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47:5-11 자신을 가장 지혜롭고 존귀하게 여기며 부귀영화를 누리던 바빌론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기에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 하나님의 심판은 아무도 오지 못하게도 할 수 없고 막을 수도 없고 피할 수도 없다.
하: 교만한 자를 심판하시는 하나님
나: 우리 주 예수님의 마음으로 용서하고 사랑하며 살자 이전 말씀은 하나님께서 고귀한 공주 같은 바빌론을 가장 낮은 노비로 만드시고 벌거 벗겨서 구경거리가 되게 하셔서 하나님의 남은 자들의 원수를 갚아 주신다고 했다. 이제 바빌론을 심판하시는 이유를 자세히 설명하는 내용이 이어진다. 이는 마치 법정에서 판사가 형을 확정해서 선고하는 내용과도 같다.
5절은 딸 바빌론에게 "잠잠히 앉아 있다가 어둠 속으로 사라져라" 라고 말한다. 이전 말씀에서는 하나님께서 바빌론이 허벅지가 드러난 옷을 입고 노예로 일을 하다가 벌거 벗겨져서 사람들 앞에 전시하심으로 복수하신다고 했었다. 바빌론이 이스라엘에게 했던 일을 똑같이 갚아 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이스라엘과 바빌론은 극명하게 대조된다. 이스라엘은 값을 지불하고 사셔서 고운 옷을 입혀 고귀한 모습으로 회복시키시지만 바빌론은 이제 입 다물고 땅바닥에 앉아 있으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고는 확정된 것이기에 자신을 변호하는 말도 하지 말고 입다물고 있다가 어두운 감옥으로 들어가라는 것이다. 이제 여왕 바빌론은 벌거벗겨진채 전시되었다가 감옥으로 사라지고 아무도 더 이상 여왕으로 부르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6절은 그 이유를 설명한 것이다. 전에 하나님께서 유다에게 진노하여 유다를 바빌론에게 넘겼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유다를 가르치려고 바빌론에게 넘긴 것이지 멸망시키려고 넘긴 것이 아니다. 바빌론이 거룩해서 바빌론은 흥하게 하고 유다는 망하게 하신 것이 아니다. 그런데 자신들이 최고로 잘한 줄 알고 교만했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었다. 그 예가 노인에게 대단히 무거운 멍에를 메운 것이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예로 든 것이다. 바빌론의 죄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7절은 바빌론의 착각을 말하고 있다. 바빌론은 자신들의 영광이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은 생각하지도 않고 자신들이 하나님이 되어 세상을 다스리고 심판한 것이다. 그렇기에 자신들이 부끄러운 모습의 노예가 되고 완전히 벌거벗겨져서 구경거리가 되고 결국은 어두운 감옥에 영원히 던져질 것이라는 것은 생각하지도 않았고 마음에 담아 두고 다시 기억해보려고도 안했다는 것이다. 우리도 역시 항상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형제 자매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도 불쌍히 여기지 않으신다는 것을. 우리는 그보다 더 불쌍한 사람이 되게 하신다는 것을 늘 마음에 담아두고 살아야 한다.
8절은 바빌론을 방탕한 여인이라 부르고 있다. 방탕한 여인이란 부귀영화와 온갖 쾌락을 즐기며 사는 귀부인을 말하는 것이다. 이제 하나님 말씀을 들어보라는 것이다. 이 여자는 마음 속으로 말하길 "나보다 높은 이가 없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자신을 하나님만큼 높인 지독한 교만이다. 이어서 "나는 과부가 되지 않을 것이며 자식을 잃는 일도 없을 것이다" 라고 했다. 남편이나 자식이 죽지 않는 것은 인간이 결정할 일이 아닌 것이다. 바빌론은 그렇게 자신이 하나님이 되어 하나님 놀이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9절은 자식을 잃고 과부가 되는 것이 한날에 닥칠 것이라 했다. 여자가 벌거벗겨진 채 구경거리가 되는 것보다 더 낮은 자리에 내려가는 것은 과부가 되고 자식을 잃는 것이다. 벌거벗겨진채 구경거리가 되는 것은 잠깐이지만 과부가 되고 자식을 잃는 고통은 사는 날 동안 계속되는 고통이기 때문이다. 고대 사회에서 남편도 자식도 없다면 아무런 보호막도 없는 최고로 불쌍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바빌론의 마술의 힘이 아무리 세다
해도 하나님게서 하시는 일은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바빌론의 문제는 하나님의 자리에 서서 하나님 놀이를 하면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은 것이다.
