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7:1-4 두 사람은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거쳐 데살로니가에 도착했다. 바울은 그곳 회당에서 성경을 가지고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토론하고 뜻을 풀어주고 증명하여 선포하니 유대인 일부와 많은 수의 이방인들과 적지 않은 귀부인들이 바울의 권고를 받고 설득되어 바울과 실라를 따랐다.
이전 말씀에서 그 도시의 집정관들은 두 사람이 로마사람이라는 말을 듣고 두려워하며 두 사람에게 찾아와 자신들이 직접 경호하며 데리고 나가 그 성에서 떠나달라고 사정을 했다. 두 사람은 루디아의 집에 교회로 모인 형제들을 격려하고 떠나갔다. 이어지는 말씀은 두 사람이 빌립보를 떠나 데살로니가 회당에 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자 일부가 따르고 경건한 이방인들과 귀부인들도 믿게 된 이야기이다.
빌립보를 떠난 바울 일행은 1절을 보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거쳐 데살로니가에 도착했다.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와 데살로니가는 모두 Via Egnatia 로만 하이웨이 상에 있던 도시이다. 빌립보에서 데살로니가 까지는 100마일이 넘는 거리인데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는 그 중간에 있는 도시들이다. 빌립보에서 두 도시를 거쳐 데살로니가에 이르는 거리는 30-27-35 마일이라고 한다. 대부분 말이나 나귀로 이동할 때 각각의 도시가 하루씩 걸리는 곳에 있다며 사흘 걸려서 데살로니가에 이르렀을 것이고 만약 걸어갔다면 그 이상 걸렸을 것이라 말한다. 로마로 향하는 중요한 하이웨이였기에 많은 마차들도 많이 다녔을 것이고 그러한 것들을 타고 갔을지도 모른다.
사실 암비볼리는 마케도니아 1구역의 수도였다. 그러나 대도시를 중심으로 사역하던 바울이 그 지역에서 가장 큰 도시인 암비볼리는 하룻밤 묵고 그냥 지나친 것으로 보인다. 거쳐서라는 말은 통과해서 그냥 지나갔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1절 끝부분에서 밝혀진다. 거기에는 유대인의 회당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암비볼리는 큰 도시이고 마케도니아 1구역의 수도였지만 유대인의 회당이 없기에 그냥 지나친 것이다. 아볼로니아에도 역시 회당이 없었기에 이 두 도시에서는 잠만 자고 떠났을 것이다.
바울을 이방인의 선교사라고 하지만 사실 바울은 어디를 가든지 유대인의 회당을 찾아가서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거부하고 회당에 참여하던 이방인들이 주로 믿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 뿐이다. 데살로니가에는 유대인의 회당이 있었기에 다른 두 도시는 그냥 지나친 것이다. 데살로니가는 마케도니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였다. 데살로니가는 마케도니아 제 2구역의 수도였고 로마의 지방정부가 있던 곳이다. 게다가 유대인들의 회당이 있던 곳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대도시이고 유대인들이 많은 곳이라는 바울의 선교 전략에 딱 맞는 도시였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중간에 지체하지 않고 바로 데살로니가로 갔던 것이다.
또 데살로니가는 로마 정부로부터 인정 받은 자유시였다. 자유시란 로마정부로 부터 독립국가의 지위를 인정받은 도시이다. 데살로니가의 통치자들과 시민들은 자유시로서의 특권을 누렸기에 그 자부심도 대단했다. 이들이 자유시의 시민으로써 누리던 특권과 자부심은 오늘 본문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그렇지만 그곳의 통치자들은 분명히 로마정부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 로마제국에서 특권을 부여한 것이지 저들이 힘으로 쟁취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데살로니가에서도 로마 황제를 신으로 숭배했다는 증거도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시이면서도 동시에 로마제국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에 있었던 것이다.
데살로니가전서 2:2절을 보면 바울 일행은 빌립보에서 그렇게 능욕을 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데살로니가에서 복음 전할 힘을 주셨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매를 맞고도 몸이 많이 상한 상태에서도 최대한 빠른 속도로 데살로니가 까지 갔던 것이다. 보통 학자들은 말이나 나귀를 타고 갔을 것이라고 추정을 한다. 하지만 바울 스스로 하나님께서 힘을 주셨다고 했기에 기적적으로 회복되게 하시고 그 먼 거리를 가서 전할 열정도 주신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순전히 걷는 것으로만 하루에 30마일을 이동하는 것은 어렵기에 걷다가 다른 마차들을 얻어 타고 가기도 했을 것이다.
2절에서 바울이 자기 관례대로 회당으로 들어갔다고 했다. 바울의 관례란 바울이 항상 하는 방식이라는 뜻이다. 바울을 이방인의 선교사라고 부르지만 바울은 가는 곳마다 항상 유대인의 회당을 찾아가서 유대인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했다. 그 때마다 바울이 사람들을 설득한 이 아니다. 항상 성령께서 이방인들의 마음을 여시고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이도록 하신 것이다. 거기서 세 안식일에 걸쳐서 성경을 가지고 그들과 토론을 했다. 성령께서 그렇게 하도록 인도하셨기 때문이다.
