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2:18-20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경건함을 보여주기 위한 형식적인 금식을 반대하시며 혼인 잔치에서 신랑을 빼앗기는 비유로 자신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제자들은 진짜 슬픔으로 인해 금식하게 될 것이라 하셨다.
이전 말씀에서는 예수께서 레위의 집에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는 것을 보고 율법학자들이 비난을 했지만 예수께서는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대답하셨다. 이어지는 말씀은 금식에 관한 논쟁에 대해 예수께서 혼인잔치의 비유로 대답하시는 내용이다.
18절에서는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금식하고 있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을 등장한다. 요한의 제자들이란 요한에게 침례를 받고 요단강 가의 광야에서 요한과 함께 거하며 배우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요한이 헤롯에게 잡혀 죽자 이들은 흩어졌고 갈릴리가 고향이었던 제자들은 갈릴리로 돌아와 다시 생업에 종사했을 것이다. 하지만 요한이 금욕생활을 하던 것을 보고 배운 제자들은 스승이 없어도 계속 금식하며 절제된 삶을 살았을 것이다. 이들은 바리새파 사람들과는 다른 사람들이지만 금식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기에 바리새파 사람들은 자신들과 요한의 제자들의 금식을 이용해서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18절에서 예수께 와서 질문사람들은 16-17절과 연결해보면 이들은 바리새파 율법학자들일 것이다. 원어의 18절에서 강조되는 것은 "그들이 오고있다" "그들이 말하고 있다" 이다. 이렇게 과거의 사실을 이처럼 현재 벌어지는 일로 말하는 것은 극적인 효과를 나타내며 그들이 권위를 가진 두려운 존재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바리새파 율법학자들은 율법학자가 아닌 일반적인 바리새파 사람들도 금식하고 심지어는 요한의 제자들까지도 금식하는데 왜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을 하지 않느냐고 따지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저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요한의 제자들을 따르지 않는다고 따진 것이 아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공격하기 위해 이용한 것뿐이고 사실은 자신들이 만든 율법과 경건을 따르지 않는다고 따진 것이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온 이스라엘이 율법을 철저히 지켜 거룩한 공동체로 하나님께 인정 받을 때 메시야가 온다고 생각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자신들과 같은 사람들이 가득하게 되면 메시야가 임하는데 아직도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는 더러운 인간들이 이스라엘 가운데 너무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을 모두 골라내며 메시야를 기다렸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오셔서 자신들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죄인들을 제자로 삼아 다시 거룩한 이스라엘을 더럽히고 있으니 메시야가 아니라고 단정한 것이다.
원래 유대교에서는 일년에 한차례 속죄일에 금식하도록 되어있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매주 두 차례씩 월요일과 목요일에 금식을 했던 것이다. 이는 자신들의 경건을 자랑하기 위해 그렇게 한 것이다. 금식과 기도와 구제는 이들의 경건을 나타내는 중요한 증거였다. 유대인들은 이런 바리새인들을 최고로 경건한 사람들로 그 권위를 인정하고 존경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부정하다며 "너, 나가!" 라고 한 사람들을 예수께서 "다시 들어와!" 라고 한 것과도 같은 것이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예수께서 자신들이 정한 율법과 경건을 따르지 않고 오히려 자신들이 쫓아낸 사람들을 회복시켜주자 자존심이 상한 것이다. 저들은 예수께서 자신들의 권위 아래에서 자신들이 정한 율법의 테두리 안에 사역하시길 기대했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자신들의 권위를 무시하시자 자신들의 권위를 되찾기 위해 싸움을 걸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도전에 대해 예수님은 세개의 비유로 대답하셨다. 그 중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은 혼인잔치의 비유이다. 19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대답은 원문에서는 금식할 수 없지 않느냐는 질문으로 시작해서 금식할 수 없다는 말로 끝난다. 지금은 신랑과 함께 혼인잔치를 벌이고 있는 때이기 때문에 절대로 금식할 때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19절의 초점이 잔치가 아니고 신랑이다. 그런데 이사야에서는 여호와가 이스라엘의 신랑이라고 했기에 이러한 비유는 잘못하면 신성모독으로 돌에 맞을 대담한 것이다. 이 비유는 예수께서 자신이 바로 유대인들이 기다리던 메시야이시며 또한 자신이 하나님이시라는 뜻인 것이다. 이제 너희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신랑되시는 메시야 즉 하나님이 너희에게 오셨기에 잔치할 때이지 금식할 때가 아니라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생각하는 천국잔치는 자신들과 같이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사람들이 가득하게 될 때에 메시야가 오셔서 잔치를 베푸는 것이다. 그 때 메시야가 베풀 잔치 자리의 상석에 앉을 귀한 손님은 자신들과 같은 거룩한 의인들이라 생각했다. 또 메시야가 오시면 자신들이 베푸는 잔치 자리에 앉으시며 자신들을 칭찬해 주실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저들의 생각과는 반대로 죄인들이 베푸는 잔치 자리에 앉으신 것이다.
