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4:7-8 이 보물을 질그릇에 간직하고 있는데 이 엄청난 능력은 하나님의 소유이고 우리 것이 아니며 우리는 이 능력으로 어떠한 고난에도 이길 수 있다.
이전 말씀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라는 것을 선포하고 그 분의 가르침을 따라 우리 자신을 종으로 내세우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이라 했다. 이어지는 말씀은 이 보물을 우리의 질그릇에 담았고 어떤 경우에도 낙심하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마태복음 13:44절에 보면 밭에 감추인 보화의 비유가 나온다. 예수께서는 천국을 밭에 감추인 보화로 비유했다. 보화나 보배나 보물로 번역된 말은 원어에서는 모두 같은 말이다. 당시 팔레스틴에 살던 사람들은 은행이 없고 잦은 전쟁으로 약탈 당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질그릇 항아리에 보물을 담아 아무도 모르게 땅을 파고 묻어 두었다.
오늘 말씀에서도 바울은 자기 자신을 질그릇 항아리에 비유했고 자기 안에 담겨진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을 보물이라 비유했다. 아마도 바울도 질그릇에 담아 보관하던 성경 두루마리를 마음에 두고 있지 않았나 생각도 해본다. 뜬금없이 하는 말이 아니라 쿰란 동굴에서 발견된 문서들이 항아리에 담겨있었기에 하는 말이다.
질그릇은 그릇 중에 가장 가치가 없는 그릇이다. 우리 조상들도 질그릇 항아리에 보물을 담아 땅을 파고 묻기도 했다. 하지만 또 커다란 질그릇 항아리를 땅에 묻고 그 위에 나무 판자를 놓아 화장실로 만들기도 했다. 질그릇 항아리 자체는 별 값어치가 안나가는 그릇이다. 중요한 것은 그 안에 무엇이 담겨 있느냐이다. 디모데후서 2:20절에서도 바울은 큰 집에는 금그릇 은그릇 나무그릇 질그릇들이 있는데 귀히 쓰는 그릇도 있고 천히 쓰는 그릇도 있다 했다. 그릇의 재질보다는 그 안에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보물단지도 되고 똥단지도 되는 것이다.
원어에는 7절 맨 앞에 그러나 라는 말이 있기에 6절의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을 주셨으나 라는 뜻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영광을 질그릇 안에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러나 라는 말은 우리가 갖고 있는 영광에 비해 그릇은 초라하다는 뜻이다. 이번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이 보물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보물이라는 단어는 그리스어에서 본래 귀한 물건들을 보관하는 창고나 보물을 보관하는 그릇을 뜻하는 말이다. 하나의 보물이 아니라 보물이 가득 담긴 창고나 보물이 가득 담긴 보물 상자의 그림이다.
고린도후서에서 바울은 이 보물 창고가 복음이라고 말한다. 이 보물이 하나님의 영광의 지식이 빛을 비추는 능력인데 그것이 매우 적합하지 않은 그릇 안에 담겨있다는 뜻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영광이라는 말 자체가 빛이라는 뜻이기에 그렇게 설명한 것이다. 그러나 다수는 이 빛은 그리스도의 복음이라고 말한다.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빛되신 주님을 만났고 주님으로부터 직접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을 배웠다. 그것이 바울 안에 있는 보물단지인 것이다. 사람들은 예수님께 배우지 않았기에 사도가 아니라고 공격했지만 바울은 항상 예수 그리스도께 직접 배웠다고 답변했다.
그러나 그렇게 귀한 보물상자를 깨지기 쉽고 값싼 질그릇 같은 자신의 육신에 담았다는 것이다. 그리스인들은 몸을 영혼을 담는 그릇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그런 의미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구약적 배경으로 가치없고 파괴되기 쉬운 인간 존재를 가리킨다. 여기서 그릇은 단순히 육체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그릇이라는 의미는 연약한 존재인 인간 전체를 뜻하는 것이지 단순히 영혼의 그릇인 몸이라는 뜻이 아닌 것이다.
