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6:17-18 고린도 교회 대표로 온 세 사람들이 바울의 부족한 것을 채워주고 바울과 고린도 성도들의 영을 새롭게 했으니 이런 사람들을 알아주라.
이전 말씀에서 거룩한 자들을 섬기는 일에 자신들 스스로를 배치한 스데바나 가문과 같은 사람들에게 복종하고 함께 수고하는 사람들에게 복종하라고 했다. 이어지는 말씀은 고린도 교회 대표로 온 사람들이 부족한 것을 채워주고 영을 새롭게 했다며 이런 사람들을 알아주라고 하는 내용이다.
17절은 그러나 내가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가 온 것을 기뻐한다는 말로 시작한다. 스데바나는 1:16절에서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 침례를 주었다는 말에서도 나온다. 이 사람은 바울이 고린도에서 교회를 처음 세울 때 처음 믿은 열매이고 고린도 교회 창립 멤버가 된 사람이다. 브드나도와 아가이고는 어떤 사람들인지 알 수 없다. Thiselton은 이들의 이름이 라틴식 이름인 것으로 보아 해방된 노예일 것이라고 말한다(Thiselton, NIGTC, 1339-40).
로마제국의 상류층 사람들의 노예였다가 해방되어 식민지로 보내졌다면 고위 행정직에 오를 수는 없었지만 그 도시의 행정 실무나 재정관리등 중요한 임무를 맡는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만약 그 노예가 황제나 원로원 의원의 노예였다가 해방되었다면 황제나 원로원 의원의 대리인으로 파견되어 고린도 같은 식민지에서는 막강한 권력을 가진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일부는 속주 총독보다 더 강력한 실권을 가진 경우도 있었다. 로마 역사가 Tacitus는 이러한 해방노예들에 대해 기록했는데 그 중 Narcissus는 메살리나 사건을 폭로했고 메살리나 처형 과정에서 사실상 국가를 지휘하는 역할도 했다. 그 밖에도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들이 여럿이 있다. 따라서 이 사람들은 식민지인 고린도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사람들이었을 수 있다.
그러면 “너희의 부족한 것”이 무엇일까? 고린도 교회가 바울 곁에 없는 빈 자리를 이 세사람이 대표로 채워준 것으로 해석하며 그리움을 채워준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새번역도 너희의 부족한 것을 채워주었다는 말을 여러분을 만나지 못해 생긴 아쉬움을 채워준 것으로 번역했다. 그러나 바로 이어지는 18절을 보면 바울 뿐 아니라 고린도 성도들의 마음도 새롭게 해주었다고 했기에 단순히 그리움을 채워준 의미는 아니다.
같은 단어가 고린도후서에 네 번이 나온다(8:14*2; 9:12; 11:9). 모두 다 물질이나 실제 부족한 것을 채워주었다고 할 때 썼지 감정적인 위로를 해 주었다는 것에 쓴 경우는 없다. 8:14을 보면 지금 여러분의 넉넉한 살림이 그들의 궁핍을 채워주면, 그들의 살림이 넉넉해질 때에, 그들이 여러분의 궁핍을 채워 줄 수도 있을 것이라는 내용이다. 물론 이들은 분명히 고린도 교회를 대표해서 바울에게 온 사람들이기에 그러한 감정적인 면을 채워준 것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문맥상 그것 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고린도 교인들을 그리워하는 감정적인 결핍을 채워주었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그 이유는 이 세 사람이 고린도 교회의 대표이기 때문이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이들 세 사람을 만남으로 채워졌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그러나 부족함을 채운다는 말은 바울 서신들에서 항상 물질적인 것이나 필요한 것을 채워준다는 의미로 쓰였다. 더구나 채운다는 말은 바울서신들에서 봉사나 고난을 채운다는 의미나 맡은 사역을 완수한다는 뜻으로 쓰였고 공간을 채운다는 의미로 쓰였지 감정적 결핍을 채운다고 쓰인 예는 없다.
고린도 전서 16:17도 경제적인 궁핍함을 채워준 경우였을 가능성이 높다. 스데바나는 아마도 당시 로마제국의 신분이 높은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있기에 자신의 재물로 복음 전하던 가난한 유대인 기독교인 지도자들에게 물질로 채워주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브두나도와 아가이고도 역시 스데바나처럼 그렇게 했을 가능성은 적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 사람 모두가 필요를 채워주었다는 말을 한 것은 바울이 그들이 제공한 물질의 양을 본 것이 아니라 어려운 믿음의 형제 자매들을 도우려는 사랑의 마음을 본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것으로 볼 때 바울은 이러한 사회적 신분에 따라 교회 안에서도 존경받는 리더가 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사회적 신분이 높은 스테파나가 많은 재물로 섬겼든지 아니면 그러한 부유한 사람들에게 속해있던 사람들이 적은 금액으로 섬겼든지 섬긴 재물의 양은 달라도 함께 나누려는 사랑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 모두를 다 귀하게 여겼고 기뻐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8절이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해 준다. 18절에서 이들이 바울과 고린도 교회 성도들 모두의 마음을 시원하게 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원하게 해 주었다는 말을 표준 새번역에는 “마음에 생기를 불어넣어주었다” 라고 알기 쉽게 번역이 되어 있는데 원어에서는 영을 새롭게 했다는 말이다. 바울은 성령님의 역사를 분명히 보았기에 바울도 성령 안에서 감동을 받고 성령께서 자신을 새롭게 하는 것을 느꼈다는 뜻이다.
또 18절에서 이러한 사람들을 알아주라고 명령하고 있다. 이러한 사람들이란 말은 이 세 사람 뿐 아니라 누구든지 그렇게 다른 형제 자매를 섬기는 사람들은 누구나 알아주라는 말이다. 알아주라는 말을 감사하라는 뜻이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이런 사람들처럼 남을 섬기는 사람들을 존경하라는 것이다. 바울은 이 세사람과 같이 많은 사람들의 영을 새롭게 하는 사람들을 알아주라 했기에 단순히 세 사람을 만나서 그리움이 해소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이 말은 당시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라 여러분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만약 복음 전하는 일 때문에 경제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나 교회 안에 어려운 형제 자매들을 말없이 돕는 사람들이 있다면 누구든지 존경과 감사를 표시하라는 말이다.
세상에서는 말 잘하고 똑똑하고 능력 있고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존경받는다. 하지만 우리 주님께서 세우신 교회는 한 몸인 형제 자매의 아픔을 자신들의 아픔으로 알고 주님의 마음으로 함께 나누려는 사람들이 존경받는 곳이 되어야 한다. 돕는다는 것은 많은 물질로 돕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어려울 때 남이 도와주는 물질 자체가 큰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작은 물질도 마음이 담기면 위로를 받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부족한 것을 채우는 것은 단순히 물질로만 돕는다는 것이 아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형제자매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알고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도 다 함께 나누는 것이다. 이렇게 서로 다른 사람의 부족한 것을 채우는 사람들을 알아주고 존경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