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39:1-10 시드기야 왕은 예레미야의 말을 듣고도 항복하지 않고 도망가다가 잡혀서 자식들이 처형되는 장면을 보고 두 눈이 뽑힌 채 끌려가게 된다.
이전 말씀에서 시드기야 왕은 예레미야를 은밀하게 불러서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를 물었고 예레미야는 전에 말한 것과 똑같이 항복하지 않으면 모두가 망하게 될 것이라고 대답했다. 시드기야는 자신의 신하들인 고관들이 두려워 예레미야에게 입을 다물라고 했다. 이제 오늘 말씀에서는 예레미야의 말을 듣지 않고 도망하다가 잡혀 눈이 뽑히는 시드기야가 나온다.
1-2절은 유다 왕 시드기야 제 구년 열째 달에 예루살렘이 포위되었고 시드기야 제 11년 넷째 달 구일에 성벽이 뚫렸다고 했다.
기원전 588년에 포위되어 587년에 성벽이 무너진 것이다. 포위된 채로 몇 개월이 있었는데도 시드기야는 항복하지 않았다. 어쩌면 시드기야는 항복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레미야를 죽이려던 신하들의 말을 듣고 항복하지 않았을 것이다. 신하들은 거짓 선지자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서 지켜 주신다고 믿었을 것이다.
3절을 보면 성벽이 뚫린 뒤에도 시드기야 왕은 즉시 잡히지는 않은 것 같다. 어쩌면 바빌로니아 왕의 고관들은 시드기야 왕을 잡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은 것 같다. 예루살렘 성을 정복하는 일이 완전히 끝났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빌로니아 왕의 고관들은 재판을 하기 위해 중앙 대문에 앉았고 시드기야 왕은 순순히 재판에 응할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만약 시드기야가 이 때라도 순순히 재판에 응하며 항복했더라면 그렇게 비참한 최후를 맞지는 않았을 것이다.
4-5절은 시드기야가 자신을 호위하는 군인들을 대동하고 밤에 몰래 도망하는 모습이다. 바빌로니아 군대가 알지 못하는 비밀 통로가 있었던 것 같다. 그 곳을 통해 요르단 계곡 여리고 쪽으로 도망한 것이다. 그러나 얼마 못 가서 여리고 평원에서 잡혀 바빌로니아 왕 앞에 서게 된다. 바빌로니아 왕은 시드기야가 도망한 것 때문에 극도로 분노했을 것이다.
6-7절은 시드기야가 재판을 받는 모습이다. 바빌로니아 왕은 시드기야의 눈을 뽑기 전 시드기야의 아들들을 시드기야가 보는 앞에서 처형했다. 그리고 나서 시드기야의 눈을 뽑았다. 소경이 된 시드기야는 쇠사슬에 묶인 채 끌려가게 된다. 예레미야가 계속해서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결과이다.
8절은 바빌로니아 군인들이 왕궁과 민가에 불을 지르고 성벽을 허물어뜨리는 장면이다. 9-10절은 농사를 지을 하층 농민들만 남겨두고 다 잡아가는 모습이다. 학자에서 기술자들까지 다 잡아가고 포도원과 농토에서 일할 농민들만 남겨 둔 것이다. 남겨둔 사람들은 바빌로니아 사람들을 위해 일을 해서 땅의 소산물을 바쳐야 하는 것이다.
오늘 말씀에서 예레미야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으면서도 실제로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하는 시드기야의 최후를 본다. 믿음이란 말이 아니라 행동이다. 야고보도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다. 시드기야가 하나님의 전적으로 믿었다면 성이 무너지기 전 몇 달 동안 기회가 있을 때 항복했어야 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면서 동시에 신하들의 말을 따르는 우유부단함 때문에 그렇게 비참한 최후를 맞은 것이다.
오늘날 우리도 중대한 선택을 해야 할 때가 자주 있다. 그러한 선택은 하나님의 말씀과 세상 사람들의 말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많은 경우 세상 사람들의 말이 더 합리적이고 내게 유익이 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불합리하게 보이기 때문에 대부분 세상의 탐욕을 따라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로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더 친한 세상에 끌려가게 되는 것이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 다른 의지할 아무 것도 없는 막다른 골목에서만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믿음이란 말로만 하나님만 의지한다고 떠드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더 좋은 길을 선택할 수 있을 때 하나님 말씀이 손해를 보는 길로 인도한다면 그 길을 따라 가는 것이 믿음이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이 옳은 길이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에 그 길로 따라 가는 것이 믿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