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0:14-19 예수께서는 예수님과 서로 사랑하는 관계인 예수님의 양들을 위해 목숨까지 버리신다며 우리 밖의 양들도 데려와 한 무리가 될 것이리며 스스로 목숨을 버리고 다시 얻을 권세를 하나님께 받았다고 하셨다.
이전 말씀에서 예수님은 목숨까지 내려놓고 양떼를 지키시지만 삯꾼은 목자도 아니고 자기 양들도 아니기에 늑대가 오는 것을 보면 양 떼를 버리고 달아난다고 하셨다.이어지는 말씀은 선한 목자인 예수님 자신과 양 떼들의 관계를 설명하시는 내용이다.
14절에서 예수님은 또 다시 “나는 선한 목자이다” 라고 말씀하신다. 앞에서는 자신의 목숨까지 버려 양 떼를 사랑하시는 진짜 목자라 했다. 이번에는 “나는 내 양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라고 했다. 이렇게 서로 안다는 말은 주로 사랑하는 남녀관계를 묘사할 때 쓰는 표현이다.
호세아 5:4절에 보면 “음란한 마음이 그 속에 있어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까닭이라” 라고 했다. 이 말씀도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사랑하는 남녀 관계로 비유한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는데 이스라엘은 음란하게 이방 신들을 섬기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마음에 음란한 이방 신들이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어 여호와를 모른다는 것이다. 이는 바람난 여자가 남의 남편인 애인만 생각하고 있어 자기 남편은 안중에도 없다는 뜻이다.
또 예레미야 24:7절에 보면 “내가 여호와인 줄 아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어서 그들이 전심으로 내게 돌아오게 하리니” 라고 되어있다. 이는 바람 났던 여자가 제비족 애인에게 다 털리고 외딴 섬의 술집으로 팔려갔을 때 남편이 자신을 찾으러 온 것 같은 상황이다. 자신은 남편을 버렸는데도 남편은 자신을 찾아와 몸 값을 지불하고 데리러 온 것이다. 그래서 그 마음이 다시 남편에게 돌아오는 모습이다. 이처럼 안다는 말은 사랑하는 사람을 마음에 두는 것처럼 늘 사랑하고 사모하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내 양을 안다는 것은 예수님의 마음 속에는 자기 양에 대한 생각 뿐이라는 뜻이다. 양도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양도 그 마음 속에 예수님 생각 뿐이라는 것이다. 마치 서로 사랑하는 남녀의 마음 속에는 서로에 대한 생각만 가득 차 있는 것 같은 상태를 말한다. 앞에서 예수님은 자기 양을 위해 목숨까지 버릴 만큼 사랑한다 했는데 이제는 그 사랑이 짝사랑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기 양들도 예수님을 그렇게 사랑한다는 것이다.
참 목자이신 예수님이 양들을 사랑하는 것을 이처럼 남녀 관계로 비유를 했지만 그 사랑은 남녀관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큰 사랑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15절에서는 “그것은 마치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라고 하셨다. 예수님의 사랑은 평범한 사랑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관계와도 같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양들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15절 끝에서 예수님은 또 다시 “나는 양들을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린다” 라고 하셨다. 양들을 위해 자기 육신의 옷을 벗어서 내려 놓을 만큼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양들을 사랑한다 하시면서 16절에서는 갑자기 “나에게는 이 우리에 속하지 않은 다른 양들이 있다” 고 하셨다. 이 구절에서 “다른 양”이 누구를 가리키는지에 대해 신약성서 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있다. 어떤 이들은 사마리아인들이라 하고 다른 이들은 이방인들이라 하기도 하고 또 다른 이들은 당시 지중해 연안에 흩어져 살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라고 하기도 한다.
이는 ‘우리’ 라는 말 때문이다. 우리란 밤에 양들을 보호해 주는 울타리라는 뜻이다. 이 울타리가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적 울타리라고 생각하면 울타리 밖의 양들은 사마리아인이나 이방인들이라 할 수 있다. 만약 이 울타리가 이스라엘 이라는 땅이라면 흩어져 살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울타리는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적 울타리나 지리적 울타리가 아니다. 유대교라는 종교적 울타리이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멀리 살았지만 명절 때마다 예루살렘 성전에 와서 예배를 드렸고 늘 율법을 따라 살았기 때문에 울타리 밖의 양이 될 수가 없다. 울타리 밖의 양이란 삯꾼들에게 쫓겨났거나 이리 떼 때문에 흩어졌거나 아니면 본래 유대교의 울타리 밖에 있던 양들 모두를 가리킨다.
