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5:3-6 아나니아는 그 마음의 성령님의 자리에 자신의 탐욕을 놓아서 그 마음은 사탄의 놀이터가 되었다. 그래서 아나니아는 성령님을 속이는 거짓말을 하게 되고 그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나니아를 심판하셔서 죽게 하셔서 막 생겨난 거룩한 공동체를 지키려 하셨다.
이전 말씀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요셉처럼 소유를 팔아 바치겠다 했지만 그 중 얼마를 횡령하고 나머지만 사도들의 발 앞에 내놓았다. 이어지는 말씀은 아나니아가 그 마음을 사탄의 놀이터로 방치해서 성령님을 속이는 거짓말을 하게 되고 그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나니아를 심판하셔서 죽게 하시는 내용이다.
그러자 3절에서 베드로는 "아나니아야!" 라고 부르며 어째서 네 마음에 사탄이 충만하냐는 말로 시작한다. 새번역은 "그대의 마음이 사탄에게 홀려서"라고 번역했지만 원어는 사탄이 네 마음에 충만하냐는 뜻이다. 개역은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라고 번역해서 원어에 가깝게 번역했다. 하지만 사도행전 2:2절에서는 성령께서 임하시는 소리가 온 집안에 가득했다고 할 때 쓰였다. 사도행전 13:52절에서는 성령이 충만했다는 말로 쓰였다. 4:31절에서 성령으로 충만했다는 말은 다른 단어이지만 같은 어원에서 나온 말로 5:3절에 나온 단어가 길어진 형태로 같은 말이라고 사전은 설명한다.
이어서 베드로는 성령에게 거짓말을 하고 땅 값으로부터 따로 떼어 놓았는지 책망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대조되는 것은 4:31절의 성령으로 충만하여 하나님 말씀을 담대히 말하는 성도들과 사탄으로 충만하여 성령을 속이고 거짓말을 하는 아나니아가 대조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속이고 성령님을 속인 것은 아나니아가 아니라 아나니아 안에 충만하게 있던 사탄이다.
그렇다면 아나니아에게는 죄가 없는 것이 아닌가? 아니다! 사탄이 자신의 마음에 충만하게 되도록 놔 둔 것은 바로 아나니아 자신이기 때문이다. 하와도 역시 사탄이 충만해서 하나님을 속이려 한 것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하와에게 그 책임을 물으셨다. 오늘날 우리도 역시 우리 자신이 우리의 마음을 지킬 책임이 있는 것이다. 성령님이 우리 마음 중심에 계시도록 지키는 일은 우리의 책임이다. 우리의 마음을 지키지 않고 육신의 탐욕을 따라 내버려 두어서 사탄의 놀이터가 되게 하면 안된다.
베드로가 땅 값으로부터 따로 떼어 놓았는지 책망한 말도 2절과 마찬가지로 공금을 횡령했다는 뜻이다. 이는 물질에 대한 탐욕이 문제라는 뜻이 아니다. 탐욕은 누구에게나 다 있다. 성령님에 이끌려 그러한 탐욕을 밀어내야 하는 것이다. 아나니아의 문제는 성도들에게 존경을 받기 위해 성령님을 속이고 거짓말을 했다는 데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성령이 충만하여 하나님 말씀을 담대히 전하면서 자기들의 소유도 팔아서 내놓고 있는데 아나니아는 거짓말을 하면서 하나님 앞에 내놓겠다 하여 이미 공동의 것이 된 것을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며 거짓말을 한 것이 문제였다.
그렇기 때문에 원어에서 4절은 그 땅이 머물러 있는 동안 그 땅은 그대에게 계속 머물러 있지 않았느냐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머물러 있다는 말을 분사로 또 계속해서 머물러 있다는 동사를 다시 쓴 것은 특별히 강조하는 용법이다. 땅을 판 것은 누가 강요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순전히 자발적인 것이라는 것을 강조한 말이다. 또 이어서 팔린 뒤에도 그대의 권위 안에 존재하지 않았느냐고 했다. 땅을 팔기 전이나 팔은 뒤나 그 소유권은 분명히 아나니아에게 있던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자기 소유를 자신이 떼어 일부를 갖고 나머지만 바치든 바치지 않든 그것은 아나니아의 마음에 달린 것이라는 뜻이다. 당시 교회에서 헌금은 모두가 성령 충만함을 받고 자발적으로 기쁨으로 드린 것이고 어느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따라서 베드로가 문제를 삼는 것은 자기 땅 판 돈을 자신이 가진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아나니아의 마음에 달려있는 것이고 일부만 바친다고 죄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여기서 아나니아의 문제는 다 바친다고 서약을 해 놓고는 일부만 가져와서 다 가져온 것처럼 거짓말을 한 것이었다.
원어를 보면 그래서 베드로는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 안에 놓아두었느냐고 질문을 했다. 아나니아가 사람들을 속일 생각을 놓아둔 그 자리는 본래 성령님이 계실 자리였던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어째서 성령님이 계실 그 자리에 그대의 탐욕을 놓아두었느냐고 물은 것이다. 이어서 그대는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한 것이라고 했다. 아나니아는 성도들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아나니아는 공동체 안에 임재해 계셨던 성령님을 속인 것이다. 아나니아가 거짓말을 한 것을 베드로는 절대로 알 수가 없다. 성령께서 베드로에게 알려주셨기에 베드로가 안 것이다. 아나니아는 성령님이 계신 줄 몰랐다고 할 수 없다. 아나니아도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것을 다 보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성령님께서 자신이 몰래 떼어 놓은 것을 모를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이것은 자신이 성령님보다 더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교만에서 온 것이다. 교만이란 하나님의 영인 성령님이 계실 자리에 자기 생각이 앉아있는 것이지 사람들에게 거만하게 구는 것을 뜻하는 말이 아닌 것이다.