예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하나님은 저들의 생각과는 달리 죄인들을 받아들이시고 용서하시고 축복하신다는 것을 알리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죄인들이 가득함에도 불구하고 메시야를 이 땅에 보내신 것이다. 그분은 이 땅에 오셔서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축복을 베푸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분이 지금 오셨다는 것이다. 만약 바리새파 사람들이 생각하는 의인들이 가득한 때에 메시야가 온다면 그 메시야는 영원히 오실 수 없다. 세상에는 죄인들만 가득하기 때문이다. 의인은 단 한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잔치의 때는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아니다. 19절 뒷부분에 보면 오직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만 지속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금식을 반대하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잔치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와 함께 있는 때를 나타내는 말은 20절을 감싸고 있는 단어는 날(day)이라는 말이다. "신랑을 빼앗길 날"이란 말에서 날은 복수인 "날들"이다. 반면에 "그 날"에서 날은 단수인 "날"이다.
신랑을 빼앗길 날들은 여러 날들인데 그 중에 단수인 그 날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논란이 있다. 그날이 부활절 전 고난일에 금식하는 것이나 매주 금요일 금식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디다케 8.1에 따르면 2세기 이후 교회는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에 금식을 했기에 이러한 해석은 어려움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날은 매년 기념하는 고난일이나 예수께서 돌아가신 매주 금요일 금식할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날을 의미한다고 봐야 한다. 문맥으로 보아도 신랑되신 예수님을 빼앗기고 살 그 날들이 온다는 것이다. 그 날들 중에 예수께서는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그날이 되면 자신의 제자들도 금식할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본래 유대인들의 풍습으로 볼 때 결혼식에서 떠나는 사람은 신랑이 아니고 하객들이다. 그런데 신랑이 없어지게 된다니 이는 깜짝 놀랄만한 상황을 나타내는 것이다. 오늘날은 결혼식후 신랑신부는 신혼여행을 떠나고 하객들끼리 잔치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겐 그런 일은 없다. 그런 일이 있다면 오직 신랑이 결혼식장에서 끌려나가 죽임을 당하는 경우 뿐이다.
그러므로 신랑을 빼앗긴다는 것은 신랑되신 메시야가 죽임을 당한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잡혀 죽으실 것을 이 비유를 통해 예언하신 것이다.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빼앗긴 그 날에는 예수님의 제자들도 금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처럼 경건을 자랑하기 위한 위장된 슬픔이 아니라 진짜 슬픔을 위해 금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본래 구약에서 금식은 속죄일에 하도록 되어있었지만 바리새파 사람들은 자신들의 경건을 나타내기 위해 일주일에 두 번 금식했다. 초대교회도 요일만 바꾸어 일주일에 두 번 금식했다는 것을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 오늘 말씀에서 반대하신 것은 자신들의 경건을 나타내는 그러한 형식적인 금식을 반대한 것이다. 오늘날 믿는 자들이 고난주간에 무조건 금식을 하거나 매주 금요일 금식하는 것도 잘못하면 자신들의 경건을 나타내는 형식적인 경건으로 빠지기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