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6:16-22 예수께서 제자들이 조금 있으면 예수님 자신을 보지 못할 것이고 조금 있으면 볼 것이라고 하시자 제자들이 그 뜻을 몰라 수군거리자 예수께서 출산이 임박한 산모의 근심과 출산 뒤에 기뻐하는 산모의 기쁨으로 비유하시며 부활의 주님을 만난 기쁨은 아무도 빼앗을 수 없다고 하셨다.
이전 말씀에서 예수께서는 더 이상 말씀하신다 해도 제자들이 감당할 능력이 없다 하시며 성령께서 오시면 제자들을 진리의 길로 인도하실 것이고 예수님께 들은 것만 받아서 알려주시고 앞으로의 일도 알려주심으로 예수님을 영광되게 하실 것이라며 아버지의 것이 모두 예수님 자신의 것이라고 하셨다. 이어지는 말씀은 예수께서 자신의 죽으심과 부활을 알 수 없는 말로 전하시고 제자들이 수군거리자 산모의 근심과 기쁨에 비유하며 제자들의 기쁨은 영원한 것이라고 하는 내용이다.
16절에서 예수님은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볼 것이라고 하셨다. 원어에서 앞에 나온 보지 못한다는 말과 뒤에 나온 본다는 말은 서로 다른 말이다. 앞에 나온 말은 본래 원형 경기장 같은 곳에서 올림픽 경기 같은 것을 많은 사람들이 모여 구경한다는 뜻이다.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들을 구경할 때 많이 쓰였다. 보지 못한다는 말은 육신의 예수님과 함께 지내며 바라보지 못한다는 뜻이다. 이제 곧 십자가에 달려서 돌아가실 것이기 때문이다. 또 조금 있으면 볼 것이다 라는 말은 요한복음에서 주로 하나님이나 인자나 하나님과 관련된 신비한 광경을 본다는 경우에 주로 쓴 말이다. 이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게 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17절을 보면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게 무슨 뜻인지 서로 수군거리고 있다. 제자들 중에 한 사람이 말했다는 것은 한 사람이 대표로 말했다는 뜻이지 다른 제자들은 다 이해했다는 뜻은 아니다. 제자들은 16:16절의 내용 뿐만 이해 못한 것이 아니다. 16:10절에서 말씀하신 내가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에 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도 궁금하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18절은 그러므로 라는 말로 시작한다. 16:10절과 16:16절의 말씀을 이해 못하겠다고 했으므로 다른 제자들도 받아서 수군거리고 있는 것이다. 제자들이 궁금해 하는 초점은 “조금 있으면” 이라는 말에 있다. 이는 예수님께 질문한 것이 아니고 자기들 끼리 수군거리며 주고 받은 말이다. 19절을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이 궁금해 하는 것이 무엇인지 다 아셨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내가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게 되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볼 것이다” 라고 한 말을 가지고 서로 논의하고 있느냐고 하셨다.
20절에서는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라고 하시며 말씀을 시작하셨다. 이는 반드시 기억해야 할 진리를 증거하실 때 쓰시는 공식과 같은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비유로 알쏭달쏭하게 대답해 주셨다. 예수님의 대답은 “너희는 울며 애통하겠으나” 이다. 운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기에 슬퍼서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애통한다는 말은 장례식장에서 곡조에 맞추어 곡을 하거나 장송곡을 부르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슬퍼서 눈물을 흘리는 모습과 슬픔을 소리로 표현하는 장면을 나타낸 말이다.
그러나 슬피 울며 장송곡을 부르는 제자들과는 달리 세상은 기뻐할 것이라는 것이다. 역시 세상은 믿지 않는 모든 세상 사람들이 아니라 유대교 지도자들이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자기들의 죄를 지적하며 책망하던 예수님이 죽었기 때문이다. 이젠 자기들 마음대로 계속 거룩한 척하는 놀이를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 이어지는 “그러나 너희는 근심에 싸여도” 라는 말은 슬퍼한다는 뜻인데 기뻐한다는 말의 반대말이다. 제자들의 슬픔을 세 단계로 말씀하신 것이다. 소리없이 눈물을 흘리다가 소리내어 곡을 한다. 그러나 그 마음에 슬픔은 가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돌아가신 분에 대한 그리움과 쓸쓸함 때문에 견딜 수 없는 가슴을 저미는 듯한 슬픔에 잠기는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은 슬픔에 잠긴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의 그 슬픔은 곧 기쁨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21절은 슬픔이 기쁨으로 변하는 것을 해산의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다. 여자가 해산할 때에는 근심에 잠긴다. 진통할 때가 왔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여기서 근심이라는 말도 역시 슬픔이라는 말이다. 고대의 해산은 거의 죽음의 고통이다. 이사야 26:17절에서도 “여호와여 잉태한 여인이 산기가 임박하여 산고를 겪으며 부르짖음 같이” 라고 했다. 자신들의 고통을 해산의 고통에 비유한 것이다.
이어서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 때문에 그 고통을 더 이상 기억하지 않는다” 라고 했다. 해산의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은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고통보다 아이를 바라보고 품에 안는 기쁨이 훨씬 크기에 고통을 잊는 것이다. 또한 해산의 고통은 짧지만 아이를 바라보고 기뻐하는 것은 평생이기에 또한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비유로 말씀하신 뒤 22절에서 비유의 뜻을 설명해 주신다. “이와 같이 지금 너희가 근심에 싸여 있지만 내가 다시 너희를 볼 때에는 너희의 마음이 기쁠 것이며” 라고 하셨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잃고 슬퍼할 시간이 가까웠다는 것이다. 마치 해산할 시간이 가까운 산모와도 같이 불안하고 고통스러운 상태라는 것이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다시 만나 주실 때는 자신이 낳은 아이를 품에 안고 있는 것처럼 제자들의 마음이 기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기쁨을 너희에게서 빼앗을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만약 아이를 낳은 엄마가 아이를 잃어버린다면 큰 슬픔이다. 만약 모세가 태어났을 때처럼 아이를 강제로 빼앗아 죽인다면 그 슬픔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것이다. 기르던 개나 고양이만 잃어버려도 그 슬픔은 감당하기 어려운 법이다. 그렇다면 기쁨을 빼앗을 사람이 없다는 말은 아무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제자들에게서 빼앗을 사람이 없다는 뜻이다. 부활하신 영광의 주님은 영원히 제자들과 함께 하시며 영원한 기쁨이 되시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