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1:10-14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잡은 물고기를 가져오라 하셔서 그 기적을 확인하게 하신 뒤 빨리 아침을 먹자 하시며 예수께서 직접 빵을 가져다 주시고 물고기도 역시 가져다 주셔서 섬김의 본을 보이셨다.
이전 말씀에서는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가 먼저 깨닫고 주님이시라 말하자 벗고 있던 베드로는 옷을 입고 바다에 뛰어들었고 다른 제자들은 그물을 배에 매단 채 육지에 닿아 보니 예수께서는 숯불에 물고기를 굽고 계셨고 빵도 준비해 두셨다. 이어지는 말씀은 예수께서 잡은 물고기를 가져오라 하셔서 그 기적을 직접 확인하게 하신 뒤 빵과 물고기를 제자들에게 가져다 주시며 제자들을 먹이시는 장면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의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계셨다면 그 다음에는 함께 먹자는 말씀이 나와야 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10절에서 뜻밖에도 너희가 지금 잡은 성선을 조금 가져 오라고 하셨다. 이는 예수께서 굽고 계신 생선이 부족하다는 뜻이 아니다. 제자들이 지금 막 잡은 싱싱한 생선을 좀 맛 보자는 뜻도 아니다. 생선 일부를 가져 오려면 그물 전체를 육지로 끌어 올려야 한다. 예수님은 예수님이 준비한 아침을 맛보기 전에 예수님 말씀에 순종해서 일어난 기적을 맛보게 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디베랴 바다 위에 나타나신 하나님의 영광을 확인시키려는 것이다.
11절도 원어에서는 “그러므로” 라는 말로 이어진다. 예수께서 물고기를 가져오라고 말씀하시자 이번에도 역시 베드로가 먼저 나선다. 예수께서 잡혀가실 때 칼을 휘둘렀던 사람도 베드로였다. 예수께서 잡혀갔을 때 목숨 걸고 대 제사장의 안뜰까지 잠입했던 사람도 베드로였다. 마리아가 무덤이 비어있다고 한 말에도 먼저 달렸던 사람도 베드로였다. 요한이 주님시라고 했을 때도 바다에 첨벙 뛰어 들었던 베드로였다. 그런 베드로가 이번에도 예수께서 물고기를 가져오라고 하시자 제일 먼저 일어나 배에 올라간 것이다. 베드로는 그토록 예수님을 사랑했고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려 했던 사람이다. 아직 성령을 받지 못했기에 자기 생각대로 행동했던 것뿐 베드로는 정말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려 했던 사람이다.
베드로가 배에 올라가 그물을 땅으로 끌어 올렸다. 물고기를 잡았을 때도 그물을 끌어 올릴 수 없을 만큼 무거웠던 것이다. 더구나 물 속에서는 물이 어느 정도 무게를 줄여주지만 이제 물 밖으로 끌어 내는 데는 정말 많은 힘이 필요한 것이다.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자신이 가진 온 힘을 다 써서 그물을 육지로 끌어 올린 것이다. 조금만 주춤 거렸으면 다른 제자들이 했을지도 모르는데 미련한 베드로는 그것도 모르고 혼자서 그렇게 큰 힘을 썼다. 요한은 베드로가 그렇게 주를 사랑하여 주님을 위해 그렇게 온 힘 다해 헌신했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그물 안에는 큰 고기가 백쉰세마리나 들어 있었다” 라고 했다. 이 물고기가 흔히 말하는 Nile Tilapia 라면 다 큰 것은 5파운드 정도이다. 그러면 700 파운드가 넘는 무게이다. 만약 큰 고기가 오늘날 갈릴리에서 잡히는 Biny라는 고기라면 다 자란 것은 약 13파운드가 나간다. 그렇다면 무게는 두배 정도로 늘어난다. 물론 모두가 다 그렇게 큰 것만 잡힌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153마리의 물고기는 정말 무거운 것이다. 직접 드는 것보다는 잡아 끄는 것이 힘이 적게 들기는 하지만 마찰저항이 있는데다가 해변의 경사까지 계산하면 정말 큰 힘이 필요하다. 베드로는 온 힘을 다해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한 것이다.
어째서 하필이면 153마리일까? 많은 성경 해석자들이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려 했다. 고대인들이 글자마다 숫자를 부여해서 단어를 숫자로 표현하는 경우가 있었다. 계시록의 666이라는 숫자 같은 경우 로마황제 네로의 이름을 숨기려고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153도 그렇게 수비학(Gematria)으로 해석하려고 한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요한복음은 계시록과는 달리 외부인들에 게는 숨기려고 한 것이 아니다. 모두가 말로 듣고 깨닫게 하려고 전하고 기록했던 것이기에 숫자에 특별한 의미를 숨겨 놓았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4세기에 태어난 Jerome 이라는 교부는 153에 대해 또 다른 해석을 했다. 그는 라틴 벌게이트(Latin Vulgate) 성경을 번역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이 사람은 153이 153가지의 다른 고기라며 이는 교회가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전세계적으로 전도해야 할 대상을 상징한다고 말했다. 그럴듯하지만 제롬이 있던 당시 교회 상황에 비추어 성경을 꿰어 맞춘 것이다. 제롬도 역시 자신의 시대에 맞추어 성경의 시대를 재단하는 시대착오적 오류를 범했다. 우리는 요한복음이 기록되던 당시 상황에 비추어 해석해야 한다.