본문의 의미가 분명하지 않을 때는 본문의 앞 뒤에서 찾아봐야 한다. 울타리 밖의 양이 누구를 뜻하는지 알기 어렵다면 양의 비유가 나오기 전 9장에서 찾아봐야 한다. 9:34절에는 유대교 지도자들이 눈 뜬 사람을 바깥으로 내쫓았다고 했다. 울타리 밖으로 내 쫓았다는 뜻이다. 또 9:35절에서는 예수님께서 그를 찾아 다니시다가 발견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렇다면 이 사람이 바로 울타리 밖으로 버려진 양 중에 하나인 것이다. 또 10:26절에서 예수님은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라고 하셨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울타리 안에 있는 양이라고 생각했고 목자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들의 판단으로 자격 없는 양들을 내 쫓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진짜 하나님 목자께서 하나님의 양들을 내쫓은 유대교 지도자들을 내 양이 아니라며 내쫓으신 것이다.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은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자들은 유대교 공동체에서 쫓아내었다. 정결법이나 안식일 법을 지키지 못하면 쫓아냈다. 십일조를 비롯해서 율법에 규정된 헌금을 제대로 내지 못해도 역시 쫓아내 버렸다. 율법에 부정하다고 규정된 병자들이나 불구자들도 부정하다고 여겨 다 쫓아 내버렸다. 그 이유는 거룩한 하나님의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저들은 조류독감에 걸렸다고 의심되는 닭들을 땅을 파고 묻은 사람들과도 같다. 자신들이 판단하기에 부정하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모두 골라내어 버렸던 것이다. 복음서에 나오는 죄인들이라는 말은 모두 이렇게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해 쫓겨난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세리도 이방인의 앞잡이라 해서 쫓아내 버렸고 창녀들도 더럽다고 쫓아내 버렸다. 하나님은 이러한 자들을 치료해 주고 정결하게 해 주길 바랐는데 저들은 다 내다 버렸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저들이 내다 버린 사람들을 모아서 가르치시고 제자를 삼으신 것이다.
울타리 밖의 양은 좁은 의미로는 이처럼 유대교 율법을 어겨 쫓겨난 사람들로 보아야 한다. 울타리 밖의 양은 넓은 의미로 보면 유대교 밖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다. 사마리아 사람들도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서 쫓아내 버렸다. 이방인들도 울타리 밖의 양일 수 있다. 이방인들은 본래 유대교의 율법의 울타리 밖에 있었다. 예수님 당시 사람들은 유대교에서 쫓겨난 사람들을 울타리 밖의 양들로 이해했을 것이다. 요한복음이 기록되어 읽혀지던 때에는 이방인들도 포함된다고 이해했을 것이다.
예수님은 울타리 밖의 양들을 이끌어와야 한다고 하셨다. 그들도 내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고 하셨다. 예수님의 목소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시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음성인 셈이다. 그렇다면 예수님 당시에는 이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다는 뜻이다. 유대교라는 울타리 밖에 있어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시려는 것이다. 쫓겨난 죄인들과 오래 전에 쫓겨난 사마리아인들과 원래 울타리 밖에 있던 이방인들 모두 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 자들이다. 그들 모두 예수님께서 이끌어 주셔서 예수님의 음성을 듣게 하시려는 것이다. 그들도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다면 그 다음에는 “한 목자 아래에서 한 무리 양 떼가 될 것이다” 라고 하셨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삯꾼 같은 유대교 지도자들이 만든 울타리를 허물고 새로운 울타리를 만드시려는 것이다. 하나님의 양 떼들을 다시 모으고 회복시키기 위해 예수님은 새로운 울타리를 만들고 계신 것이다. 그 울타리는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가 목자이신 예수님의 보호를 받게 되는 것이다.
17절은 원어에서 “이런 이유로” 이라는 말로 시작한다. 이와 똑 같은 구조로 된 말이 요한복음에 몇 번 나오는데 모두 앞에서 나온 이유로 무엇 무엇을 한다 라고 했다. 또 이어서 왜냐하면 이라는 말로 구체적인 이유를 설명한다. 따라서 원어에서 17절 맨 앞에 있는 “이런 이유로” 라는 말은 16절의 “한 목자 아래에서 한 무리의 양 떼” 가 되어야 하므로 라는 뜻이다. 이는 예수님께서 목숨을 내려 놓으셔서 이루시는 새로운 양 떼이다. 이는 예수님께서 목숨을 내려 놓으실 만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의 깊이 때문이다. 또 울타리 안에 있는 양과 울타리 밖에 있는 양들까지 모두 사랑하시는 그 사랑의 넓이 때문이다. 그 사랑의 깊이와 넓이 때문에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다” 고 하신 것이다.
원어에서는 그 뒤에 왜냐하면 이라는 말로 구체적인 이유를 설명한다. “그것은 내가 목숨을 다시 얻으려고 내 목숨을 기꺼이 버리기 때문이다” 라고 하셨다. 이는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사랑하시는 구체적인 이유를 밝히신 것이다. 예수님이 양들을 구하고 모으기 위해 자신의 육신의 생명까지 옷처럼 벗어 놓으시며 순종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예수님을 그렇게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18절에서 “아무도 내게서 내 목숨을 빼앗아 가지 못한다 나는 스스로 원해서 내 목숨을 버린다” 라고 하셨다. 예수님께서 육신의 생명을 벗어 놓으시는 것은 예수님이 자원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고 아무도 예수님의 뜻에 반해서 예수님의 생명을 빼앗을 수 없다는 뜻이다. 이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사랑하셔서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어서 예수님은 “나는 목숨을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다” 라고 하셨다. 예수님께서 육신의 옷을 벗는 것도 다시 입으시는 것도 예수님이 가지신 권세라는 것이다.
이 권세가 어디서 왔는가? 그 뒤에 보면 “이것은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명령이다” 라고 하셨다. 세상의 권세는 통치자의 명령에서 나오는 것이다. 예수님이 육신의 옷을 벗고 입는 권세도 온 세상을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 명령을 내리셔서 그렇게 된 것이라는 뜻이다. 이는 오늘날 장관들이 대통령의 명령을 받아서 그 권세를 행하는 것과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