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9:18-19 예수께서는 자신을 대적하던 갈릴리의 바리새파 사람들 중의 지도자인 사람이 와서 죽은 딸을 살려 달라고 했을 때 낡은 율법에 따라 부정하다며 거부하지 않고 사랑의 율법을 따르는 본을 보이셨다.
이전 말씀에서 예수께서는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대고 꿰매는 사람이 없다는 비유와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사람이 없다는 비유를 통해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을 유대교의 낡은 틀 안에 넣을 수 없다고 하시며 바리새파 사람들의 금식의 동기가 잘못되었다고 하셨다. 이제 이어지는 오늘 말씀은 낡은 가죽 부대인 바리새파 사람들의 정결법과 새 가죽 부대인 예수님의 사랑의 법이 충돌하는 장면이다.
오늘 말씀 18절은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 라는 말로 시작한다. 이는 바로 “새 포도주는 새 가죽 부대에” 라는 말씀을 하실 때라는 뜻이다. 이는 새 가죽 부대가 무엇인지 오늘 말씀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당시 바리새파 사람들은 낡은 가죽 부대인 정결법에 따라 부정한 사람들은 접촉하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새 가죽 부대인 사랑의 법을 따라 불쌍히 여기시고 접촉하셨다.
오늘 말씀에는 큰 구경거리를 나타내는 말이 나온다. 첫번째 구경거리는 딸을 잃은 불쌍한 아버지가 예수님 앞에 엎드린 것이다. 이 아버지를 개역에서는 직원이라고 했고 개역개정에는 관리라고 했다. 또 새번역에는 지도자라고 번역했다. 이 말의 원래 문자적인 의미는 통치자라는 뜻이다. 요한복음 3:1에서는 이 말에 “유대사람의” 라는 말이 붙어 있는데 이는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이란 뜻이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나타난 사람은 갈릴리 가버나움에 사는 사람이기 때문에 가버나움의 유대인 지도자일 것이다. 마가복음에는 회당장 야이로라고 되어 있다.
이 사람은 갈릴리의 바리새파 사람들 중에도 가장 높은 지도자이다. 이처럼 지위가 높은 사람들은 함부로 사람들 앞에 엎드리지 않았다. 주로 하나님이나 왕에게만 엎드렸다. 그런데 갈릴리 가버나움의 유대교 지도자인 이 사람이 예수님 발 아래 무릎을 꿇은 것이다. 이것은 정말 놀랄만한 구경거리이기 때문에 “저것 좀 봐!”라는 말을 무릎 꿇었다는 말 앞에 붙인 것이다.
이 지도자가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은 정말 큰 구경거리였을 것이다. 이 사람이 예수님 발 앞에 엎드린 이유가 바로 이어서 나온다. 자신의 딸이 방금 죽었기 때문이다. 딸이 죽었다면 장사를 지내야지 왜 예수님 앞에 와서 엎드리나? 그는 예수께서 오셔서 손을 얹어주면 아이가 살아날 것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예수님이라면 죽은 딸도 살릴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어떻게 이런 믿음을 갖게 되었을까? 이 사람은 분명히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들을 들었을 것이다. 자신도 예수께서 행하시는 기적을 직접 목격했을 것이다. 하지만 보고 들은 것만으로 엎드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약 딸이 건강하게 살아있었더라면 이 사람도 예수님 앞에 엎드리지 않았을 것이다. 애지중지 키운 딸이 죽을 병에 걸리자 예수님에 대해 보고 들은 것이 생각난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이라면 자기 딸을 살릴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체면도 내려놓고 예수님 앞에 달려와 무릎을 꿇은 것이다.
만약 이 사람에게 아무런 어려운 일이 생기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수많은 기적을 보고 들었다 해도 예수님 앞에 엎드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의 입장이라면 평소에는 거들떠 보지도 않던 사람이 갑자기 아쉬운 일이 생겨 찾아와 부탁하면 들어줄까? 아마 우리라면 못 본체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사람조차도 불쌍히 여기셨다.
