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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섭 목사Dr Ahn's NT 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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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1:15-16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제자들

2024. 4. 20. · 안정섭 목사 · 요한복음 11장 강해 설교

요한복음 11:15-16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믿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에 예수께서 유대지방에 계시지 않은 것을 기뻐한다고 하시며 그에게 가자고 했는데 도마는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죽으러 가신다고 생각하고 함께 죽으러 가자고 했다.

이전 말씀에서 예수께서는 나사로가 죽었다는 것을 전지하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아시고 잠들었으니 깨우러 가자고 하셨지만 제자들이 알아듣지 못하자 나사로가 죽었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이어지는 말씀은 예수께서 이 일로 제자들이 믿게 될 것이라고 하며 나사로에게 가자고 하시자 도마는 함께 죽으러 가자고 하는 내용이다.

원어에서 15절은 “그래서 내가 기쁘다 너희 때문에” 라는 말로 14절에서 나사로가 죽었다는 말과 이어진다. 그렇다면 나사로가 죽은 것이 제자들 때문에 기쁘다는 뜻이 된다. 원어에는 그 말에 이어서 “그 결과 너희가 믿게 될지도 모른다. 내가 거기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라는 말로 예수께서 기쁘신 이유를 설명하는 내용이 나온다. 개역이나 새번역이나 대부분의 영어 번역들은 “내가 거기에 있지 않은 것 때문에” 라는 말을 앞으로 끌어내어 번역했다. 만약 원어의 어순 그대로 14절과 연결하여 번역한다면 제자들 때문에 나사로의 죽음을 기뻐한다는 뜻이고 예수님이 인정도 없는 차가운 분으로 오해될 수 있기에 이렇게 어순을 바꿔 번역한 것이다.

그러나 원어의 어순을 보면 분명히 예수께서는 나사로의 죽음과 연관해서 제자들 때문에 기뻐한다는 뜻이다. 예수께서 거기에 있지 않았기에 너희가 믿게 될지도 모른다고 이어서 그 의미를 설명한 것이다. 원어는 분명히 예수께서 거기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제자들이 믿을 지도 모른다는 것에 초점이 있다. 예수께서 제자들 때문에 나사로의 죽음을 기뻐한다는 의미이다. 예수께서 유대지방에 계시지 않고 멀리 외딴 곳으로 떠나온 것이 제자들이 믿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은 두가지로 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만약 예수님이 유대지방에 계속 계셨더라면 틀림없이 마르다네 집에서 머무셨을 것이다. 그러면 나사로가 아픈 것을 제자들이나 예수님이나 다 알았을 것이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유대 사람들의 영향력이 미치지 못하는 먼 곳에 떨어져 있기에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살아 있는 것이나 죽었다는 것을 예수님만이 아시게 된 것이다. 이를 통해 예수께서 본래부터 갖고 계신 어디에나 계시고(omni-present)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전지하신(omni-scient) 하나님의 속성들을 제자들이 알고 믿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또 한가지는 예수님이 나사로와 함께 있었다면 아픈 나사로를 치료해 주었을 것이고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omni-potent)을 목격하지 못했을 것이다. 양들을 진정으로 사랑하시는 무한히 자비하신(omni-benevolent) 분이시라는 것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나사로가 죽었다는 것을 아시고 말씀하시면서 기뻐하시는 예수님의 태도는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이해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친구이고 함께 사랑하는 나사로가 죽었는데 기쁘다고 하시니 말이다.

요한은 이를 통해 예수께서 하나님의 모든 속성을 가지신 분이라는 것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은 것에 초점을 맞추고 슬퍼하지 않으시고 제자들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가르칠 기회가 생겨 기뻐하고 계신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 안에 하나님의 모든 속성이 있다는 것이 제자들에게 드러날 것이고 제자들이 믿게 될 것이기에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는데도 기뻐하신 것이다.

다음에 이어지는 18절과 39절에 보면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나 되었다고 했다. 심부름꾼이 2-3일 걸려서 예수님께로 갔을 때도 살아 있었는데 이틀이나 더 지체했고 예수님과 제자들이 베다니까지 가는데도 최소한 이틀은 걸렸기에 죽은지 나흘이나 된 것이다.

어째서 나흘일까? 예수님은 나사로가 언제 죽었는지도 다 아셨다. 그런데도 죽은지 이틀이나 사흘이 지난 때에 도착하려고 서둘러 오지 않고 나흘이 되도록 지체하신데는 이유가 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심부름꾼을 보내 놓고 나사로가 살아있던 며칠 동안 애를 태웠을 것이다. 나사로가 죽어 장사를 지내고 나흘이 되도록 예수님이 오시지 않자 마르다와 마리아는 낙심하고 나사로의 죽음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처음에는 예수님의 능력을 믿고 있었을 것이다. 예수님만 오시면 나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죽은 지 사흘 째 까지도 예수님만 오시면 살아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죽은지 나흘이 되자 저들은 포기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죽은 뒤 사흘까지는 영혼이 몸에 머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기간 안에는 소생할 가능성이 있다고 믿었기에 한 가닥의 희망을 걸고 있었는데 나흘이 지나자 저들도 자포자기 했을 것이다.

나흘이란 모두 포기하게 하는 시간이다. 만약 예수님이 그 전에 도착해서 나사로를 살렸다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우연히 살아났다고 하게 된다. 그러나 나흘이 지난 뒤에 살아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역사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게 된다. 예수님은 그래서 마르다와 마리아와 나사로를 사랑하시면서도 이틀이나 의도적으로 지체하신 것이다. 극적인 효과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리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제 가라고 하셨을 때 예수님은 베다니를 향해 출발하신 것이다. 우리도 이젠 다 틀렸다고 생각할 때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는 때이다.

그런데도 16절을 보면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16절은 “그러자 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가 동료 제자들에게 ‘우리도 그와 함께 죽으러 가자’ 라고 말하였다” 라고 했기 때문이다. 디두모라는 말은 쌍둥이라는 뜻이다. 도마는 예수님 말씀을 듣고도 하나님의 관점에서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관점에서 생각했다. 도마만 그렇게 생각한 것이 아니라 모든 제자들이 다 그렇게 생각했기에 판단력이 뛰어나고 논리적인 도마가 앞서서 말한 것이다. 사람의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이 다시 예루살렘의 코 앞인 베다니로 가신다는 것은 죽으러 간다는 것으로 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지적이고 논리적이었던 도마는 앞에서 예수님은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라고 하셨기에 이제 예수님은 양들을 위해 죽으러 간다고 넘겨 짚은 것이다. 그래서 자신들도 예수님과 함께 가서 죽자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대단한 열정이고 대단한 헌신인 것 같다. 그러나 이는 무지한 열정이고 맹목적인 헌신이다. 예수님과는 달리 제자들은 하나님과 하나이신 예수님과 하나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잘못하면 이런 무지하고 맹목적인 헌신을 하나님의 위해 대단한 헌신을 한 것으로 착각하기 쉽다. 하지만 이러한 헌신은 아무리 사람들이 박수를 쳐 줘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그냥 바보같은 짓을 뿐이다. 대단한 헌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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