5절에서 놀라운 기적이 일어난다. 아나니아는 이 말을 듣고 쓰러진 뒤에 숨졌다고 했다. 이것을 두고 구약성경 전체에 흐르는 한결 같은 사랑의 하나님,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과 맞지 않는다며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아니라는 사람들이 있다. 복음서에 나온 예수님도 원수까지도 용서하고 사랑하라고 하셨기에 역시 예수님의 가르침과도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따라서 이는 베드로가 한 개인적인 저주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죄책감에 스스로 충격을 받아 죽은 것이라고 의학적으로 설명하려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사도행전의 문맥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그 자리에 계셨다는 뜻이다. 거룩한 교회를 더럽히는 행위를 하나님께서는 용납하지 않으시고 심판하셔서 경고하셨다는 것이 사도행전의 문맥이다. 대부분 하나님께서 그 자리에 방문하셔서 심판하신 것으로 해석한다. 베드로는 아나니아를 저주하여 죽게 한 적이 없다. 베드로는 단지 성령께서 모든 사실을 다 알려주시고 가르쳐 주셨기에 그대로 말하고 있는 것 뿐이다. 이는 베드로 안에 충만해 계셨던 성령님께서 하신 일이다. 그렇다면 성령 하나님께서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하고 다투고는 전혀 다른 결정을 내리셨다는 뜻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이는 당시 교회가 어떤 상태였는지를 알아야 한다.
당시 교회는 하루에도 삼천명이나 늘어났지만 사실 갓난 아기 와도 같았다. 식물로 말하면 이제 겨우 싹이 돋아나 떡잎만 나온 것이다. 큰 나무의 한쪽 가지를 잘라내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안된다. 그러나 이러한 새싹은 한번 꺾으면 다시는 회복될 수 없다. 한번 꺾이는 것으로 그 새싹은 끝이 나는 것이다. 금방 태어난 아기 와도 같고 금방 싹이 튼 새싹과도 같은 상태여서 조금만 잘못하면 완전히 끝장나는 상태였다. 만약 벌레가 떡잎을 먹어버리면 그 식물은 영원히 끝장이다. 모두가 성령 충만함 받고 같은 생각을 갖고 이제 겨우 한 몸이 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사탄은 아나니아를 통해서 거짓말과 위선이라는 전염병을 퍼뜨리려고 한 것이다. 그렇게 되면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 차 있었기에 예수께서 회칠한 무덤이라 책망하셨던 유대교 공동체와 똑같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님은 그러한 전염병을 막기 위해 아나니아를 죽게 하신 것이다.
5절 끝부분에서는 "이 소문을 듣는 사람은 모두 크게 두려워하였다" 라고 했다. 개역이나 새번역 모두 크게 두려워하였다고 번역했지만 원어는 모든 듣는 사람들 위에 큰 두려움이 와 있었다는 뜻이다. 마치 허리케인이 몰고온 큰 파도가 이미 해변의 모든 지역을 뒤덮고 있었다는 것과도 같은 모습이다. 이 소문을 듣는 모든 사람들 위에 엄청난 두려움의 파도가 덮쳐왔다는 뜻이다.
두려워하였다는 말은 2:43절에서 "모든 사람에게 두려운 마음이 생겼다" 라고 할 때도 나왔다. 베드로의 가르침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발견했기에 모두가 두려워했던 것이다. 누가복음에서도 두려움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난 것을 보고 두려워할 때 썼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는 크게 두려워했다고 했기에 그 두려움은 최고조에 달한 것이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성 안에 사는 사람들 중에 이 말을 들은 사람들 위에 엄청난 두려움의 파도가 덮친 것이다. 듣는 사람들 모두 위에 큰 두려움이 덮쳐왔다는 말은 오늘 말씀의 후렴처럼 반복이 된다. 하나님의 심판의 손이 나타난 것을 보고 모두가 하나님의 심판 때문에 큰 두려움이 모든 사람들을 덮친 것이다.
6절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다. 젊은이들이 일어나, 그 시체를 싸서 메고 나가서 장사를 지냈다고 했기 때문이다. 장례를 지낼 때 이렇게 가족에게도 알리지 않고 서둘러 싸서 매고 나가 매장하는 것은 합당한 장례 절차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시체를 쌌다는 말은 유대인들의 장례 절차에 맞게 시신을 감싼 것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아무렇게나 시신을 매장했다는 뜻은 아닌 것이다. 시신만 합당한 절차로 쌌을 뿐 장례식을 하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그렇게 할 시간이 없었다. 유대교와 마찬가지로 위선이라는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퍼질 위험에 있었기 때문에 즉시 치운 것이다.
이러한 위선은 아나니아 뿐 아니라 당시 교회의 모든 사람 안에 잠재해 있었을 것이다. 오늘날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난 교회는 완전한 교회의 모델인 것처럼 생각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아나니아가 거짓말을 하고 심판을 받은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마치 수두-대상포진(Shingles)의 균인 Herpes Zoster 바이러스가 모든 사람들에게 항상 내재해 있는 것과도 같다. 면역력이 약해지만 즉시 몸에 퍼지는 것이다. 이제 막 새로 싹이 난 새싹과도 같은 거룩한 하나님의 공동체는 그렇게 되면 바로 죽게 된다. 그래서 행여나 위선이라는 바이러스가 퍼질까 하여 하나님께서 즉시 심판하신 것이고 교회의 젊은이들은 그러한 하나님의 뜻에 따라 부정한 자의 죽은 시체를 즉시 치운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는 항상 하나님 말씀을 듣고 성령님을 마음 중심에 모시고 내 생각은 곁으로 밀어내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