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0:9-15 가까운 지역에서 복음을 전할 때는 따로 여행 준비를 하지 말고 그냥 떠나서 영접하는 사람들 집에 머물고 만약 영접하지 않으면 발의 먼지를 털고 떠나라.
이전 말씀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보내시며 잃은 양들에게 가서 하나님 나라를 말로 선포하고 치유 사역을 통해 보여주라 하시며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하셨다. 이제 이어지는 오늘 말씀은 그렇게 선포하고 치료할 때 주의해야 할 일들을 자세히 말하고 있다.
오늘날의 관점으로 보면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 많다. 또 이 말을 예수님의 일반적인 지침으로 생각하면 잘못 이해할 수 있다. 첫번째 실습이라는 점과 멀리 가지 않고 갈릴리의 익은 곡식을 거두러 갈 때 준 주의사항이라는 것을 꼭 기억하고 있어야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9절은 “전대에 금화도 은화도 동전도 넣어가지고 다니지 말라”고 했다. 넣어 가지고 다니지 말라는 말은 원래 “얻지 말라” 또는 “구하지 말라”는 뜻이다. 이 말은 돈을 하나도 갖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가라는 뜻이다. 돈을 구한다는 것은 멀리 여행 갈 때 그 비용을 미리 준비하는 것과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냥 있는 그대로 가라는 것은 멀리 가지 않을 것이니 그럴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이 말을 잘못해석해서 멀리 단기선교나 장기선교를 하러 갈 때 돈 없이 그냥 가야 한다고 하는 것은 이 구절을 잘못 해석하는 것이다. 여행용 자루 즉 오늘날식으로 말하면 배낭이나 여행용가방을 갖고 가지 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멀리 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속옷 두벌을 갖지 말라고 새번역에 되어 있는데 이는 오늘날 속옷이 아니다. 일상생활을 할 때 맨살 위에 바로 입고 있던 옷을 말한다. 오늘날 우리는 속옷을 입고 그 위에 겉옷을 입지만 당시 사람들은 보통 때는 맨살 위에 옷 하나만 입었다. 그 위에 겉옷은 비바람과 추위를 막기 위해 걸치던 담요 같은 것이다.
대부분 당시 농부들은 옷이 한 벌이었다. 물론 제자들도 역시 대부분 옷이 한 벌이었을 것이다. 두벌 옷을 갖는다는 것도 역시 장거리 여행에 대비해서 준비하는 것이다. 장거리 여행이 아니기에 신발도 역시 신고 있는 것 말고 여벌을 준비하지 말라는 것이다. 지팡이는 멀리 여행할 때 사나운 맹수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때 쓰는 것이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갈릴리 마을로 다닐 때에는 그럴 필요가 없다. 맹수가 아예 없기 때문에 공연히 짐만 된다. 이 모든 것은 다 멀리 여행하는 것이 아니니 그냥 있는 그대로 평상시 차림으로 가라는 뜻이다.
하지만 단순히 멀리가지 않기 때문만은 아니다. 10절 끝에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얻는 것은 마땅하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이 말은 먹을 것을 뜻하는 말이지만 먹을 것 뿐 아니라 입을 것과 숙소까지도 마찬가지이다. 입을 것은 항상 같은 것을 입었기 때문에 필요 없었을 것이고 가장 중요한 것은 먹을 것이다. 먹을 것은 제자들을 영접하는 사람들이 제공할 것이기 때문이다.
요셉푸스는 “모든 도시에서 동료 에세네파 사람들에게 환대받을 것을 기대하면서 에세네파 사람들은 여행을 다닐 때 식량을 갖고 다니지 않았다” 라고 했다. 에세네파 뿐 아니라 당시 근동 사람들은 손님을 환대하는 것을 미덕으로 생각했다. 또 손님들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것을 의무로 생각했다. 창세기에서 롯이 자기 집에 온 손님을 보호하기 위해 자기 딸들까지도 내놓겠다고 할 만큼 지키려고 했던 것이다. 따라서 크리스천들도 역시 가는 곳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사람들의 집에서 대접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갖고 가지 말라는 것이다.
여행준비를 안하고 간다면 어떻게 여행을 하느냐고 반문할 사람들에게 답한 것이 바로 11절이다. 어느 도시나 마을에 들어갈 때 그 안에서 합당한 집을 찾아내라는 것이다. 그리고 떠날 때까지 거기서 머물라는 것이다. 이게 무슨 뜻일까?
