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9:32-33a 예수님께 치료를 받은 두 소경은 귀신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예수께 데려오자 귀신이 쫓겨나고 말을 하게 되었다.
이전 말씀에서는 예수님의 능력으로 눈을 뜨게 된 소경들이 예수께서 알리지 말라고 하셨지만 기쁨을 감추지 못해 널리 알렸던 내용이었다. 이제 이어지는 기적은 말 못하는 사람이 예수님 앞에 나와 치료 받는 장면이다.
32-33절에 보면 말못하는 한 사람이 예수님 앞에 와서 치료받는 장면이 나온다. 32절 맨 앞에 보면 새번역에는 “그들이 떠나간 뒤에” 라고 되어 있는데 개역이나 NIV에는 “저희가 나갈 때에” 라고 되어 있다. 그들이나 저희는 다 예수님을 통해서 눈을 뜬 두 소경들을 뜻한다. 문제는 새번역처럼 “나간 뒤에” 라고 해석해야 하느냐 아니면 개역처럼 “나갈 때에”라고 해석해야 하느냐 하는 것이다.
32절에서 중심 동작을 나타내는 말은 “데리고 왔다”이다. 이는 “이끌려 왔다”라는 뜻이다. 누구에게 이끌려왔을까? 원어는 그들에 의해 이끌려왔다는 뜻이다. 32절 첫 부분에 그들이라는 말은 분명히 앞에서 치료받은 두 소경이란 뜻이다. 그렇다면 이어지는 “데리고 왔다” 라는 말도 역시 “그들” 즉 “두 소경” 일 수 밖에 없다. 만약 두 소경이 아니라면 그들이 누구인지 분명히 밝혔어야 한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치료를 받은 두 소경이 귀신들려 벙어리가 된 사람을 예수님께 데려왔다는 뜻이다.
두 소경은 자신들이 치료받고 나자 귀신들려 말 못하는 사람 사람이 생각났을 것이다. 처지는 다르지만 흠이 있는 자들이기에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는 점은 같았다. 이들은 믿음의 공동체에서 제외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공동체에서 제외된 흠이 있는 사람들 끼리 함께 교제를 하며 지냈을 것이다. 눈을 뜨게 된 소경들은 자신들이 눈을 뜨게 되자 말 못하는 친구가 생각났을 것이다. 그래서 달려가서 그 사람에게 모든 이야기를 하고 예수님께로 데려왔을 것이다.
이는 마치 열왕기하 7장에 나온 문둥병자들과도 같다. 저들은 적군에게 가서 먹을 것을 얻으려고 갔다. 굶어 죽나 칼에 죽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가보니 아무도 없어 신나게 먹고 물건도 감추고 하다가 생각하니 성안에서 굶어 죽어가고 있는 사람이 생각났던 것이다. 오늘 본문의 두 소경도 자신들이 치료받고 나자 말못하는 사람이 생각났을 것이다.
예수께서 아무런 질문이나 경고도 안하신 것은 이 말못하는 사람이 이미 두 소경에게 들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 사람은 말못하는 귀신에 들린 것일 뿐 정신은 온전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만약 거라사 광인과 같은 상태였다면 그 상태에 대한 묘사가 있었을 것이다.
33절 앞부분에 보면 귀신이 쫓겨나고 말못하는 사람이 말을 하게 되었다. 예수께서 귀신을 쫓아내니 그 결과 말을 하게 된 것이다. 불쌍히 여김을 받은 두 소경은 말못하는 사람을 불쌍히 여긴 것이다. 자신들이 불쌍히 여김을 받았기에 또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긴 것이다. 그래서 이 두 소경들은 말 못하는 친구를 예수님께 데려와 치료를 받게 한 것이다.
이 말 못하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목격하고도 증언하지 못하는 벙어리 같은 사람들을 비유적으로 나타낸 것이기도 하다. 두 소경도 역시 영적인 눈이 멀어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는 사람들을 비유적으로 나타내기도 한 것이다. 이는 당시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시던 기적들을 보고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예수에 대한 증언들을 듣고도 말하지 못하던 것을 지적한 것이다. 그들이 예수님 앞에 나아와 예수님께 구하면 치료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누가복음 10:37에 보면 예수께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신 뒤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냐고 질문하셨다. 그리고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라고 말씀하셨다. 불쌍히 여김을 받은 우리는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만나 놀라운 은혜를 얻었다면 말 못하는 벙어리가 되어서는 안된다. 우리도 가서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것이 바로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는 복 있는 자가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기적을 베풀어주신 것도 우리도 역시 긍휼히 여기는 자라 되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