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5:20-24 아들이 아버지를 향해 가자 아버지는 멀리서 아들을 알아보고 달려와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최고 좋은 옷을 입히고 반지를 끼우고 신발도 신기고 최고의 잔치를 베풀며 기뻐했다.
이전 말씀에서 예수께서는 또 다른 비유로 말씀하셨는데 한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작은 아들이 아버지의 재산을 나눠달라 해서 이방지역에 가서 다 써버리고 굶어죽게 되자 아버지의 집에 가서 품꾼을 써 달라고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하셨다. 이어지는 말씀은 실제로 작은 아들이 아버지께 돌아갔고 아버지가 잔치를 벌이자 큰 아들이 분노하는 내용이다.
20절에서는 작은 아들이 일어나서 자기 아버지를 향해 갔다고 했다. 생각을 행동으로 옮긴 것이다. 그런데 이제 작은 아들을 비추던 카메라는 이제 아버지를 비춘다. 이어지는 내용은 아버지가 바라보는 관점으로 묘사하고 있다. 아직도 거리가 먼데도 그의 아버지는 그를 보았다고 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나? 이는 아버지는 오랫동안 아들이 돌아오길 기다리며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뜻이다. 이는 아버지가 아들이 돌아오길 기다리며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었다는 뜻이다.
아버지는 아들을 알아보고 측은히 여겼다고 했다. 이는 창자가 끊이질 듯 아프다는 뜻이다. 현대인들은 심장을 감정이 자리잡는 곳이라고 이해하지만 유대인들은 심장은 지식과 생각이 자리잡는 곳으로 이해했고 내장은 감정이 자리잡는 곳으로 이해했다. 거지꼴로 돌아오는 아들을 보고 가슴아파 하는 모습이다.
아버지는 달렸다. 이 아버지가 치맛자락을 들어 올리고 달렸을 것이다. 전투할 때나 일을 할 때는 늘어진 치맛자락을 감아올려 생식기 주변에 묶는다. 누가복음 12:35절에서 "허리에 띠를 띠고" 라는 말이 바로 그런 모습을 가리키는 말이다. 여기서 허리란 생식기를 뜻하는 완곡어법이다. 그러나 지금 아버지는 그럴 시간이 없다. 그래서 아버지는 옷자락 아래를 양손으로 잡아 쳐들고 달렸을 것이다. 당시 그 지역의 풍습으로 볼 때 한 노인이 이렇게 달리는 모습은 충격적인 것이다. 한국에서는 급하면 달리는 일이 흔하지만 이스라엘에서 달린다는 것은 대단히 위급한 일이 생겼다는 뜻이고 더구나 노인이 달리는 일은 거의 볼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 아버지는 아들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다. 이러한 입맞춤은 가족이나 아주 가까운 친구에게나 하는 것이다. 이러한 입맞춤은 야곱이 에서와 화해하는 장면에서도 한번 나온다. 이러한 키스가 용서의 입맞춤이다. 아들은 종으로 써 달라고 하려고 왔지만 아버지는 모든 것을 다 용서하고 아들로 맞아준다는 뜻인 것이다.
아직 아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간 것 뿐이다. 자기 죄를 고백하거나 용서해 달라고 말하기 전에 이미 아버지가 주도적으로 다 용서한 것이다. 아버지의 용서는 죄를 입으로 고백하는 것보다 앞서는 것이다. 아버지께로 돌아가기만 해도 아버지는 모든 것을 다 알고 먼저 용서하고 있는 것이다.
21절에서 아들이 아버지께 말하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을 향하여 또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으니 더 이상 당신의 아들이라 불리울 자격이 없습니다" 라고 자신의 죄를 고백했다. 그러나 앞에서 혼자 자신에게 말한 종으로 써 달라는 말은 하지 못했다. 일부 사본들은 이곳에 빠진 말을 19절에서 가져다가 써 놓았다. 그러나 그러한 사본의 필사자들은 누가가 증언한 중요한 한가지 의미를 놓친 것이다.
