수님만 전적으로 믿은 것이다.
52절에서 마가는 그 차이가 제자들의 마음을 덮고 있던 딱딱한 각질 때문이라고 제자들을 고발했다. 제자들은 다른 유대인들처럼 메시야가 오시면 자신들을 구원하고 왕이 되어 다윗시대처럼 강력한 나라를 만들어 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한 메시야관은 유대인들의 탐심이라는 각질 때문에 생긴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왕이 되면 자신들은 높은 자리에 앉을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이러한 탐심에 대해 바울은 골로새서 3:5절에서 탐심은 우상숭배라고 했다.
우리도 탐심을 버리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셨어도 제자들처럼 알지 못하게 된다. 탐심이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마음에 가득한 상태를 말한다. 자식들과 재산과 사업등에 마음이 빼앗겨 항상 바쁘고 분주해서 말씀에 귀를 기울일 시간조차 없는 것이다. 이러한 딱딱한 껍질을 벗겨버리고 게네사렛 사람들처럼 사랑하는 사람들을 구원시키려는 마음으로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주님께서 도와주지 않으면 안된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을 찾아 뒤따라 가야 한다. 또 주님께서 오실 곳으로 미리 가서 기다려야 한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데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