10절은 "네가 악한 일에 자신만만하여 아무도 나를 감시하지 않는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는 자신이 최고로 높은 자리에 있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존재 자체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 이렇게 교만하게 되었는가? 이어서 "너의 지혜와 너의 지식이 너를 잘못된 길로 들어서게 하였고" 라고 했다. 지혜와 지식이 바빌론을 그렇게 하나님으로 만든 것이다. 그래서 "나보다 더 높은 이는 없다" 라고 한 것이다. 바빌론이 그렇게 교만해진 것은 재산이나 권력이나 마술의 힘이 아니라는 것이다. 지혜와 지식이 그렇게 교만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교만도 역시 지혜와 지식이 그렇게 만든다.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지혜와 지식이 많다고 해도 결국 마찬가지이다. 지혜와 지식만 있고 한결 같은 사랑으로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없다면 결국 자신이 하나님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11절은 이제 세가지 재앙으로 바빌론에게 마지막 쐐기를 박는다. 그렇게 능력이 있고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바빌론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 세가지 재앙을 막지 못한다는 것이다. 첫째 재앙인 불행이라고 표현된 악한 것이 스스로 바빌론을 찾아 걸어온다는 것이다. 하지만 바빌론은 자신을 찾아오는 불행이 자기에게 오지 못하도록 점술로 쫓아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둘째 재앙은 재난이 덮쳐도 라는 말이다. 원어에서는 재난에 떨어진다는 뜻이다. 바빌론이 재난이라는 깊은 함정으로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자신이 떨어질 재난이라는 함정을 덮어서 자신이 떨어지지 않도록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셋째 재앙은 파멸이 순식간에 이른다고 했다. 셋째 재앙도 첫째 재앙 불행과 마찬가지로 바빌론을 찾아 온다. 그런데 첫째 재앙은 바빌론이 알고 막으려고 주술을 썼지만 막지 못했다. 그러나 셋째 재앙이 바빌론에게 걸어 올 때는 알지도 못했다는 것이다. 파멸이라는 재앙이 갑자기 닥치는 토네이도로 비유한 것이다. 토네이도 처럼 갑자기 닥쳐서 완전히 파괴시켜 버린다는 것이다.
이 세개의 댓구가 서로 비교되는데 시간이 점점 짧아짐으로 위기가 점점 강조되는 것이다. 첫째 재앙인 걸어오는 불행은 대비할 시간이 많이 있다. 그렇지만 천천히 다가오는 불행을 아무리 막으려 해도 막을 길이 없다. 둘째 재앙인 재난의 함정은 갑자기 발밑이 무너져 깊은 함정이 되는 것이다. 널판지를 가져다가 막아야겠다고 생각할 시간은 있지만 실제로 그렇게 할 시간은 없는 것이다. 셋재 재앙인 파멸은 알지도 못한다고 했으니 대비할 시간도 대비할 마음도 먹지도 못하고 바로 완전히 파괴되는 것이다.
바빌론의 죄는 지혜와 지식이 없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이 없는 것이라 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 말씀 아무리 많이 알고 지혜가 넘쳐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원수까지도 용서하는 하나님의 마음이 없다면 우리가 하나님이 되어 가증한 멸망의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주 예수님도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시며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라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이 없이 지혜와 지식이 가득하다면 11절에 나오는 바빌론 처럼 완전히 망할 것이다. 미리 알고도 막지 못할 것이요 바로 알았어도 막을 시간조차 없을 것이고 아예 알지도 못하고 그냥 망할 것이다. 바빌론에 대한 경고가 오늘날 믿는 자들 중에 모든 것이 형통하여 교만해진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는 사람들에 대한 경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