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13-16 포도원 주인은 선한 마음으로 마지막에 온 일꾼들에게 더 주고 싶어 준 것이라며 자신의 선한 뜻을 질투심을 가지고 악하게 보지 말라고 했다.
이전 말씀에서 포도원 주인은 한 시간만 일한 사람들에게 한 데나리온을 줬을 때 먼저 온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공평하지 못하다고 불평을 계속했다. 이제 이어지는 말씀은 포도원 주인은 선한 마음을 가지고 선한 일을 한 것이라고 해명하는 내용이 이어진다.
먼저 온 일꾼들이 공평하지 못하다고 항의하는 것에 대해 13절에서 주인은 대답한다. 새번역에서 “여보시오” 라고 번역한 말은 원문에서는 개역처럼 “친구여”라는 말이다. “친구여”라는 말은 친근감 있는 표현이 아니라 동료들을 부르는 일상적인 말이다. 우리말로 그 의미와 느낌을 살려 번역한다면 "여보시오" 보다는 “여보게” 라고 해야 한다. 주인은 "여보게" 라고 부른 뒤 부당하게 대한 것이 없다고 해명한다. 한 데나리온 주기로 약속하지 않았느냐고 반문을 한다.
이어 14절에서 주인은 “당신 것이나 가지고 가!”라고 했다. 그러면서 또 주인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마지막에 온 사람에게 당신과 똑같이 주고 싶어." 주인은 마지막에 온 사람에게도 하루 품삯을 주고 싶어 똑같이 주었다는 것이다. 주인은 일한 댓가를 준 것이 아니라 긍휼히 여겨 자비를 베풀었다는 뜻이다. 15절에서도 주인은 계속해서 해명을 한다. “내 것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부당한 것이냐?” 맞다. 주인은 먼저 온 사람들의 것을 빼앗아 마지막에 온 사람들에게 주지 않았다. 주인은 자신이 가진 것으로 마지막에 온 사람들을 긍휼히 여겨 더 준 것 뿐이다.
이어서 주인은 또 말한다. 새번역 15절 뒷부분에는 “내가 후하기 때문에 네 눈에 거슬리냐?”라고 되어 있다. 새번역은 원어를 직역하면 말이 잘 안 통하기 때문에 의미를 살려 번역한 것이다. 직역하면 “내가 선하기 때문에 네 눈이 악하냐?”라는 말이다. 눈이 악하다는 말은 분노해서 독기를 품고 노려보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쓰는 말로 의미를 살려 번역한다면 “내가 선한 마음으로 저 사람들에게 더 주는데 네가 왜 뱁새눈을 뜨고 노려보냐?”라고 할 수 있겠다. 여기서 온종일 일한 일꾼들이 제기한 문제점은 주인의 부당함에 있지 않다. 이들의 문제는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없고 질투심만 가득했던 것이다.
한 시간만 일을 한 사람들은 이른 아침부터 일한 사람들보다 노동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이다. 그렇기에 먼저 온 일꾼들보다 더 불쌍한 사람들임에 틀림이 없다. 주인은 그들에게 일한 대가를 준 것이 아니라 굶고 있는 그와 그들의 가족들을 위해 자비를 베풀어 준 것이다.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을 비유한 것이다. 하나님의 공평함은 세상사람들의 공평함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16절에서 예수께서는 "이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라고 하셨다. 이는 지금까지 말씀하신 비유의 결론이다. 이는 아버지의 마음을 몰라주는 철부지 어린아이 같은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이 비유를 시작하기 전인 19:30절에서도 똑같은 말씀으로 시작하셨다. 따라서 19:30절과 20:16절은 이 비유를 앞 뒤에서 감싸는 액자의 구실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비유를 통해 말씀하시는 것은 먼저 된 자와 나중 된 자는 순서의 문제이지 누가 더 받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제자들도 으뜸가는 제자들이 더 큰 상을 받고 나머지 제자들은 적은 상을 받는다는 뜻이 아니다. 이 비유의 초점은 순서가 바뀐 것 뿐이다. 모두가 다 자격이 없는 자들인데도 분에 넘치도록 받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좀 더 큰 일을 했고 귀한 일을 했다고 더 큰 상을 기대하고 교만한 마음을 품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세상사람들의 공평함은 서로의 이기심이 충돌했을 때 힘센 자가 정한 타협점일 뿐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공평하심은 그러한 타협점이 아니다. 하나님의 공평하심은 긍휼히 여기시는 마음에 근거를 둔다. 바울은 로마서 9:14-15절에서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다는 말인가? 그럴 수 없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긍휼히 여길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사람을 불쌍히 여기겠다’ 하셨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의 공평하심은 이처럼 긍휼히 여기시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자녀를 가진 부모라면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여러 자녀가 있지만 더 안타깝게 보이는 자녀가 있는 법이다. 좋은 직업을 갖고 잘 사는 자녀보다 힘들게 살아가는 자녀가 더 안타깝게 느껴 더 주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이다. 어렵게 사는 자녀에게 조금이라도 더 주고 싶어 더 주면 잘사는 자녀들은 차별한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고 오늘 본문의 비유에 나타난 하나님의 마음이다. 이 비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긍휼히 여기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 이웃들을 그렇게 하나님의 마음으로 서로를 긍휼히 여기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