만약 어느 목사님이 부흥회를 인도하러 어느 교회에 갔다고 가정해 보자. 이 집사님은 열심히 청소하고 침구도 깨끗하게 준비해서 강사 목사님을 자기 집에 모셨다고 하자. 그런데 강사 목사님이 이틀 정도 머물다가 김 집사님이 자기 집으로 오라고 했을 때 그 집으로 간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이 집사님은 뭘 잘못했는지 뭐가 불편하셨는지 큰 걱정을 하실 것이다. 마찬가지로 고대 이스라엘에서도 마찬가지다. 한 곳에 머물다가 다른 집으로 옮기면 그 집 주인에게는 큰 수치가 되는 것이다.
12절은 어떤 집에 들어갈 때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라고 했다. 이는 목자 없는 양 같은 사람들이라고 모두 제자들을 영접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평화를 빈다고 인사할 때 그들이 익은 곡식들이라면 받아들일 것이고 익지 않는 곡식들이라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13절은 그렇게 평화를 빌고 나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하고 있다. 그 집이 평화를 누리기에 알맞으면 너희가 비는 평화가 그 집에 있게 하고 알맞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되돌아오게 하라고 하셨다. 개역개정에는 “임할 것이요"와 “되돌아올 것이니라”라고 했다. 그런데 원어는 3인칭 명령형이기 때문에 새번역처럼 "…하게 하라"로 번역해야 옳다. 제자들이 평화를 빌었는데 제자들을 받아들이면 그대로 평화가 그 집에 있도록 내버려두고 그 집에서 머물라는 뜻이다. 만약 거절하면 그 평화가 다시 제자들에게 돌아올 것이니 그들이 그 평화를 받지 못하도록 내버려 두라는 뜻이다.
되돌아오게 하라는 말은 그 평화가 평화를 빈 사람에게 돌아오게 한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거절한 사람을 저주하라는 뜻은 아니다. 그냥 돌아서라는 것이다. 돌아서되 그냥 돌아서는 것이 아니다. 14절에 돌아설 때의 지침을 말하고 있다. 누구든지 복음을 전하는 사람을 거절하거나 말을 듣지 않으면 그 집이나 그 도시를 떠날 때 발에 묻은 먼지를 떨어버리라고 했다.
발에 먼지를 떠는 것은 유대인들이 이방인 지역에서 돌아올 때 행하던 것이다. 또 성전에 들어갈 때도 행했다. 이는 더러운 지역을 벗어나 거룩한 지역으로 들어간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복음 전하는 자들을 거절한 자들은 유대인들이지만 이제 이방인들과 마찬가지로 상종 못할 더러운 사람들로 취급하라는 것이다. 이제는 유대인만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저주하거나 원망할 필요가 없다. 그 이유가 15절에 나와 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라는 말은 이어지는 말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뜻이다. 이어서 “소돔과 고모라 땅이 심판날에 그 도시보다는 견디기 쉬울 것이다”라고 하셨다. 소돔과 고모라는 완전히 멸망한 도시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던 유대인들 중에서도 예수님의 복음을 거절한 집이나 도시들은 소돔과 고모라보다 훨씬 더 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란 뜻이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심판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우리가 보기에 불쌍한 사람들에게 나가서 전하면 된다. 만약 그들이 받아들인다면 그들은 익은 곡식이므로 하나님의 알곡으로 추수하면 된다. 만약 거부한다면 아직 익지 않은 곡식이므로 그냥 돌아서면 된다. 우리가 함부로 심판해서 저주하거나 원망할 일이 아니다.
우리가 할 일은 당시 갈릴리 사람들처럼 고통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어 주는 것이다. 만약 그들이 우리가 말로 들려주고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을 받아들이면 그들은 익은 곡식인 것이다. 만약 그들이 거절하면 아직 익지 않은 곡식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함부로 판단하고 재판관이 될 필요는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단지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다가가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보여주는 것 뿐이다. 멀리 선교지에 가기보다는 먼저 오늘 말씀처럼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에게 나가야 한다. 그들에게 나가서 평화를 빌고 그들과 함께 거해야 한다. 만약 그들이 우리를 거절한다면 그냥 돌아서면 된다. 우리를 반대하는 사람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려고 계속 매달리다가 실망할 필요가 없다. 그렇게 하다가는 다른 익은 곡식들을 수확할 때를 다 놓치고 만다. 그냥 발을 털고 돌아서서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가서 말씀 전하고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