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3:1-5 하나님의 모든 권한과 능력을 다 가지신 예수께서는 모든 것을 다 아시고 자신이 아버지께로 돌아갈 때가 된 것도 아시면서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 노예처럼 옷을 다 내려 놓으시고 수건을 두르신 뒤 자신을 배반할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다.
이전 말씀에서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을 그대로 전하여 주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시려는 것이라며 때가 되면 그 말씀들이 심판할 것이고 그 말씀들이 곧 영생이라고 하셨다. 이어지는 말씀은 예수께서 아버지께로 가야할 때가 된 것을 아시고 제자들을 마지막으로 가르치기 위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내용이다.
1절은 유월절 전이라고만 했기 때문에 언제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예수께서는 자기가 이 세상으로부터 나가서 아버지를 향해 가야 할 시간이 된 것을 아셨다고 했기 때문에 분명한 것은 이제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아신 것이다. 아셨다는 말은 완료형이기에 통찰력과 예지력으로 자신이 고난 받으실 때를 완전하고 분명히 아셨다는 뜻이다.
바로 그 마지막 때가 된 것을 아시고 세상 안에 있는 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했다 끝까지 사랑하셨다 라는 말은 영어의 NIV나 NLT처럼 최고로 사랑하셨다 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공동번역도 이 영어 번역들과 같이 “극진히 사랑해 주셨다” 라고 번역했다. 이는 끝까지 라는 말을 최고로 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고 동시에 죽는 순간까지 라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대부분 끝까지 라는 말을 그 사랑의 크기나 범위를 뜻하는 말로 해석한다.
그러나 완전히 라는 뜻이 문맥상 이상한 것은 아니지만 이 구절에서 초점은 예수님의 죽음의 시간에 있다. 이 두가지 의미를 다 포함할 수 있지만 그의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라는 의미가 일차적인 의미이다. 최고로 사랑하셨다고 해석하는 것이 그 사랑을 깊이 느끼게 하는 참 아름다운 번역이지만 원어의 의미와 문맥을 보면 마지막 죽는 그 순간까지 사랑하셨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 옳다. 이 말은 요한복음 외에 신약성경 다른 곳에서 다섯번이 나오는데 모두 다 마지막 순간까지 라는 뜻으로 쓰였다.
실제로 요한복음 19:25-27에 보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세상에 있는 육신의 어머니와 사랑하는 제자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모습이 나온다. 마지막 순간에도 어머니를 부탁하고 가셨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셨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끝이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예수께서 몸소 보여주신 것인 것은 분명하다.
마지막 순간까지 제자들을 사랑하신 모습이 이어진다. 2절은 저녁 먹을 시간이 되자 마귀가 이미 유다의 마음 안에 완전히 던졌다고 했다. 마귀가 이미 시몬 가룟의 아들 유다의 마음 안에 완전히 던져 넣은 것은 예수를 넘겨주는 것이다. 원어에서 2절은 완전히 끝난 문장이 아니고 계속 이어지는 문장이기 때문에 다음 문장과 연결해서 읽어야 한다.
3절은 원어에서 “완전히 아시고” 라는 말로 시작한다.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완전히 다 아신 것이다. 그러나 3절에서 아신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두 가지가 나온다. 첫째 아시는 것은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권한을 전부 다 예수님 손에 맡기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유다가 자신을 팔지 못하도록 막을 수도 있으셨고 더 나아가서 사탄을 완전히 끝장낼 권한도 있으셨다는 것이다. 모든 일어날 일도 다 아셨고 그것을 막을 모든 권한도 다 가지고 계셨다는 것이다.
둘째로 아시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일어날 일을 다 아셨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자신에게 맡기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아시는 것은 이러한 하나님의 모든 권한을 다 가지신 분께서 이제 아버지께로 돌아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도 다 아셨다는 것이다. 이 말은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의 존재와 영원하신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광범위한 차원을 묘사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 복음서를 받던 이들에게 삶에 대한 하나님의 영역을 되새기게 하는 것이다. 우리도 역시 때가 되면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하는 존재인 것이다. 3절도 역시 끝이 나지 않고 4절과 연결되는 것이기에 “다 아시면서” 라고 해야 한다.