2-3절에는 바울이 복음을 전하던 절차가 자세히 나타나 있다. 첫째는 성경을 가지고 토론을 했다는 것이 그 첫 단계이다. 토론이나 강론이라고 번역된 이 말은 원어에서 서로 대화를 주고 받는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냥 서로 잡담하듯 자유롭게 성경에 대해 토론하던 방식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 말은 성경을 근거로 대화와 토론을 통해 전달하는 것을 말한다. 어떤 이들은 일방적으로 전달하던 설교 형식과는 달리 질문이 허용된 선포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는 주로 바울이 말하는 방식일 것이다. 바울이 먼저 말씀을 전하면 중간에 자유롭게 손을 들고 질문을 하기도 하고 그러면 그 질문에 답을 해주는 방식이었을 것이다. 바울이 질문을 받으며 전한 내용은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에 대해 말씀이었을 것이다. 메시야의 오심은 유대인들 모두가 간절히 기다리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둘째 단계는 원어에서 3절 첫 부분에 나오는 해석하는 단계이다. 개역개정은 "뜻을 풀어" 라고 번역을 한 말이다. 이 말의 문자적인 뜻은 완전히 펼쳐 놓는다는 뜻이다. 사도행전 7:56절에서는 하늘이 완전히 열렸다고 할 때도 이 말을 썼다. 사도행전 16:14절에서는 주께서 루디아의 마음을 완전히 여셨다고 할 때도 쓴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은 또한 누가복음 24:32절에서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이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라는 말에서도 쓰였다. 이 경우 완전히 열어 놓는다는 말을 비유적으로 사용한 것이다. 바울은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에 대한 구절을 회당에 있던 성경을 실제로 펴서 그 뜻을 자세히 풀어주었을 것이다.
셋째 단계는 증명하는 단계이다. 개역개정에는 증언이라고 되어있다. 증명한다는 말은 곁에 나란히 놓는다는 뜻이다. 증인을 찾아서 법정에 피고와 나란히 세워놓는 모습이다. 필자가 안목사이기에 목사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목사가 아니라 집사나 장로 같은 열심있는 평신도일거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럴 때 목사 안수 받을 때 찍은 사진들을 나란히 놓거나 그 때 안수 위원들을 모셔다가 제 옆에 나란히 세우면 증명이 될 것이다. 이는 예수가 메시야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앞에서 메시야에 대한 구절을 찾아서 자세히 풀어준 것 옆에 두가지를 나란히 놓은 것이다. 그 두가지는 메시야는 고난을 받고 죽는다는 것과 또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 두가지를 구약에 나온 메시야에 대한 구절들 곁에 나란히 놓은 것이다.
넷째 단계는 선포하는 단계이다. 개역개정과 새번역에는 전한다는 말로 번역되어 있다. 메시야가 고난을 받은 다음에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메시야에 대한 구절 옆에 나란히 놓은 다음에 마지막으로 바울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전하는 예수가 바로 그 메시야 그리스도라고 한 것이다.
4절은 이렇게 바울의 방식대로 복음을 전한 것에 대한 데살로니가 사람들의 반응이다. 새번역은 먼저 그 중의 몇몇 사람이 승복하여 바울과 실라를 따랐다고 했다. 몇몇 사람이란 유대교 회당 안에서 바울의 말을 듣고 있던 사람들 중에 일부분이다. 이들은 분명 유대인과 이방인들을 모두 포함하는 말이다. 개역개정은 그 몇몇 사람이 곧 헬라인과 귀부인이라는 뜻으로 번역했는데 정확하지 못한 번역이다. 절대다수는 상당수의 유대인들도 포함되어 있다는 뜻이라고 말한다.
본문은 회당에 있던 사람들 일부가 믿었는데 그들 중에는 경건한 헬라인이 많이 있었고 귀부인들도 적지 않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회당 안에 있던 유대인들이 분명히 포함된 것이다. 회당에 있던 상당 수의 사람들이 승복하여 바울과 신라를 따랐는데 그들 중에는 유대교를 따르던 이방 사람들의 비율이 높았고 귀부인들도 적지 않았다는 뜻이다.
첫째 권함을 받는다 또는 승복한다는 말은 설득을 당했다는 뜻이다. 또 따랐다는 말은 제비를 뽑아 결정된 것을 향하여 간다는 뜻이다. 말씀이 분명하게 결정해 준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의 말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무리에 가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설득되고 따라가도록 되었다는 말은 모두 수동태이다. 그 설득의 주체는 바울이 아니고 하나님이시다. 사도행전에서 계속 이끌어가고 계시는 성령 하나님이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