마가복음에 보면 이 사람의 딸은 12살이라고 했다. 틴에이져라면 아버지와 관계가 안좋을 수도 있지만 12살이면 마냥 예쁘기만 할 때이다. 12년동안 애지중지 키운 딸이 죽었으니 그 마음이 어땠겠는가? 사실 이 사람에 예수님께 특별히 잘해드린 것이 없다. 있다면 다급할 때 찾아와 믿고 의지한 것 뿐이다. 예수님은 이 사람이 예수님께 잘했기 때문에 불쌍히 여긴 것이 아니다. 그동안 쌓은 친분 관계가 전혀 없지만 막다른 골목에서 예수님께 나아와 엎드려 모든 것을 믿고 맡겼을 때 예수님께서 보시고 불쌍히 여기신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 이다. 우리도 세운 공로가 있어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 것이 아니다. 우리도 역시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서 갈 곳도 없고 의지할 곳도 없을 때 예수님 앞에 나와 엎드린 것 뿐이다. 하지만 그분은 우리가 전에 그분께 무엇을 잘 해 드렸는지 따지지 않으셨다. 그저 당신께 나아와 믿고 엎드리면 불쌍히 여기시고 기적을 보여 주신 것이다.
19절에 보면 예수께서 일어나셔서 그 사람을 따라가셨다고 했다. 예수님 편에서 이 사람의 마음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신 것이다. 그래서 그를 따라 가신 것이다. 사실 이 사람은 예수님을 대적하던 갈릴리의 바리새파 사람들의 우두머리였으니 원수들의 대장이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경계하고 멀리하는 것이 세상사람들의 법이다. 따라서 예수님이 이 사람을 따라간 것은 보통사람들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의 본보기를 보이신 것이다.
더구나 가서 죽은 시체를 가까이 해야 하고 손으로 만져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예수님께도 큰 부담이 되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환자를 위해 기도할 때 직접 아픈 부위에 손을 대고 기도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이다.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을 것이 뻔한데도 벌떡 일어나셔서 따라가신 것이다. 예수님은 낡은 율법보다 한결같은 사랑의 법을 따르신 것이다. 마태는 제자들도 그 뒤를 따라갔다고 했다. 이것은 제자들이 아무 공로도 없는 사람의 믿음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신 예수님의 사랑을 목격한 목격자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행하실 기적의 목격자라는 뜻이다.
존 오트버그는 그의 책 "평범 이상의 삶"에서 "진정한 변화를 체험하지 못할 대는 사이비 변화로 만족하게 된다"고 했다(오트버그, 43). 예수님 당시 바리새파 사람들의 거룩은 바로 진짜 변화가 아니고 사이비 변화이고 진짜 거룩이 아닌 사이비 거룩인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 역시 진정한 변화를 체험하지 못하고 오랫동안 교회에 다니면 사이비 변화와 사이비 거룩을 진짜 변화와 진짜 거룩으로 착각하고 살아가기 쉽다. 과거에는 예배 시간에 박수를 쳐도 안된다며 박수 칠 일 있으면 주보를 흔들라고 했다. 필자가 고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예배시간에 기타를 치면 거룩하지 못하고 피아노는 거룩하다고 했다. 오늘날도 옷 깨끗이 입고 예배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며 헌금 잘 드리고 자주 금식기도도 하면 거룩하다고 착각한다. 모두 사이비 거룩이다.
진짜 거룩은 예수님께서 본을 보여주신 사랑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대적하고 기회가 되면 트집을 잡아 죽이려던 자들의 우두머리인 유대교 지도자도 불쌍히 여겨 그를 따라 가셨다. 그것이 진짜 거룩이다. 그래서 바울도 로마서 13:10절에서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라고 한 것이다. 바울도 과거에는 사이비 거룩을 거룩인 줄 알던 사람인데 예수님을 만난 뒤에는 사랑이 진짜 거룩이라고 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우리가 안 보는 곳에서는 흉보고 헐뜯고 보는 곳에서는 직접 욕하고 무시하는 사람들까지도 사랑하여 친절하게 대해야 한다. 그것이 진짜 거룩이다. 이제는 사이비 변화 사이비 거룩에 만족하지 말고 우리 예수님처럼 진짜 거룩인 사랑을 행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