사탄이 유다에게 생각을 완전히 넣었고 이 모든 것을 다 아시면서 하신 일은 4절에 나온다. 그것은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셨다는 것이다. 2-3절의 내용들을 다 아시면서 이제 예수님은 드디어 식탁에서 벌떡 일어나셨다는 것이다. 이 순간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는 놀라운 일을 하실 것이라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놀라운 반전이 일어난다.
모든 권한을 다 가지신 예수님께서 마지막 순간에 하신 일은 겉옷을 벗으신 것이다. 원어는 겉옷 하나가 아니라 옷들을 내려 놓았다고 되어 있기에 겉옷만 내려놓으셨을 수도 있지만 옷들을 다 내려놓았을 수도 있다. 대부분은 겉옷만 내려놓고 속옷은 입었다고 해석한다. 내려 놓았다는 말은 10:18절에서 스스로 목숨을 버린다고 할 때도 나온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수의 주석가들은 옷들을 내려 놓는다는 말은 앞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암시적으로 드러낸 말로 해석한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처럼 옷들을 내려 놓으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어서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셨다” 라는 말에 주목해야 한다. 여기서 수건이라는 말은 신구약 성서 전체에서 오늘 본문에서만 나온다. 이는 오늘날 손과 발을 닦는 수건이 아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뒤 그 수건으로 발의 물기를 닦아주기 위한 것만이 아니다. 1세기 로마의 역사가 Suetonius의 글에도 이러한 장면은 노예가 일을 하려고 할 때의 차림이라 했다(Suetonius, Calig, 26).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자유민임을 나타내는 자신의 옷들을 다 내려놓으시고 노예가 일할 때 입는 옷차림을 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발을 씻기는 그림을 보면 대부분 옷을 입으시고 수건을 두른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사실은 옷들을 다 벗고 수건만 두르셨을 가능성이 더 높다. 예수께서는 이제 옷들을 내려놓으시고 발 씻기는 노예의 모습으로 분장하신 모습이다. Wisconsin Lutheran College에 있는 Divine Servant Statue를 보면 옷을 다 벗고 수건을 두른 채 발을 씻기는 모습이다. 그냥 순종하는 제자들을 씻기기 위해 노예의 모습을 하셨다 해도 충격적인데 자신을 팔아 넘길 유다까지 있는데 완전한 노예의 차림으로 그렇게까지 하셨다는 것은 더욱 더 충격적이다.
고대 그리스-로마 세계에 살던 사람들이나 히브리사람들이나 당시 세계에서 절대로 해서는 안될 금기가 있다. 그것은 식사 자리에 초대를 해준 주인을 그 식탁의 자리에서 배신하는 것이다. 만약 누군가 식사 자리에서 주인을 배신했다면 천인공노할 범죄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 식사자리를 마련했다. 그런 자리에서 제자인 유다가 주인이신 예수님을 배신한다는 것은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동물들도 밥을 주는 주인에게 감사를 표현하기 때문에 이는 짐승만도 못한 행위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권세를 다 그 손에 맡기셨다면 그런 상황에서 누구나 분노를 터트리며 즉시 벌을 내렸을 것이다. 그런데 모든 권한 다 받으신 예수님은 분노를 터트리며 벌을 내리는 대신 옷을 벗고 수건으로만 가린 채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노예가 되신 것이다. 7절을 보면 유다 뿐 아니라 베드로까지도 예수님을 배신할 것이 암시되어 있다. 제자들이 배신한다는 것을 아시고도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그 순간까지 인내하시며 종의 모습으로 제자들을 사랑하신 것이다.
5절에 보면 “그리고 대야에 물을 담아다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른 수건으로 닦아 주셨다” 라고 되어 있다. 예수님은 노예의 모습만 흉내내는 노예놀이를 하신 것이 아니다. 가장 낮은 노예가 아니면 절대로 해서는 안될 발을 씻기는 일을 하신 것이다. 유다 뿐 아니라 모든 제자들이 다 배신할 것을 아셨으면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종의 모습으로 자신을 낮추시며 사랑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교회에서 작은 일로 섬기고 사람들이 인정해 주지 않는다고 마음 속으로 불만을 품으면 안된다. 누가복음 17-10절에서 예수께서도 밭에서 일하고 돌아온 종에게 앉아서 먹으라 하지 않고 주인의 밥을 차려 낸 뒤에 먹으라고 한다고 하셨다. 우리도 일을 한 뒤에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해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고 해야 한다고 하셨다. 교회의 모든 문제는 섬기고 봉사한 뒤 인정을 받으려는 것에서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