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21-22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의 삶의 중심이 되는 날인 안식일에 갈릴리의 중심인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셨고 유대인들의 삶의 중심이 되는 장소였던 회당으로 들어가셔서 가르치셨는데 모두가 그 가르침의 권위에 기절할만큼 놀랐다.
이전 말씀은 예수께서 야고보와 요한을 제자로 부르시자 부자였던 야고보와 요한은 아버지와 일꾼들과 배를 모두 버리고 예수를 따라간 내용이었다. 이어지는 내용은 제자 넷을 부르신 예수께서 안식일에 가버나움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신 내용이다.
21절은 “그들은 가버나움으로 들어갔다” 라는 말로 시작한다. 그들은 예수님과 네명의 제자들을 말한다. 가버나움은 국제적인 규모의 큰 도시는 아니었지만 갈릴리 호수 주변의 도시 중에서 중심되는 도시였다. 4세기 건물로 추정되는 큰 규모의 회당 건물이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서도 짐작할 수 있다.
1:14절에는 예수께서 요한이 잡힌 뒤 갈릴리로 들어가셨다고 했다. 이제 21절에서는 갈릴리 중에서도 그 중심지역인 가버나움에 들어가셨다고 했다. 가버나움의 중심은 회당이었다. 회당은 유대인들의 삶의 중심 중의 중심이었다. 그것도 한 주간의 중심인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서 가르치신 것이다. 한 주간의 중심이 되는 때인 안식일에 유대인들의 삶의 중심인 회당에 들어가서 가르치신 것이다.
들어가셨다는 말은 또 현재형으로 기록되어 있다. 과거를 현재형으로 표현한 것은 듣는 사람들에게 예수께서 회당 안으로 들어가고 계시는 모습을 실감나게 표현하려는 것이다. 게다가 즉시 들어가 가르치셨다고 했기에 두리번 거리거나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즉시 회당 안으로 들어가 가르치시는 장면이다. 예수께서는 선교 대상지역을 이방지역과 연결된 갈릴리로 선택하신 후 이방지역과 사방으로 연결되는 중심도시인 가버나움으로 들어가고 또 들어가서 유대인들의 중심부인 회당으로 즉시 들어가 가르치시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께서 시작한 선교전략이다.
21절 앞부분에서는 그들이 가버나움에 들어갔다고 했다. 예수님과 네 명의 제자들이 가버나움으로 들어갔다는 뜻이다. 그런데 뒷부분에서는 예수께서 즉시 들어가 가르치신 것으로 되어 있다. 가버나움에 네 명의 제자들과 함께 들어갔고 회당에도 함께 들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가르치신 것은 예수님 혼자이기에 예수님 혼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신 것처럼 기록한 것이다. 나머지 제자들은 청중석에 앉아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있었을 것이다. 가르친다는 말은 과거 일정기간동안 계속하고 있었다는 뜻이기 때문에 예수께서 한동안 계속 가르치고 계셨다는 뜻이다.
이렇게 예수께서 계속 가르치고 계실 때 22절에서는 사람들이 그의 가르침에 놀랐다 했다. 놀랐다는 말은 얻어 맞고 바깥으로 나가떨어졌다는 뜻이다. 비유적으로 쓰일 때는 갑자기 한방 맞고 나가 떨어진 것처럼 놀랐다는 뜻이다. 그것도 과거에 계속된 동작을 나타내는 말이기에 예수님의 가르침 내내 예수님의 강펀치를 얻어 맞고 계속해서 문 밖으로 날아가는 만화와도 같은 장면이다. 가르침 내내 계속해서 예수님의 놀라운 가르침에 얻어 맞고 기절할 만큼 놀라고 있었다는 것이다.
마태는 마태복음 5-7장 사이에 예수님의 가르침을 길게 다루고 있다. 그것이 유명한 산상수훈이다. 아마도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의 본래의 뜻을 가르치셨을 것이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 나온 내용을 한 번만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여러 곳에서 여러 차례 가르치셨을 것이다. 그래서 마태는 산에서 가르친 것으로 기록하고 있고 누가는 평지에서 가르치신 것으로 기록한 것이다. 그러나 마가는 가르침의 내용은 모두 생략한 채 예수님의 권세있는 가르침에 사람들이 놀라고 또 놀랐다는 점만 강조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란 이유가 이어서 설명이 된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있는 가르침이었기 때문이다. 22절 후반부에도 단순히 가르치셨다가 아니라 계속해서 가르치고 계셨다 라는 뜻이다. 그것도 계속해서 깜짝 놀랄만큼 권위있게 가르치고 계셨다는 것이다. 산상수훈이 끝나는 부분인 마태복음 7:28절에는서도 마가와 같이 그 가르침의 권세에 놀랐다고 기록하고 있다.
21절 뒷부분부터 22절에서 문법적으로 같은 형태로 된 세개의 동사에 주목해야 한다. 첫째는 예수님께서 회당 안에서 계속해서 가르치고 계셨다는 것이다. 두번째로는 무리들은 계속해서 예수님의 가르침에 얻어맞고 나가떨어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세번째는 놀란 이유인데 놀라운 권세있는 가르침이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회당 안에 있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놀라운 가르침 한가지에 놀란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치시는 동안 내내 놀라고 또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율법학자들은 회당에서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는 자들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가르침은 율법학자들과 같지 않고 권세있는 자 같이 가르쳤다고 했다. 요한복음 첫 부분에 따르면 예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말씀이시다. 예수님은 창조주이시고 말씀을 그 백성들에게 주신 분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바로 그 권위로 가르치신 것이다. 원저자의 직강이기에 어떤 유명한 율법학자들과는 완전히 달랐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말씀의 강펀치에 모두가 그 가르침 내내 계속 얻어 맞고 날아가버린 것이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의 선교전략을 볼 수 있다. 예수께서는 비옥한 토지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고 있고 이방지역과 접해 있던 갈릴리를 사역지로 택하셨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심이 되는 도시의 회당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하신 것이다. 이러한 선교전략은 바울의 선교전략과도 같다. 바울도 한 지역에 들어가면 그 중심도시의 회당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했다. 오늘날 우리도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에서 복음을 전하여 주변 지역으로 퍼지게 해야 한다.
예수께서 제자 넷을 부르신 것은 회당에 들어가서 가르치시기 위함이었다. 그렇다면 제자 넷을 데리고 가셔서 가르치신 것은 회당에 있는 사람들을 가르치기 위함이 아니라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함이다. 예수님의 사역의 초점은 항상 제자들에게 있었다. 장차 제자들도 예수님의 놀라운 가르침을 가지고 유대인들의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게 하시려는 것이다.
세상 철학과 세상의 저명한 사람들의 지식들로 하나님 말씀을 전하면 안된다. 그렇게 전하면 유식해 보이기는 하겠지만 그 말씀의 권위에 사람들이 나가 떨어지지는 않는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가지고 예수님처럼 전해야 한다. 하나님 말씀의 참 뜻을 비유를 통해 쉽게 가르치시면서도 그 말씀의 권위에 놀라게 해야 한다. 우리의 능력으로 놀라게 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말씀 자체가 놀라운 권위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그 말씀을 그대로 전하면 된다. 그러면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사람들이 그 말씀을 듣고 믿게 하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