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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섭 목사Dr Ahn's NT 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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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wn Word

요한복음 20:19-23

새생명을 주시며 평화를 선포하신 예수님

2024. 8. 12. · 안정섭 목사 · 요한복음 20장 강해 설교

요한복음 20:19-23 예수께서 안식일 후 첫째날 저녁에 제자들이 모여 문을 걸어 잠그고 있는 곳에 들어가셔서 평화를 선포하시고 두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며 평화를 다시 선포하시고 제자들을 보낸다며 성령 받고 죄 사함을 선포하라고 하셨다.

이전 말씀에서 영광의 몸을 입으신 예수께서는 곧 아버지께로 갈 것이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며 마리아에게 그만 만지고 가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부활의 소식을 전하라고 하셨다. 이어지는 말씀은 예수께서 사람들이 모여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 평화가 있으라 하시며 성령 받으라 하시는 내용이다.

19절은 “그 날 곧 안식일 후 첫째 날 저녁이되었을 때”라는 말로 시작한다. 예수께서 안식일 후 첫째날 새벽에 부활하셨는데 이제 그 날의 저녁 때가 된 것이다. 마리아는 그날 아침에 이미 제자들에게 자신이 주님을 보았다고 증거를 했었는데도 제자들은 아무도 믿지 않은 것이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유대 사람들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문을 모두 닫아 걸고 있었다고 했기 때문이다. 문을 닫았다는 말은 완전히 닫았다는 뜻이다. 유대사람들이란 대제사장들과 산헤드린 공회원들을 뜻한다. 자신들도 그들에게 예수님처럼 죽을까 하여 모두 함께 모여 문을 완전히 걸어 잠그고 숨어서 떨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대다수의 신약성서 학자들처럼 21:8절에서 요한이 믿었다면 그의 증거를 들은 제자들이 문 잠그고 숨어 있을 리가 없다. 오천명을 먹이시고 소경도 눈을 뜨게 하시고 죽은 사람도 살린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분명히 들었고 그 증거도 보았다면 두려울 것이 없어야 했다. 제자들은 마리아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기에 문을 걸어 잠그고 숨어 있었던 것이다. 제자들은 모두 빈 무덤을 보고 옷이 그대로 놓여있고 몸만 빠져나간 것과 같은 그 빈자리를 확인하고 온 베드로와 요한도 그 자리에 있었는데도 마리아의 말을 믿지 않았다.

제자들은 유대사람들이 무서워 문을 닫아 걸고 있었다는 말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어떤 분이셨는지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머릿수건과 수의를 그대로 통과하신 예수님께 걸어 잠근 문은 아무런 장애물이 될 수 없었다는 뜻이다. 걸어 잠근 문도 통과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와서 그들 가운데로 들어 가셔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말씀하셨다. 평화란 본래 이스라엘 사람들이 흔히 쓰던 인사말이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단순한 인사말이 아니다.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평안한 마음을 가지라고 하신 것이다. 하지만 예수께서 선포하신 평화는 그러한 의미를 넘어서는 의미도 갖고 있다.

예레미야를 보면 예수께서 말씀하신 평화의 뜻을 이해할 수 있다. 예레미야 28장에 보면 하나냐라는 예언자가 하나님께서 바벨론 왕을 꺾고 잡혀간 포로들을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고 예언하는 내용이 나온다. 이를 들은 예레미야는 자신도 그러면 오죽이나 좋겠느냐며 28:9절에서 “평화를 예언하는 선지자는 그 예언자의 말이 응한 후에야 그가 진실로 여호와께서 보내신 선지자로 인정 받게 되리라” 라고 했다. 하나냐가 평화를 예언했지만 그 평화는 거짓 평화라는 뜻이다.

예레미야가 말하는 평화는 죄로 말미암아 멀리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끌려간 사람들이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해 주시는 것이다. 그러면 다시 하나님과 평화의 관계가 되어 다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도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죄의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을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게 하신 것이다. 이것은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동이 튼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 가운데 서셔서 평화를 외치고 계신 것이다. Kruse는 제자들의 실패를 마음에 두지 않으시고 관계 회복을 제시하신 것이라고 했다(Kruse, 374).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배반하고 믿지도 않던 제자들을 용서하시고 예수님과의 평화 곧 하나님과의 평화를 선포하신 것이다.

이러한 평화를 선포하신 후 20절에서 예수님은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주셨다고 했다. 그 평화는 예수께서 구약의 예언대로 십자가에 달리셔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두 손과 옆구리를 그 증거로 보여주신 것이다. 이는 또한 문이 잠겼는데도 제자들 앞에 나타나신 예수님이 단순히 영이나 허상이 아니라는 증거를 보여 주신 것이기도 하다.

제자들은 주님을 보고 그 보여주신 증거를 보고 기뻐하였다. 이는 16:20-24절의 성취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서 제자들이 근심에 싸이겠지만 예수께서 제자들을 다시 볼 때에는 기쁠 것이며 그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다고 했다. 그 예언대로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그 손과 옆구리도 확인하고 모두가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기쁨으로 기뻐했던 것이다.

21절은 원어에서 “그러므로” 라는 말로 시작한다. 모두가 예수님을 보고 기뻐하였으므로 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또 다시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빈다” 라고 하셨다. 이제 하나님께서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게 하실 것이고 하나님과 평화의 관계가 되어 하나님을 경배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놀라운 축복을 다시 확인하듯 선포하신 후에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고 하셨다. 이제 제자들도 사람들에게 나가서 하나님과의 평화를 선포하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게 하시려고 제자들을 부르셨다는 것이다.

