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1:22-28 에스겔은 네 생물들이 떠 받치고 있는 평평한 판과 그 위에 있는 보좌와 보좌 위에 계신 하나님의 형상을 보고 얼굴을 땅에 대고 그 앞에 엎드려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
이전 말씀에서는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는 바퀴들은 네 생물들과 항상 함께 움직였다고 했다. 이제 오늘 말씀에서는 이제 네 생물들이 떠받치고 있는 윗부분인 평평한 판과 그 위의 보좌와 보좌 위의 하나님의 모습을 묘사한다.
22절은 네 생물들의 머리 위에 창공 모양의 평평한 판이 있다는 것이다. 창공이란 개역에서는 궁창이라는 말로 번역된 말이다. 창세기 1장에서만 9번이 나온다(1:6, 7x3, 8, 14, 15, 17, 20).
시편에서 두 번이 나온다(19:2; 150:1). 그 나머지는 오늘 말씀에만 네 번 나오고(1:22, 23,25, 26) 다니엘에서 한번 나온다(12:3). 시편 150:1절은 "할렐루야 그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 권능의 궁창에서 그를 찬양할찌어다" 라고 했다. 성소는 하나님의 보좌의 상징인 법궤가 놓여있다. 궁창은 진짜 하나님의 보좌가 놓여있는 곳이다. 그렇다면 이 네 생물들은 하나님의 보좌를 떠 받드는 가마꾼인 것이다.
하나님의 보좌가 놓여있는 평평한 판은 수정 같은 빛을 내서 심히 두려웠다고 했다. 수정이라는 말을 어떤 이들은 수정이라고 해석하고 어떤 이들은 얼음이라고 해석한다. 수정이라고 해석하는 경우는 칠십인역 구약성서에서 수정이라고 번역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말은 구약에서 모두 얼음과 관련된 말로 쓰인 말이다. 창세기 31:40에서는 추위라고 번역된 말이다. 욥기에서는 모두 얼음이라는 말로 쓰였다(6:16; 37:10; 38:29). 시편 147:17에서는 우박이라는 말로 쓰였다. 그러나 이 말이 수정이든 얼음이든 상관이 없다. 얼음이라고 하지 않고 얼음 같은 것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얼음이나 수정같이 투명한 판이 두려운 빛을 냈다는 것이다. 두렵다는 말은 구약에서 주로 하나님을 두려워할 때 쓰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 빛은 하나님의 영광의 빛인 것이다. 이 투명하고 평평한 판을 NRSV는 dome 이라고 번역했다. 창공이 dome 모양일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번역했지만 이는 하나님의 보좌가 놓여있는 판이기에 그렇게 번역하면 안된다. NRSV같은 번역을 보고 정신 나간 사람들은 UFO라고 하는 것이다.
23절은 그 창공 모양의 평평한 판 아래에는 네 생물들의 펼친 날개가 서로 맞닿아 있었다고 했다. 맞닿아 있었다는 말은 서로의 날개 끝을 향해 있었다는 뜻이지 닿아 있다는 뜻은 아니다. 이 생물들의 날개는 넷이다. 그런데 둘만 나는데 쓰이고 둘은 몸을 가리는 데 쓰였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보좌를 떠 받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 네 생물들이 나는 모양은 24절에서는 소리로 바뀐다. 그 소리는 세가지로 비유가 된다. 첫째 그 날개치는 소리가 마치 힘찬 물소리와도 같았다고 했다. 힘찬 물소리란 많은 물소리라는 뜻이다. 시편 29"3절에서도 "여호와의 소리가 물 위에 있도다. 영광의 하나님이 뇌성을 발하시니 여호와는 많은 물 위에 계시도다" 라고 했다. 또 시편 93:4절에서도 "
여호와의 능력은 많은 물소리와 바다의 큰 파도보다 위대하시니이다" 라고 했다.
많은 물들이 쏟아지는 소리는 마치 나이아가라 폭포의 소리 와도 같을 것이다. 이는 그 날개 짓들이 엄청난 힘을 낸다는 뜻이고 그 위에 앉아 계신 하나님도 엄청난 무게라는 뜻이다. 이는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영광이란 히브리어로 "카보드"인데 이 말의 본 뜻은 무겁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바라볼 때에 엄청난 무게감이 느껴지는 것이 영광이다.
둘째 그 날개 짓 하는 소리는 마치 전능하신 분의 천둥소리 와도 같다고 했다. 새번역은 RSV를 따라 천둥이라는 말을 넣은 것이다. 개역은 ESV, NASB, NIV를 따라 "전능자의 음성과도 같으며" 라고 번역했다. 개역의 번역이 조미료를 넣지 않은 담백한 맛을 담아낸다. 하나님의 음성과도 같았다는 것이다. 영광의 하나님의 보좌를 운반하고 있기에 그 날개 짓 소리도 역시 그렇게 웅장하다는 것이다.
