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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섭 목사Dr Ahn's NT 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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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wn Word

마태복음 9:16-17

금식의 동기가 잘못되었다

산 위의 동네와 등경 위의 등불 · 마태복음 5장

2021. 8. 23. · 안정섭 목사 · 마태복음 9장 강해 설교

마태복음 9:16-17 예수께서는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대고 꿰매는 사람이 없다는 비유와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사람이 없다는 비유를 통해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을 유대교의 낡은 틀 안에 넣을 수 없다고 하시며 바리새파 사람들의 금식의 동기가 잘못되었다고 하셨다.

이전 말씀에서는 예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때에는 잔치를 해야 하는 때이지 금식할 때가 아니라고 하셨다. 이어지는 오늘 말씀은 새헝겊과 새 포도주의 비유로 그들의 금식의 동기가 잘못되었다고 말씀하신다.

16절에 보면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다 대고 깁는 자가 없다고 했다. 옷이 낡아 찢어졌거나 구멍이 났을 때 다른 천 조각을 대고 꿰메는 것이다. 70년대 초반 까지만 해도 교복 엉덩이에 다른 천을 덧대어 누벼 입었다. 당시에는 다른 옷들도 무릎이나 엉덩이에 천을 대고 꿰메어 입는 사람이 많았다. 예수님 당시에는 옷감은 손으로 짜던 것이기에 그 값이 매우 비쌌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 사람들은 낡은 옷을 꿰메어 입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생베조각이라고 번역된 말은 원어의 문자적인 뜻은 “수축되지 않은 천조각” 이란 뜻이다. 천은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물로 빨면 옷감이 오그라들게 마련이다. 오늘날 미국의 옷들은 미리 오그라들게 만들었기 때문에 빨래 건조기로 돌려도 적게 오그라드는 편이다. 하지만 전에 한국에서 입던 옷을 건조기로 몇 번 돌리면 옷이 줄어들어 못쓰게 되었다. 빨래 건조기가 한국에서 널리 보급되지 않았기에 미리 오그라들게 처리하지 않은 탓이다.

옛날의 새로운 천은 아무런 처리가 되지 않았고 또 손으로 짠 것이기 때문에 훨씬 더 많이 오그라들었을 것이다. 새 헝겊조각으로 낡은 옷을 수선하기 위해 덧대어 꿰매고 빨면 새 헝겊조각이 오그라들면서 낡은 옷을 잡아 당겨 찢어지게 되는 것이다.

주목할 말은 더욱 더 크게 찢어진다는 말이다. 이 말은 원래 옷이 이미 찢어져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을 수선하기 위해 새로운 헝겊 조각을 대고 꿰맨다면 새로운 헝겊 조각이 오그라들면서 낡은 옷을 더 많이 찢어지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수선하기 전보다 훨씬 더 많이 찢어져 옷이 못쓰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낡아서 헤어진 옷은 유대교의 가르침을 말한다. 새로운 헝겊조각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말한다. 바리새인들과 요한의 제자들은 유대교와의 연속선 상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려고 했다. 사실 AD 70년 이전까지는 유대인들도 기독교인들을 유대교 중에서 한 분파라고 생각했다. 핍박은 하면서도 또 성전이나 회당에서 함께 예배를 드리기도 했다. 유대교와 기독교는 AD 70년 유대로마 전쟁이후 완전히 갈라졌다.

대부분 예수님의 가르침을 유대교의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는 정도로만 이해했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예수님의 가르침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가르침이 항상 충돌을 했던 것이다. 예수님은 유대교의 가르침은 낡아빠진 옷과 같다는 것이다. 이미 여러 군데가 헤어져서 꿰매지 않으면 입을 수 없는 옷과 같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그 옷을 꿰맬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 비유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공동체의 특성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이 새로운 가르침을 따르는 공동체는 새 옷감이 오그라들어 그 조직이 단단해지는 것과 같은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의 공동체는 유대교 공동체와는 달리 환난과 핍박을 겪을 수록 더 결속력이 단단해지는 것이다. 만약 유대교 공동체 안에 머물게 된다면 유대교 공동체도 다 찢어져 못쓰게 된다는 뜻도 포함된 것이다.

세번째 비유는 17절에 나오는 새 포도주의 비유이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담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하면 가죽 부대가 터져서 포도주는 쏟아지고 가죽 부대도 못쓰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새 포도주는 새부대에 담아야 둘 다 보존된다는 것이다.

