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1:6-11 예수께서는 구약의 예언대로 나귀와 그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고 수많은 무리들은 겉옷과 종려나무 가지를 바닥에 깔며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라고 찬송을 불렀다.
이전 말씀에선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의 시온 산 건너편 감람 산에 들어가셔서 제자들을 보내시며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어오라고 하셨는데 이는 예언의 성취라는 내용이었다. 이어지는 말씀은 예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내용이다.
6절은 제자들이 가서 예수께서 그들에게 명하신대로 했다는 것이다. 7절은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니 예수께서 그 위에 타셨다고 했다. 여기서 해석상의 문제는 두 번 반복되는 "그 위에"라는 말이다. 새번역은 두 번째 나오는 "그 위에" 라는 말의 의미가 모호하기에 생략했다. 원어는 "그 위에"가 아니고 "그들 위에"이다. 앞에 나오는 "그들 위에"라는 말은 분명히 나귀와 나귀 새끼이다. 제자들은 두 마리 모두에게 겉옷을 얹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두 번째 나오는 "그들 위에" 라는 말은 "나귀와 나귀 새끼 위에" 라는 말인지 아니면 "그 겉옷들 위에" 라는 말인지 불분명하다. 만약 두 번째 나오는 "그들 위에 타셨다" 라는 말이 나귀와 나귀 새끼를 뜻한다면 예수께서는 두 마리의 짐승 사이에 앉으신 이상한 모습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 위에"라는 말은 짐승들이 아니고 겉옷들을 뜻한다고 봐야 한다.
"그들 위에"라는 말은 겉옷을 뜻한다. 그 중 한 마리 위에 여러 장의 겉옷을 얹어 놓았고 예수께서는 그 겉옷들 위에 앉으셨다는 뜻이다. 예수께서 두 마리 사이에 걸터 앉으셨다거나 두 마리를 차례로 탔다는 뜻이 아니라 그 겉옷들 위에 앉으셨다는 뜻이다. 예수께서는 둘 중 어느 것을 탔을까?
마가복음 11:7절과 누가복음 19:35절에 보면 나귀 새끼만 등장한다. 마가와 누가 둘 다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라고 했다. 둘 다 나귀 새끼를 타셨다고 했다. 요한복음 12:15절에서도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라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분명히 나귀 새끼를 타신 것이다.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라는 말은 태어난 지 얼마 안된 새끼라는 뜻이 아니다. 이제 다 성장했지만 아직 사람을 태워본 경험이 없는 사람으로 말하면 청소년기에 있는 나귀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마태는 어째서 어미와 새끼 둘 다 끌고 왔다고 했을까? 마태가 틀렸을까? 그렇지 않다. 복음서는 목격자들의 증언이다. 마가와 누가와 요한은 함께 끌고 온 나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들은 모두 예수께서 "아무도 타 보지 않은" 이라는 말에 초점을 맞추어 증언한 것 뿐이다. 그러나 마태는 나귀와 나귀 새끼를 함께 끌고 왔다는 것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스가랴 9:9절에도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나온다. 마태는 스가랴의 예언이 그대로 성취된 것에 놀라 두 마리였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이어서 8절에서는 큰 무리가 등장한다. 새번역은 NIV를 따라 "큰 무리"라고 번역했지만 개역개정은 ESV나 NASB를 비롯한 다수의 영어 번역을 따라 "무리의 대다수"라고 번역했다. 크다는 말은 최상급이기에 "매우 큰"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무리의 대다수"라고 번역한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 중 대부분이 그렇게 겉옷을 길에 폈다고 보고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사고로 생각하여 그렇게 번역한 것이다. "큰 무리들"이라고 번역하면 엄청나게 많은 무리들이 옷을 길에 깔면서 환호하는 장면이 되기 때문에 그럴 가능성이 적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원어를 직역하면 "매우 큰 무리들"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다. 마태는 이렇게 인상적인 일이 적은 무리에 의해 이루어진 일이 아닌 것을 우리에게 알리려는 것이다. 마태는 분명히 자신이 경험한 큰 감동을 이렇게 증언한 것이다. 현대인들의 이성적 사고로는 마태의 표현처럼 그렇게 엄청난 무리들이 환영했다고 보기 어렵다며 마태의 감동을 축소해서 번역한 것이다. 그러나 마태는 분명히 자신도 놀랄 만큼 많은 무리들이 길에 겉옷과 종려나무 가지를 펴는 모습을 목격한 것이다. 똑같은 말이 마가복음 4:1절에서도 "대단히 큰 무리"라는 뜻으로 쓰였다.
9절에 보면 무리들은 앞에서 가고 뒤에 따라 가면서 소리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이는 예수가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로 보고 찬양하는 것이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라는 말은 시편 118:26에서 온 것이다. 바로 앞에 나오는 118:25절을 보면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라고 되어있다. 따라서 이는 자신들을 구원해 주실 구원자라며 찬송을 부르고 있는 것이다.
10절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도시가 진동하며 말하길 "이 사람이 누구냐?" 라고 했다는 것이다. 사람들의 찬송 소리가 어찌나 컸는지 온 성이 무리들의 찬송과 함성으로 인해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렸다는 것이다. 이처럼 지진이 나듯 진동했다는 표현도 8절의 "무리의 대다수"라는 말은 원어의 문자적 의미 그대로 "매우 큰 무리"라는 뜻이 옳다는 것을 지지해 준다.
11절은 무리가 말하길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 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는 유월절에 예루살렘을 방문한 순례객들이 들은 소문을 말한 것이다.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가르치시고 기적을 행하신 소문을 다 들었던 것이다. 무리들은 소문을 들어 그 가르침과 능력을 알고 있었지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구원자라는 인식은 갖지 못한 것이다.
무리들은 이렇게 예수가 어떤 분이신지 잘 모르지만 마태는 예수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고 스가랴 9:9절에서 나귀를 타고 오신다고 예언된 바로 그 메시야라고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무리들은 자신들을 정치적으로 해방시켜 주고 잘 살게 해 줄 왕으로 보고 개선하는 왕을 환영하는 행사처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마태는 예수가 그 백성들을 구원하러 오신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이틀 후면 성탄절이다. 오늘날 사람들도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의 순례객들처럼 떠들썩하다. 그러나 진짜로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고 예수님 앞에 자기 겉옷을 펼치며 경배하는 이들은 매우 적다. 오늘날 많은 믿는 사람들도 예수님 당시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하고 흥분한 무리들과도 같다. 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에서 밤이 새도록 무리들을 다 고쳐주셨을 때 흥분했던 무리들과도 같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옷을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깔면서 흥분하던 무리들과도 같다.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여 예수가 누구신지 분명히 알고 그 앞에 참된 경배를 드리는 적은 수의 제자들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