셋째 그 날갯짓 하는 소리는 마치 "떠드는 소리 곧 군인들의 진영에서 나는 함성과도 같았다" 라고 했다. 백만대군이 몰려와서 함성을 지른다면 그 소리 보다 더 두려운 소리는 없다. 이제 성은 함락되고 모두가 다 죽임을 당할 것이고 성은 불탈 것이기 때문이다. 군인들의 함성소리는 소리 자체가 크기도 하지만 그 두려움을 표현한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느끼는 두려움이다.
많은 물소리는 자연에서 나오는 아주 큰 소리이고 두려움 보다는 장엄함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천둥소리는 그보다 더 두려움을 느끼게 하고 마지막으로 군대의 함성소리는 최고의 두려움을 느끼게 한다. 두려움의 정도가 점점 강해지는 것이다. 멈추어 있을 때는 그 날개를 드리웠다는 말은 날개를 내리고 접었다는 뜻이다.
25절은 그들의 머리 위에 있는 창공 모양의 덮개 위에서 소리가 들렸다고 했다. 하나님의 음성이다. 하나님의 음성은 네 생물들의 날개 짓에서 나오는 세단계로 점점 높아지던 두려움과 연결이 된다. 최고로 두려운 소리가 하나님의 음성인 것이다. 그런데 그 생물들이 멈추어 섰을 때는 그 날개를 내렸다는 것이다. 어째서 날개를 내리고 멈추는가? 이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그 날개 짓으로 엄청난 소리를 내면 하나님의 음성이 잘 들리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는 조용히 하기 위해 이 하나님 보좌의 가마꾼들은 멈추어 서서 날개를 내리는 것이다.
26절은 그들의 머리 위에 있는 창공 모양의 평평한 판 위에 청옥처럼 보이는 보석으로 만든 보좌 형상을 한 것이 있었다고 했다. 출애굽기 24:10절에서 모세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칠십인의 장로들이 본 것이 다음과 같이 나온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보니 그 발 아래에는 청옥을 편 듯하고 하늘같이 청명하더라." 그 위에는 사람의 모습과 비슷한 형상이 있었다고 했다. 사람이란 아담 즉 남자의 모습과도 같다는 것이다. 남자의 모습과도 비슷하다고 한 것을 보면 이는 정확히 하나님을 본 것은 아닐 것이다. 마치 구리거울로 보는 듯 희미하고 뿌옇게 보인 환상일 것이다.
27절에는 허리처럼 보이는 그 위쪽에서 금붙이의 광채와 같은 것이 불꽃처럼 안팎으로 그를 둘러싼 것을 보았다고 했다. 하나님의 상체가 아우라(aura)에 감싸여 있는 것을 보았다는 것이다. 그 허리처럼 보이는 그 아래쪽에서도 불꽃 같은 모양을 보았다고 했다. 허리 아래쪽도 불꽃같이 밝은 빛에 둘러싸여 있었다는 것이다. 에스겔은 영광의 빛으로 빛나는 하나님을 본 것이다.
28절은 하나님을 둘러싼 광채의 모양이 비 오는 날 구름 속에 나타나는 무지개와 같이 보였다고 했다. 어떤 이들은 무지개라고 하니 반원형일지도 모른다고 추측 하기도 한다(Allen, 112). 하지만 이는 무지개라는 말로 표현한 것은 모양이 아닌 색깔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된다. 하나님을 둘러싼 아우라가 단순히 밝은 빛이 아니라 오색 찬란한 무지개 같은 빛이었다는 뜻이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 모양과도 같았다고 했다.
그 모습을 보고 에스겔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다고 했다.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인식하고 그렇게 엎드린 것이다. 그렇게 나타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음성을 자신이 들었다는 것이다. 에스겔 1장은 자신이 하나님을 만났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가마꾼들인 네 생물들의 모습에서 점차 위로 올라가 평평한 판을 묘사하고 그 위에 보좌를 묘사한 뒤 보좌 위에 앉아 계신 하나님을 본 것을 묘사한 것이다. 이는 2장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니 듣고 순종하라는 뜻이다.
우리가 가진 성경 전체도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말씀하시고 기록하게 하신 말씀들이다. 말씀을 대할 때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그 음성을 듣는다는 자세로 대해야 할 것이다. 듣는 것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으면 듣지 않는 것만 못하다. 말씀 듣고 깨닫고 기뻐하는 데서 멈추면 재미있는 영화를 보고 기뻐하는 것과 다를 바가 전혀 없다. 말씀을 듣고 그 말씀으로 남을 비판하는 것은 자신을 보고 한 말씀을 남에게 돌리며 "그것 봐, 너 이렇게 하라고 하시는거야!" 라고 말하는 것과도 같다. 에스겔이 신비한 환상을 본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듣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