여기서도 새 포도주는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복음을 말하고 낡은 가죽 부대는 유대교의 율법체계가 가르치는 의를 말한다. 결국 앞의 비유와 비슷한 비유를 두번이나 말씀하신 셈이다. 왜 또 다른 비유를 말씀하셨을까? 그냥 강조하려고 새로운 비유로 한 번 더 말씀하셨을까?

의미를 알려면 먼저 새 포도주가 어떤 특성이 있는지 알아야 한다. 새 포도주는 아직 발효되지 않은 포도주이다. 새 포도주는 발효가 진행되면서 알코올과 이산화탄소가 생겨난다. 새 포도주에서는 이산화탄소 때문에 거품이 일어나고 부피가 팽창하게 된다. 그러나 낡은 가죽부대는 신축성이 없기 때문에 새 포도주가 팽창할 때 가죽부대가 터져버린다.

생베조각은 수축하여 단단하게 되기 때문에 유대교 체계를 무너뜨린다면 새 포도주는 팽창하기 때문에 유대교 체계가 무너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이 비유를 쓰신 목적은 분명히 예수님의 제자들의 공동체는 새 포도주가 발효되듯 급격하게 성장할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유대교의 율법체계는 신축성이 없어 이를 수용하지 못하고 터져버린다는 것이다.

터져버리면 바닥에 쏟아져 못쓰게 되는 것은 새 포도주인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이다. 물론 가죽부대인 유대교의 율법체계도 못쓰게 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새 포도주는 새 가죽부대에 담아야 둘 다 보존된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은 사실 새로운 것이 아니다. 구약의 율법이 오랫동안 전해 내려오는 동안 율법학자들의 해석으로 굳어져 그 본래의 뜻을 잃은 것이다. 예수님은 율법의 본래의 뜻을 하나님의 본래의 뜻에 따라 다시 해석하신 것이다. 하지만 유대교의 율법주의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되어 있었다.

둘 다 보존한다는 말은 새로운 포도주와 새로운 가죽부대이지 새로운 포도주와 낡은 가죽부대가 아니다. 왜냐하면 “새로운 포도주는 새 가죽부대에” 라는 말 뒤에 둘 다 보존하기 위해 라는 말이 붙어 있기 때문이다. 이제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은 새로운 제자들의 공동체 안에 보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새 가죽부대가 생겼으니 낡은 가죽부대인 유대교는 더이상 필요가 없다고 하신 것이다.

생베조각과 새 포도주의 비유는 자신들의 경건을 위한 금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지적하신 것이다. 그 증거가 디다케라고 불리는 고대 기독교인들의 문서에도 있다. 보통 1세기 후반에서 2세기 초반에 쓰여진 것으로 해석한다. 디다케에서는 금식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함께 금식하지 마라, 왜냐하면 그들은 월요일과 목요일에 금식한다. 그러나 너희는 수요일과 금요일에 하라” 디다케는 제자들이나 제자들의 제자들이 기록했을 것이다. 디다케에서 금식하는 날짜를 바꾼 것은 혹시나 외식하는 자들의 금식과 똑같은 금식으로 오해할까봐 바꾼 것이다.

존 칼빈은 거룩하고 정당한 금식은 방탕한 삶으로부터 보존하기 위한 육체의 억제로서, 기도와 경건한 묵상의 준비로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겸손함의 한 간증으로서 하는 것이라고 했다. 마틴 루터는 우리 몸을 정복하고 통제하기 위해 자주 금식하는 것이 옳다 라고 했다.

종교개혁자들도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지금 다시 오실 그날을 기다리며 때때로 금식을 할 것을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처럼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금식은 하지 말라는 것이다. 요한의 제자들은 금식하는 때가 틀렸다는 것이고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 동기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금식은 우리 몸의 정욕을 통제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을 묵상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금식이 습관화되면 형식만 남고 바리새인들처럼 자기들의 경건을 자랑하기 위한 것이 된다.

그러므로 자신의 경건을 드러내기 위해 금식을 한다면 그것은 그 동기가 잘못된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구하며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기 위해 금식할 수 있다. 금식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낮추며 기도하기 위한 것이지 사람들 앞에서 40일 금식했다고 훈장처럼 달고 다니라고 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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