질그릇과 같이 깨지기 쉬운 연약한 인간 존재 안에 담긴 그 보물상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곧 하나님의 영광이고 그 복음이 바로 바울 자신의 몸 안에 담겨져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인간을 지으실 때도 흙으로 지으셨다고 하셨기에 그렇게 비유했을 것이고 쉽게 죽는 연약한 존재이기에 또 질그릇이라 했을 것이다.
이러한 보물을 질그릇에 담아 주신 목적이 이어서 나온다. 그 목적은 그 엄청난 능력이 하나님의 소유이고 바울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잊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능력이라는 말이 다른 곳에서는 복음을 뜻하는 전문적인 용어이지만 이 부분의 문맥은 개인적인 고난들과 위험들을 이기게 하는 능력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바로 이어지는 8-12절에서 어떠한 고난에서도 이기게 하신다는 내용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7절 이전의 문맥을 보면 이러한 능력은 분명히 복음이다. 바울은 복음 자체에 이기게 하는 능력이 있다고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본다.
만약 우리의 육체가 금그릇과 같이 귀중한 보물이었다면 그 안에 담긴 것도 역시 우리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만약 우리가 금그릇이었다면 자신은 그 보물을 담을 자격이 있다고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쩌면 똥단지가 되었을지도 모를 그릇 안에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의 빛을 담고 있으니 절대로 그릇이 귀하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후서 12:7절에도 자고하지 않게 하려고 육체에 가시를 주셨다라고 했다. 그릇으로 비유한 바울의 육체는 참으로 보잘 것 없었던 것 같다. 수많은 핍박을 받고 깨질 위기를 여러 번 겪었지만 깨지지 않았다. 바리새인들이나 유대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그릇만 자랑했다. 왜냐하면 그 안에 똥이 들어 있기 때문에 꼭꼭 싸매놓고 뚜껑 덮은 뒤 보여주지 않고 그릇만 자랑한 것이다. 그 안에 똥과 같은 자신들의 탐욕만 가득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그들에게 회칠한 모덤이라고 하셨다. 하지만 바울은 그릇을 자랑하지 않고 그 안에 담긴 것들을 자랑한다.
그래서 바울은 8-9절에서 4쌍의 단어들을 서로 비교하고 있다. 첫번째 쌍은 사방으로 죄어들어도 움추러들지 않는다 했다. 8절 앞의 사방으로 죄어든다는 말은 마치 무장한 로마병사들이 큰 방패들을 앞세우고 사방에서 다가오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움츠러 들지 않는다는 말을 개역에서는 싸이지 않는다 했다. 이는 출구가 없이 사방이 꽉 막힌 좁은 공간에 갇힌 것을 말한다.
사방에서 방패를 든 로마의 백인대들이 포위망을 좁히며 몰아붙이지만 완전히 막힌 좁은 감옥에 갇힌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다. 사도행전 18:12-17절에 보면 고린도의 유대인들이 바울을 사방에서 포위하고 계속 몰아붙였다. 하지만 갈리오 총독은 저들의 고소를 무시했고 고소한 유대인들을 내 쫓았다. 좁은 감옥에 갇힐 뻔한 상황에서 기적적으로 구출된 것이다.
두번째 쌍은 8절 뒷부분에 있는데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답답한 일을 당한다는 말은 멀리서 본다는 말에서 온 말이다. 귀한 것을 발견했어도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면 가까이 있는 사람이 먼저 갖겠지요. 그래서 그 뜻은 잃는다는 것이다. 또 낙심한다는 말은 멀리서 바라보는 것보다 훨씬 더 멀리 있는 것이다. 완전히 시야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래서 몽땅 잃는다는 뜻이다. 바울이 위기 가운데서 하나님을 바라보았겠지요. 그런데 하나님이 너무 멀리 있는 것 같고 대적들은 가까이 있어 위기였다. 완전히 쫄딱 망할 줄 알았는데 그래도 다시 재기할 수 있을 만큼은 남아 있다는 것이다. 이것도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