그렇다면 왜 하필이면 153마리일까? 이는 분명히 일어났던 사실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만약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이 꾸며낸 이야기라면 앞에서 말한 것처럼 그 숫자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서 꾸며내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면 그렇게 특별한 의미를 가진 숫자라기 보다는 그 자리에 있던 제자들이 함께 세며 기억했던 숫자인 것이다. 실제부활하신 주님께서 보여주신 기적이고 너무나 많은 고기가 잡혔기에 그 숫자가 제자들의 마음에 깊이 새겨졌던 것이다. 이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적을 보여주신 것이 분명한 사실이라는 뜻이다.
이 숫자가 나타내는 것은 자신들의 힘과 기술로 잡으려고 할 때는 아무것도 잡지 못했는데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더니 엄청난 양이 잡혔다는 뜻이다. 이렇게 많은 양이 잡힌 것도 기적이지만 그렇게 많은 고기가 잡혔는데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은 것은 더 큰 기적이다. 식사를 시작하기 전에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이신지 분명하게 알게 하려고 기적을 확인시키신 것이다. 이 기적을 통해 예수님은 디베랴 바다 위에 나타나신 자신의 영광을 발견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제 12-13절은 예수께서 함께 식사하자고 제자들을 초청하는 장면이다. 12절은 예수께서 “와서 아침을 먹어라” 라고 하셨다. 영어 번역에는 라고 했지만 원어에는 and에 해당하는 말이 없다. 그리스어에서는 이런 경우 항상 and에 해당하는 말이 들어간다. 이를 생략한 경우는 단숨에 한마디로 서둘러 말하는 것을 나타내는 수사법이다. 이제 배가 고프니 “이리 와! 먹자!” 라고 하신 것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어부이건 농부이건 동이 틀 무렵 어두운 시각에 아침을 먹고 일하러 나갔다. 물고기를 꺼내고 세느라 이미 늦은 시각이기에 빨리 먹자는 것이다. 아직도 완전히 밝지 않은 시각에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 해변에서 배고프니 빨리 아침을 먹자고 하신 것이다.
그런데 제자들 가운데 아무도 감히 “당신은 누구십니까?” 하고 묻는 사람이 없었다며 그가 주님이신 것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기적을 보고 주님인 것을 모두가 다 알아 보았다는 것이다. 그런 기적을 행하실 분은 예수님 말고는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 모두가 다 21:1절에서 요한이 말한 디베랴 바다 위에 나타나신 하나님의 영광을 발견한 것이다.
13절에서 예수께서 가셔서 빵을 취하셔서 그들에게 주셨다고 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불을 피워놓으시고 생선을 굽던 자리에서 떨어진 곳에 계셨다는 뜻이다. 9-10절에서는 생선을 굽고 계셨다.. 그렇다면 베드로가 그물을 끌어낼 때 일어나셔서 베드로가 물고기를 세는 장면까지 보고 계셨다는 뜻이다. 제자들에게 가져오라 해도 되는데 직접 가져다 주신 것도 섬김의 본을 보여주신 것이다. 원어에서는 이어서 “그리고 생선도 똑같이 똑같이” 라고 되어있다. 생선도 역시 가서 가져다 주셨다는 뜻이다. 이는 예수께서 생명의 양식을 공급해 주시는 분이심을 나타내는 것이다. 앞으로 제자들도 예수님처럼 사람들에게 생명의 양식을 공급해 주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14절은 요한복음 기록자의 해설이다. 14절은 원어에서 “이것은 벌써 세번째이다” 라는 말로 시작한다. 이어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일어나셔서” 라고 했다. 강조점은 세번이라는 것이다. 세번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이 분명히 확실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요한복음에 나타난 것만 세어 보아도 네번째이다.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셨고 도마 빼고 10명에게 나타나셨고 나중에 도마를 포함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그러므로 네번째라고 해야 옳다.
그러나 당시 여자는 증인의 숫자에도 넣지 않았고 사람의 숫자를 셀 때도 넣지 않았다. 사람의 숫자는 오직 전쟁터에 나가 싸울 수 있는 남자 어른들만 넣었다. 따라서 요한은 증인이 될 수 있고 사람 숫자로도 들어가는 남자 제자들에게만 세번째 나타나셨다는 뜻이다. 세 번이나 나타나셨다면 부활하신 예수님의 증거는 너무나도 분명하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