어떤 이들은 그의 아버지의 너그러운 환대로 인해 목이 메여 말을 못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전체적인 문맥은 아들은 말하려고 했지만 아버지가 못하게 막고 잔치를 베풀라고 명한 것이다. 아들이 돌아온 것을 기뻐하는 아버지의 모습에 비추어 볼 때 아버지가 더 이상 말을 못하게 막았을 것이라는 것이 자연스럽다.
22절에서 아버지는 그의 종들에게 "속히 으뜸가는 옷을 가져와서 그에게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겨라" 라고 말했다. 으뜸가는 옷이란 말에서 으뜸이라는 말은 처음에 라는 뜻도 있기에 전에 아들이 입던 옷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이 성립하려면 "그의" 라는 말이 있어야 한다. 전에 입던 옷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 집에서 아버지가 소유하고 있는 옷 중에 가장 좋은 옷이라는 의미이다.
아들은 분명히 흙먹지가 잔뜩 묻은 맨발에 다 떨어진 누더기를 입고 거지꼴로 돌아왔을 것이다. 맨발은 당시 노예들의 모습이고 자유민들은 신발을 신었다. 아버지는 이러한 아들에게 아버지의 옷장에서 아버지의 옷 중에 최고 좋은 옷을 가져다가 입히고 아들의 신분을 나타내는 반지를 끼워주고 신발도 신기라는 것이다. 이는 아들로서의 신분을 다시 회복시켜준다는 뜻이다.
23절에서 아버지는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라고 말한다. 살진 송아지는 히브리어에서 일년된 송아지를 뜻한다. 최고로 연하고 맛이 좋은 고기인 것이다. 1세기 팔레스틴에서 살진 송아지를 제공하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아주 특별한 것이다. 당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보통 종교적인 축제의 경우에만 고기를 먹었다. 그들은 보통 유제품으로 단백질을 보충했고 아주 특별한 종교적인 축제 때나 고기를 먹을 수 있었던 것이다. 아들이 돌아온 것이 아버지에게 얼마나 큰 기쁨이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24절은 "왜냐하면"이라는 말로 이렇게 특별한 잔치를 벌이는 이유를 설명한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잃었다가 발견했다고 했다. 잃었다는 말은 앞의 두 비유에서도 쓰였던 말이다. 본래 뜻은 망했다 또는 완전히 파괴되었다는 뜻이다. 이는 마치 배가 침몰했는데 사망자 몇 명 실종자 몇 명과도 같은 표현이다. 죽은 것과 실종된 것은 결국 같은 의미인 것이다. 실종이란 시체를 확인하지 못했다는 뜻일 뿐이다. 따라서 이 아버지는 죽었던 아들이 다시 부활하여 돌아온 것 같은 기쁨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 아버지와 함께 기뻐하기 시작했다.
오늘 말씀은 아버지의 관점에서 진행된다. 모든 주도권도 아버지에게 있다. 아들은 단지 아버지께로 돌아온 것 뿐이다. 아들이 되려고 한 것도 아니고 죄를 고백하며 종으로 써 달라고 하려고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듣지도 않고 그 입을 막고 아들로 받아들이며 최고의 기쁨을 살진 송아지를 잡으라는 말로 표현한 것이다.
우리의 구원도 우리가 조금이라도 주도권을 가진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단지 멸망할 세상 영광을 향해 살다가 아버지께로 향해 돌아선 것 뿐이다. 죄를 말로 고백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 비유를 보면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아버지를 향해 돌아서기만 해도 아버지는 다 아시고 오늘 비유에서 죽은 아들이 살아돌아온 것처럼 기뻐하신다. 우리의 구원의 주도권은 전적으로 아버지에게 있다. 날마다 우리가 돌아오길 기다리며 멀리 바라보고 계시다가 돌아오는 우리를 발견하시고는 치맛자락 높이 들고 달려와서 우리를 안아 주시고 아들과 딸로 맞아주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