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2:1-14 왕이신 하나님의 초청을 거부한 자들은 모두 진멸될 것이고 왕의 예복을 입기를 거절한 자들도 내어쫓길 것이며 오직 요한이 선포한 회개의 침례라는 예복을 입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 만이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할 것이다.
이전 말씀에서 예수께서는 유대교 지도자들이 버린 돌이 하나님의 집의 머릿돌이 되었다고 하시며 그 아들에 걸려 넘어지는 자들은 그 아들 위에 부딪혀 박살이 날 것이고 그 들이 그들 위에 떨어질 때는 완전히 가루가 되어 날라갈 것이라고 하셨다. 멸망할 자들의 특징은 하나님 보다 사람들을 두려워하는 자들이라고 하셨다. 이어지는 말씀은 오늘 말씀 유대교 지도자들의 질문에 대답하신 것이다. 이는 대제사장들과 백성들의 장로들에게 두 아들의 비유와 포도원 소작농의 비유에 이어 세번째 비유를 말씀하신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유대인 지도자들에게서 빼앗아 이방인들에게 주신다는 것이다.
1-6절에는 두번의 초청과 두번의 거절이 나온다. 여기서 혼인잔치란 주님 다시 오셔서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를 뜻하는 것이다. 당시 유대지역에서 일반 가정의 혼인잔치는 일주일 동안 음식이 제공되는 축제였다. 왕실의 결혼이라면 혼인잔치는 보통 몇 주씩 계속 되었다. 첫번째 초청이 3절에 나온다. 왕의 비서관들이 잔치에 초청을 했는데 처음 초청된 사람들은 안 간다고 버텼다는 것이다.
왕실의 혼인잔치에 초대되는 것은 특별한 사람들만 초대를 받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왕실의 결혼식에 참석하는 것은 가문의 영광이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 초대는 절대로 거절하면 안되고 반드시 참석해야 하는 의무였다. 이는 왕보다 자신의 세력이 더 세기 때문에 왕을 몰아 낼 자신이 있을 때만 거절할 수 있는 것이었고 왕실에 대한 모독죄는 죽음 뿐이다. 따라서 왕의 초청을 거절한 저들은 왕의 군대와 맞서 싸우든지 아니면 모두 죽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4절을 보면 기절초풍할 만한 일이 벌어진다. 왕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한 반역자들을 죽이라고 명하지 않고 다시 오라고 초청하는 것은 실제 왕들의 경우에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반역자들을 모두 멸하지 않고 다시 초청한다는 것은 계속해서 선지자를 보내 돌아오라고 하신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나타낸다. 이러한 왕의 초청은 겸손하다 못해 비굴해 보이기까지 하는 것이다. 하지만 5절을 보면 초대받은 사람들은 왕의 두번째 초청도 거절한다.
이들의 거절은 두 부류로 나뉜다. 하나는 그냥 무시하고 가버린 것이다. 초청을 무시하고 자기 밭으로 가고 장사하러 갔다는 것은 오직 돈이 우상인 사람들이다. 자신들의 돈이 왕보다 더 강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6절에 나오는 두번째 부류는 왕의 종들 모욕하고 죽였다. 이는 결국 왕을 죽인 것과 똑 같은 반역의 의사를 표현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7절에서는 왕이 자기 군대를 보내서 그 반란군들을 진압하고 그 도시를 불살라버린 것이다. 살인자들의 도시란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의 도시인 예루살렘을 가리킨다. 저들은 하나님께서 보낸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않고 세상 물질을 따라가거나 아니면 선지자들을 죽여 하나님과 싸우겠다는 의지를 표현했기에 모두 멸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 비유는 실제로 AD 66-70 유대로마 전쟁을 통해 1차적으로 성취되었다. 유대인들이 로마군대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자 AD 66년 네로황제는 베스파시안에게 제10여단Fretensis 와 제5여단Macedonica 를 맡겨 팔레스틴으로 파견했다. 이집트에 주둔해 있던 그 아들 Titus가 이끌던 15여단 Apollinaris도 합류했다. 본인이 여단으로 번역한 말은 Legion 인데 약 4200명의 보명과 300명의 기병으로 구성되어 있던 로마군대의 단위였다. 갈릴리를 먼저 점령한 베스파시안은 네로황제가 죽고나서 로마정부가 혼란에 빠지자 아들에게 반란 진압을 맡기고 로마로 돌아가 황제가 되었다. 그 아들 Titus가 이끌던 로마 군대에 의해 예루살렘성전은 완전히 파괴되고 불태워졌다. 약 1,100,000 유대인이 이 전쟁에서 죽었다. 하지만 이 비유는 또 앞으로 우리 주님 다시 오실 때 완전히 성취될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8절에 보면 반란을 진압한 왕은 “혼인잔치는 준비가 되었는데 초대받은 사람들은 자격이 없다”라고 한탄을 한다. 그리고 나서 네거리로 나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청해 오라고 다시 명령한다. 이들은 여행하던 이방인들과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 쫓겨난 이스라엘의 하층민들일 수 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28:19에서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말씀하신 것도 이와 같은 말이다. 명예가 땅에 떨어진 왕은 다른 사람들을 초대함으로 명예를 되찾으려 한 것이다. 자격 없던 하층민들이나 이방인들은 왕의 잔치에 초대받고 크게 기뻐했을 것이다.