이렇게 제자들을 파송하신다고 하시면서 22절에서는 그들에게 숨을 불어 넣으시고 말씀하셨다고 했다. 하신 말씀은 “거룩한 영을 받으라” 라는 것이다. 숨을 불어 넣으신다는 말은 창세기 2:7절에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었다는 말과 연결되는 말이다. 예수님은 이제 제자들을 새로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셔서 새 생명이 되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신 말씀이 “성령 받아라” 라는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사도행전 2장에서는 예수께서 승천하시고 난 뒤 오순절에 제자들이 모인 곳에서 성령을 받았다고 했는데 요한복음에서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직후에 성령을 직접 주셨다고 한 것이다. 또 문제는 요한복음 16:7절에서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라고 한 것이다. 예수께서 떠나가지 않으셨는데 성령을 받으라고 하신 것이 앞뒤가 맞지 않는다.

하지만 예수께서 성령을 받으라고 하신 말씀은 그 자리에서 당장 받으라는 뜻이 아니다. 만약 그 자리에서 당장 성령을 받았다면 바로 이어서 즉시 나타난 변화를 말했을 것이다. 요한복음 7:38절에 보면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오리라” 라고 했다. 이어서 39절에서는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라고 했다.

그렇다면 성령을 받은 제자들의 배에서도 생수의 강이 흘러나왔어야 했다. 제자들이 만약 성령을 받았다면 걸어 잠근 문을 열고 나가서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알리고 생수 같은 성령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흘러가게 했어야 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세상에 보낸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26절에 보면 일주일 후에도 제자들은 여전히 문을 잠그고 숨어 있었다. 성령 받고 세상으로 보냄을 받았는데도 계속 문을 잠그고 숨어 있었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를 사도행전에 나오는 성령강림과 분리해서 설명한다. 23절과 연관해서 죄사함을 선포하신 것으로 해석하기도 하고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것이고 앞으로 다가올 성령강림을 예고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또 여기서는 일부 제자들에게만 개인적으로 주신 것이고 사도행전에서는 공식적으로 모든 제자들에게 성령 주신 것을 나타낸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다수의 학자들의 의견은 두가지로 요약이 된다. 어떤 이들은 앞으로 성령을 받고 말씀을 증거할 것을 예고하는 상징적인 행동이라며 성령을 보내는 주체가 예수라는 것을 알리는 것으로 해석한다. 또 다른 이들은 창세기 2:7절에서 생명을 불어넣는 것과 에스겔 37장에 나오는 죽은 자들에게 새 생명을 주는 것과 연관해서 해석하며 이제 제자들은 새로운 생명을 받은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새 생명을 준다는 것은 분명히 상징적인 것이다. 새 생명을 얻고 영원한 몸으로 부활하는 것은 나중에 요한계시록에서 마지막 때에 완성되는 것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버지께서 예수를 보내신 것처럼 예수께서도 제자들을 보낸다는 말도 당장 보낸다는 말이 아니다. 또 성령 받으라는 말은 당장 받으라는 뜻이 아닌 것이다. 앞으로 제자들은 성령을 받고 세상으로 보냄을 받을 것이라는 뜻인 것이다. 제자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신 것은 성령을 보내시는 주체가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신 행동이라 할 수 있다. 23절을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23절은 당장 일어난 변화가 아니라 앞으로 성령을 받으면 일어날 변화를 말씀하신 것이다. 23절은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 죄가 용서될 것이요 용서해 주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있을 것이다” 라고 했다. 카톨릭 교회에서는 이 구절을 가지고 사제에게 죄를 고백하면 사제가 하나님을 대신해서 그 죄를 용서해 줄 수 있다고 해석한다. 하지만 이는 요한복음 7:38절에서 성령 받은 제자들의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온다는 말을 근거로 해석해야 한다.

죄를 용서한다는 것은 죄를 깨끗이 씻어 준다는 것이다.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자신들의 배에서 흘러나오는 생수의 강으로 다른 사람들의 죄를 깨끗하게 하는 것이다. 성령 받은 제자들이 나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전하면 제자들과 함께 계시던 성령께서 강물처럼 흘러서 듣는 자들을 그 성령의 강물에 빠지게 하신다는 뜻이다. 그것이 바로 죄를 용서하는 것이다. 또 성령님과 함께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으면 생수의 강이 흘러 나가지 않기에 사람들의 죄가 그대로 있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죄가 용서된다는 것은 제자들이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뜻이다. 죄를 용서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고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죄사함의 은혜를 주는 성령님과 함께 선포해야 한다는 뜻이다. 앞으로 성령을 받으면 그렇게 된다는 뜻이다. 그런데 제자들은 아무것도 안하고 계속 그대로 문을 잠그고 있었기에 아직 성령을 받았다는 뜻은 아닌 것이다. 로만 카톨릭에서는 죄사함의 권세를 교회와 사제들이 가졌다고 말하지만 오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선포될 때 믿는 자들 안에 있는 성령께서 그 권세를 행하신다는 뜻이다. 그 권세는 교회나 사제가 가진 것이 아니라 말씀이 갖고 있는 권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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