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9:11-12 날 때부터 소경이었던 사람은 사람들의 질문에 대해 예수라는 사람이 자신에게 행한 일과 말한 것을 전하며 그대로 했더니 보게 되었다고 하자 사람들은 그가 어디있는지 물었고 이 사람은 모른다고 대답했다.
이전 말씀에서는 날 때부터 소경이었던 자가 보면서 집으로 돌아가자 이웃들과 그를 알던 사람들은 그를 보고도 그 사람이 맞다 아니다 논쟁을 벌였다. 그가 자신이 바로 그 소경 맞다고 하자 사람들은 어떻게 네 눈이 열렸는지 물었다. 이어지는 말씀은 예수께서 시키는 대로 했더니 보게 되었다고 하자 그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 묻는 내용이다.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느냐고 물은 것에 대해 11절에서 이 소경은 예수라 불리는 사람이 진흙을 만들어 내 눈에 르고 내게 말하기를 실로암을 향하여 가서 씻으라고 했다고 대답했다. 이 소경은 6-7절에서 예수께서 행하신 것과 말씀하신 것을 그대로 전했다. 6절에서는 눈 표면에 발랐다고 했는데 11절에서는 눈 표면이라는 말 대신에 내 눈이라고 한 것만 다르다. 이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예수께서 행하신 일과 말씀하신 것을 그대로 전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실로암 못을 향하여 떠나가서 씻으라고 했는데 이사람은 그러므로 멀리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다고 했다. 가서 라는 말은 원어에서 멀리 갔다는 뜻이다.소경이었던 이 사람이 실로암 연못까지 가는 길은 참으로 멀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예수님 말씀을 전적으로 믿었기에 소경으로 가기에는 먼 길을 갔던 것이다. 예수님 말씀을 믿고 소망을 가졌기에 힘들게 길을 찾아갔을 것이다.
또 원어에서 보게 되었다는 말은 다시 보게 되었다는 뜻이다. 다른 복음서에는 모두 다 다시 보게 되었다는 의미로 쓰였다. 그러나 이 사람은 날 때부터 소경인 사람이기에 엄격히 따지자면 다시보게되었다는 표현은 맞지 않는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의 지리학자인 Pausanias의 글에도 보면 날 때부터 소경인 사람이 두통을 겪은 후 일시적으로 다시 보게 되었다는 내용이 나온다(Messen. iv. 12. 10). 신약성경에서는 다시 보게 되었다는 말이 날 때부터 소경인 사람에게 쓰인 경우는 요한복음 뿐이다. 그러나 다시 보게 되었다는 말은 날 때부터 소경인 사람에게도 습관적으로 쓰인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2절에서 사람들이 그 사람에게 말했다고 했다. 여기서 사람들은 8절에 나온대로 이웃 사람들과 그가 전에 소경 거지였던 것을 알고 있었던 사람들일 것이다. 그들은 이 사람이 치료된 것에는 관심이 없고이 사람을 치료해준 그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만 묻고 있다. 보통의 경우라면 진심으로 함께 기뻐하고 축하하는 말을 해야 옳다. 이 사람은 모른다고 대답했다. 8:59절에서 사람들은 예수를 하나님을 모독한 죄로 돌로 치려 했기에 예수께서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즉시 그곳을 떠나셨을 것이다.
이 소경에게는 실로암 연못까지 가는 길이 참으로 멀게 느껴졌을 것이다. 예수님 말씀에 소망을 품고 더듬거리며 어렵게 찾아갔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보게 되었을 때 그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웃들과 전에 알던 사람들은 이 사람에게는 관심이 없고 이러한 기적을 행한 예수가 어디에 있는지만 묻고 있다. 아마도 자신들도 치료를 받기 위해 찾았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도 다른 사람들이 겪는 어려움과 기쁨에는 공감하지 못하고 자신의 문제만 크게 보기 쉽다. 다른 사람의 고통과 기쁨에 주목하고 함께 아파하고 함께 기뻐하는 공동체를 만들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