선한 사람이란 유대교 율법을 잘 지키던 자들이고 악한자들은 율법을 어겨 쫓겨난 자들이다.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은 오직 표면적으로 율법을 잘 지키던 사람들만 받아들였다. 하지만 예수님은 당시 유대인들이 버린 세리와 창녀들도 불쌍히 여기셨다. 선한 자건 악한 자건 다 왕의 잔치에 참여할 자격이 없는 자들이다. 구원은 자신의 노력이나 자신이 갖춘 자격으로 얻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초청에 응답하고 따르는 데서 온다는 것이다.
11절에 보면 왕은 가득 차 있는 손님들을 둘러보러 왔다. 그런데 한 사람이 혼인 예복을 입지 않고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단지 예복을 입지 않았을 뿐인데 묶어서 바깥 어두운데 내던지라는 명령은 정말 충격적이다. 예복이란 단순히 깨끗한 옷이 아니다. 깨끗한 옷이라면 수많은 손님들이 앉아있는데 멀리서 한눈에 보고 찾아낼 수 없다.
왕의 혼인잔치에 참여하려면 격식에 맞는 예복을 입어야 하는데 그러한 예복을 갖춘 사람들은 모두 다 죽었다. 그렇기 때문에 왕은 갑자기 온 손님들에게 왕실의 잔치의 격식에 맞는 예복을 모두에게 나누어 준 것이다. 이 예복은 옷 위에 덧입던 코트와 같은 것이었다. 이 옷만 입으면 모두가 존귀한 왕의 신하들처럼 보이게 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입지 않겠다고 거부한 사람은 왕에 대한 강한 거부함을 표현한 것이다. 힘이 없어 왕을 죽이지 못했을 뿐 그 마음에는 왕에 대한 반감이 가득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예수님 당시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은 하나님이 준 예복을 거부하고 자신들이 만든 예복을 입은 것이다. 여기서 혼인 예복은 요한이 선포한 회개를 가리킨다. 회개한 자만이 하나님의 잔치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만든 율법규정을 예복으로 삼아 하나님의 잔치에 참여한 셈이다.
혼인잔치는 주로 밤에 이루어졌다. 왕궁의 혼인잔치 자리에는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예복 입기를 거절한 자들을 묶어서 바깥 어두운 곳에 내던진 것은 다시 잔치 자리에 들어오지 못하게 한 것이다. 처음 초청을 받은 자는 모두 진멸되었고 초청에는 응했지만 왕의 예복을 거절한 사람들은 쫓겨난 것이다.
비유를 마치신 예수님은 22절에서 이 비유를 요약해서 한마디로 전달했다. 그것은 “부름 받은 사람은 많으나, 뽑힌 사람은 적다” 라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천국 백성으로 부름을 받았으나 하나님께서 주신 예복을 입고 천국 잔치를 누릴 사람은 적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공생애를 마치시고 이제 곧 십자가의 죽음을 앞둔 시점에서 탄식조로 하시던 말씀이다.
오직 하나님께서 주신 예복인 회개를 하고 영원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 만이 구원을 받고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 회개의 예복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만이 자신을 정결케 할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이 회개의 예복을 입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교황이나 대주교라도 구원받지 못한다. 아무리 유명한 목사나 믿음 좋은 척하는 성도라도 구원받지 못한다. 반면에 세상적으로 보기에는 세상의 쓰레기처럼 보이는 사람들도 이 예복을 입은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다.
회개에는 두가지가 있다. 먼저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회개가 있다. 이것은 예수님을 처음 영접할 때 하는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이면 다 된다고 생각했다. 이런 사람들은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이젠 마음껏 죄짓고 살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 모습을 본 야고보는 야고보서에서 행함을 여러차례 강조했다. 특히 야고보서 2:26절에는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라고 말했다. 회개는 한 번 입고 문만 통과한 뒤에 던져버리는 것이 아니다. 진정으로 회개했다면 회개한 표시로 변화된 삶을 계속 예복으로 입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왜 욕을 먹는 이유는 회개라는 예복을 하나님나라의 입장권 쯤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회개는 말로만 립서비스가 아니다. 거룩하신 왕 앞에 늘 서 있기에 늘 옷처럼 입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회개와 은혜를 덧입지 않고 자신들만의 거짓된 거룩을 예복으로 입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골라내셔서 손발을 묶은 뒤 어두운 곳에 던지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