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3:23-24 율법에 규정되지도 않은 향신료의 십일조까지 꼼꼼히 드리는 척하면서 하나님 말씀의 중요한 요소들은 버리는 것은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이전 말씀에서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속이기 위해 거짓된 맹세를 가르치며 거짓된 맹세로 사람들과 하나님을 속이는 자들에게는 저주가 있다고 하셨다. 이어지는 말씀은 율법의 더 중요한 요소들은 버리고 형식적인 것만 강조한다고 책망하시는 내용이다.
23절도 역시 거룩한 척 연극하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저주가 있다고 선포하신다. 이들이 저주받을 연극배우들인 이유는 율법을 잘 지키는 척 흉내만 냈다는 것이다.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면서" 라는 말에 나오는 세가지 정의와 자비와 신의 같은 율법의 더 중요한 요소는 버렸다는 것이다. 이 세가지는 곡식이나 과일처럼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향신료로 쓰이는 식물들이다. 더구나 레위기 27:30절을 보면 십일조는 "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과실"을 드리는 것으로 되어있다. 그런데 중요하지도 않고 아주 소량 재배하는 향신료까지 정확하게 십일조를 드린다는 것이다.
중요하지 않은 향신료 세가지의 십일조까지도 드리는 것과 대조가 되는 것은 이들이 버리는 율법의 중요한 것 세가지이다. 이들이 버리는 율법의 중요한 것들은 첫째 정의란 마태복음에서 주로 "심판"이라는 말로 번역된 말이다. 율법에 따라 공정하게 재판을 하는 것이다. 둘째 자비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다. 셋째 신의란 믿음이란 뜻이다.
대부분의 영어 번역들은 "faithfulness"로 번역했다. 그러나 마태는 믿음이라는 단어를 6번 사용했는데 나머지 다섯은 모두 다 "믿음"이라는 뜻으로 쓰였기에 이곳에서만 "신실함"이라는 뜻으로 번역할 이유가 없다. 강한 자들도 공정하게 재판을 해야하고 반대로 사회적 약자들은 불쌍히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겸손히 하나님만 믿고 의지해야 하는 것이다.
미가 6:8절에도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라는 말이 나온다. 표현은 조금 다르지만 공정한 재판을 한다는 말은 오늘 말씀의 정의라는 말과 같고 인자를 사랑한다는 말은 오늘 말씀의 자비라는 말에 사랑한다는 말을 덧붙인 것이다. 그렇다면 마지막 단어인 "믿음"이란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뜻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세가지는 율법 중에 가장 중요한 핵심들이다. 이렇게 중요한 것들은 다 버리고 중요하지 않고 율법에 나와있지도 않은 향신료들까지도 정확히 드린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렇게 십일조를 정확히 드리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하지 않으신다.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잘못된 점은 사람들 눈에 보이는 십일조는 최고로 정확하게 드리면서도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정의를 행하며 자비를 사랑하고 겸손히 하나님만 믿고 따라가는 것은 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저들을 저주받을 연극배우들이라고 한 것이다.
24절은 또 다시 "소경된 인도자여"라고 부르시며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킨다고 하셨다. 하루살이와 낙타는 둘 다 부정하여 먹을 수 없는 것들이다. 물이나 포도주를 마실 때 그 속에 하루살이가 빠져 있으면 꼼곰하게 골라내서 율법을 지키는 척하지만 반대로 낙타가 들어있으면 모른척 하고 그냥 마신다는 것이다. 앞에서 나온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는 것을 하루살이를 꼼꼼하게 골라내는 그림으로 비유한 것이다. 또 정의와 자비와 믿음을 버리는 것은 낙타를 골라내지 않고 그냥 삼켜버리는 그림으로 비유한 것이다.
겉으로 보이는 경건함은 꼼꼼하게 지키면서 하나님 말씀에 담긴 이웃 사랑과 하나님 사랑은 무시하고 실천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역시 저주를 받을 연극배우들이다. 우리도 힘있는 자들은 공정하게 판단하고 힘없는 자들은 불쌍히 여기고 도와주며 언제나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면서 십일조를 드리는 것과 같은 겉으로 드러난 경건들도 함께 잘 지켜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저주 받을 연극배우가 되지 않고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