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1:21-24 마르다는 예수께서 함께 계셨더라면 나사로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자 예수께서는 나사로가 살아날 것이라고 하셨다. 하지만 마르다는 부활에 관해서는 자신의 가문을 통해 배운대로 마지막 때의 부활을 믿는다고 대답하는 내용이다.
이전 말씀에서는 예수께서 예루살렘 근처의 베다니에 있는 나사로의 집에 도착했을 때 이미 장사지낸지 나흘이 지난 뒤였고 예수께서는 사람을 보내 자신의 도착을 몰래 알리셨다. 그 자리에는 예수님의 대적인 예루살렘의 유대 사람들이 많이 와 있었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말씀은 마르다가 예수님이 함께 계셨더라면 나사로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고 예수께서 다시 살아날 것을 말씀하시자 마지막 때 다시 살아날 것을 안다고 대답하는 내용이다.
21절도 원어에는 ‘그러므로’ 라는 말이 있다. 마르다가 몰래 나가서 예수님을 만났으므로 라는 뜻이다. 21-27절은 마르다가 장례식에 참석한 친척들과 친지들들 모르게 예수님을 만나 대화하는 장면이다. 마르다는 예수님께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주님, 주님이 여기에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을 것입니다.” 이러한 마르다의 말에 대한 해석은 두가지로 갈린다. 일부는 왜 늦게 왔느냐는 불평이나 책망이 담긴 표현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대다수는 불평이나 책망이 아니라 슬픔과 믿음의 표현으로 해석한다.
문맥을 보면 예수께서 함께 계셨더라면 나사로는 죽지 않았을 것이라는 표현은 왜 늦게 오셨느냐는 불평이나 책망이라기 보다는 슬픔의 표현이고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의 표현으로 보는 것이 옳다. 마르다는 예수님의 능력을 믿은 것이다. 그러나 기적을 보고 그 능력을 믿는 것은 완전한 믿음이 아니라 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을 믿지 않는다고 하셨다. 요한복음을 처음 듣던 사람들은 마르다의 믿음이 아직 부족하다고 판단하며 들었을 것이다.
마르다의 믿음에 대한 이러한 반전이 22절에서 일어난다. 마르다는 “그러나 이제라도 나는 주님께서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하나님께서 다 이루어 주실 줄 압니다.” 라고 했다. 마르다는 단순히 기적을 행하는 능력만 믿은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달라고 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뭐든지 다 들어주신다는 뜻이다. 27절과 연결해서 읽어보면 마르다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사랑받는 아들이라는 것을 믿는다는 뜻이다. 이제 요한복음을 처음 듣던 당시 사람들은 깜짝 놀랐을 것이다. 자기들의 판단이 틀렸다며 대단한 믿음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이러한 신앙고백에 대해 예수님은 23절에서 “네 오라버니가 살아날 것이다” 라고 대답하셨다. 이는 22절에서 마르다가 고백한 것에 대한 대답인 것이다. 마르다가 가만히 있었다면 요한복음을 처음 듣던 사람들은 모두 마르다의 믿음을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24절에서 마르다가 대답한 말은 또다시 새로운 반전이다.
마르다는 “마지막 날 부활 때에 그가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내가 압니다” 라고 대답했다. 언뜻 생각하면 바른 믿음인 것 같지만 이러한 고백은 사실 예수님과는 상관없는 고백이다. 다수의 주석가들은 이러한 믿음은 당시 바리새파 사람들의 믿음이라고 해석한다. 39절에 보면 마르다는 죽은지가 나흘이나 되었다고 말하며 부활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한 것을 볼 때도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아니라 바리새파들의 부활신앙이 분명하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으나 바리새파 유대인들은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면 신실한 사람들이 부활한다고 믿었다. 이러한 대답으로 볼 때 마르다는 바리새파 유대인 가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수님께 배운 믿음을 말한 것이 아니라 어려서부터 바리새파의 가르침을 배운 것을 토대로 말한 것이다.
오늘 말씀은 예수께서 마르다에게 나사로가 살아날 것을 말씀하셨지만 마르다는 바리새파 신앙에 근거하여 마지막 때 하나님 나라가 임하면 그 때 살아날 것이라고 말하며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장면이다. 부족한 믿음이지만 예수께서는 인내하시며 말씀과 증거를 통해 가르치신다. 그렇게 해서 믿음이 점진적으로 완성되어가는 것을 이어지는 내용을 통해 볼 수 있다. 우리 역시 사람들의 믿음이 부족하다고 함부로 정죄하기 보다는 우리 주님처럼 말씀으로 가르치고 우리의 삶에 나타난 증거를 보여주며 우리를 통해 점진적으로 예수님을 완전히 알아가도록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