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9-11 오신다고 하신 능력 많으신 예수께서 오셨을 때 하나님께서는 성령님이 예수께 임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시고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음성도 들려주셨다.
이전 말씀에서 요한은 낙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으며 자신보다 훨씬 더 능력이 많은 분이 오시는데 자신은 물로 침례를 주지만 그분은 성령으로 침례를 주신다고 전했다. 이제 이어지는 말씀은 예수께서 요한에게 침례를 받는 장면이다.
9절의 그 무렵이란 4절에 나온 요한이 광야에 나타나 죄를 용서 받게 하는 회개의 침례 선포할 때를 가리킨다. 바로 그 때 예수께서 오셨다는 것이다. 한국어 번역은 와서 침례를 받았다 라고 되어있다. 바로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에서 오셨다는 것이다. 9절의 핵심은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셨다는 것처럼 보이지만 핵심은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에서 오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침례도 받으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마가는 “예수께서 오셨다”고 했고 5절에 나오는 사람들은 ""나아가” 라고 말하며 전혀 다른 단어를 사용했다. 5절의 “나아가” 라는 말은 2차원이든 3차원이든 벽으로 둘러싸인 지역에서 빠져 나온다는 뜻 이다. 즉 사람들이 당시 발달된 거주지역인 예루살렘성과 온 유대지방의 성문에서 빠져 나와 사람이 살지 않는 사막으로 나왔다는 뜻이다.
그러나 예수께 대해서는 단순히 “왔다” 라는 뜻의 말을 쓰고 있다. 예수님도 틀림없이 갈릴리 지역의 인구 밀집지역에서 사막으로 빠져나오셨을 것이다. 그런데도 빠져나왔다 라고 하지 않고 “왔다” 라고 한 이유는 7절에서 “오신다”는 말 때문이다. 요한이 약속한 그 능력 많으신 분이 드디어 오셨다 라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침례를 받았다는 말에 초점이 있지 않고 능력 많으신 그 분이 드디어 오셨다는 것이다.
14절에도 같은 말이 나오는데 예수께서 갈릴리로 돌아오셨다 라고 하지 않고 7절 9절과 같이 “오셨다” 라고 한 것은 요한이 말한 그분이 드디어 갈릴리로 오셨다 라는 것이다. 오신다 약속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드디어 오셨다는 것이다.
당시 이스라엘의 중심은 예루살렘과 그 주변의 유대지방이다. 갈릴리는 이스라엘의 변방이다. 특히 북갈릴리는 기원전 105-104년에 Aristobulus가 정복하고 강제로 할례를 받게 한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갈릴리 지역은 변두리 중의 변두리이고 무시당하던 지역이다.
그런데 능력 많으신 이가 그런 지역에서 오셨다는 말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 당시 그 사회의 엘리트들이나 지도층들은 모두 예루살렘에 살았기 때문이다. 인간적인 생각으로 본다면 능력 많으신 이도 예루살렘이나 아니면 최소한 유대지방에서라도 와야 한다.
그런데 제대로된 유대인으로 인정도 못받던 갈릴리의 작은 시골동네에서 능력 많은 이가 오셨다니 정말 기가 찰 노릇이다. 요한의 제자들은 대부분 남쪽 유대 사람들이었기에 요한의 제자들이 봐도 정말 웃기다 못해 기가 찰 노릇이었다. 요한복음 1:46절에서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라고 한 것으로 보아도 알 수 있다. 예수께서 그런 소외된 지역에서 오신 것은 하나님의 관점은 세상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유대지방은 건조기후 지역이라 예루살렘을 빼고는 인구밀도가 높지 않았다. 그러나 갈릴리는 사철 헬몬산에서 내려오는 시냇물이 흐르고 사방이 한국처럼 푸른 나무와 풀들이 가득한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농사짓기도 좋아서 인구밀도가 높은 곳이었다. 게다가 이방지역과 당시 중요한 길로 연결되어 있고 갈릴리 호수만 건너면 또 바로 이방지역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적인 관점에서는 정치 문화적으로 소외된 지역이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소외된 사람들에게 전도하고 장차 이방지역에 복음을 전하기 좋은 곳이었다.
이어서 9절 뒷부분은 예수께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침례를 받았다는 것이다. 5절에서 사람들이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침례를 받았다는 말과 똑같지만 예수님께는 “자기들의 죄를 고백하고” 라는 말이 빠져있다. 예수님께서는 죄가 없으신 분이기에 고백할 죄도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죄를 용서받는 침례를 자청해서 받으셨을까? 그 이유는 죄인들의 죄를 담당하시기 위해 그들과 함께 하시려는 것이다. 실제로 예수님은 지상사역 동안 유대교 종교 지도자들이 죄인으로 낙인 찍어 공동체에서 쫓아낸 세리와 죄인들과 늘 함께 지내셨다. 그래서 유대교 지도자들은 예수님도 죄인으로 몰아서 결국엔 죽였던 것이다.
이어지는 10절은 원어에서 “그리고 즉시” 라는 말로 시작한다. 마가는 이 말을 주로 새로운 사건이 벌어질 때 썼다. 예수님 오신 뒤에 이어지는 이어지는 새로운 사건은 예수께서 보신 비전이다. 예수께서 보신 비전은 요한이 말한 것처럼 예수님이 능력 많으신 분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능력 많으신 분이 오셨기에 요한이 했던 준비사역은 끝이 났고 요한이 베풀던 침례는 이제 위대하신 분과 요한을 구별하는 칸막이 구실을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요한의 침례 때문에 성령이 내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해 준다. 요한은 예수님 오시기 전까지만 임시로 사역한 것이고 이제 예수께서 오셨으니 요한은 물러가야 한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물에서 막 올라오실 때 본 비전은 두가지이다. 하나는 하늘이 갈라진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오는 것이다. 하늘이 갈라진다는 말은 천 같은 것이 찢어지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다른 복음서 기록자들은 “하늘이 열렸다” 라고 했는데 마가만 하늘을 찢으시고 성령이 내려오시는 것을 예수께서 보셨다고 했다. 이사야 64:1절은 “주는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고” 라고 되어 있다. 성령 하나님께서 하늘을 찢고 강림하셨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마가는 특별히 찢는다는 말을 사용한 것이다.
이 말을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서 성소 휘장이 찢어졌다고 할 때도 쓴 말이다. 마가는 특별히 하늘을 찢으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성소의 휘장을 찢으신 분도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하늘이 인간세계와 하나님이 계신 곳을 구분하는 천막처럼 생각했다. 마찬가지로 성소의 휘장은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지성소와 예배하는 사람들이 머물러 있던 성소를 구분하던 천막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마가는 성령 하나님께서 하늘 천막을 찢고 내려오셨다고 한 것이다. 마가가 “하늘을 찢고” 라는 표현을 통해 말하려는 것은 백부장의 고백과 같이 “참으로 이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라는 것이다.
예수께서 두번째로 보신 것은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는 것”이다. "비둘기 같은" 이란 말을 KJV와 NASB는 성령을 꾸미는 말로 번역했다. 그러나 ESV와 NKJV와 NLT는 "비둘기 같은" 이란 말이 내려온다는 말을 꾸미는 것으로 번역했다. 본문의 문맥은 예수께서 성령이 내려오는 모습을 보셨다는 것이다. 필자는 성령님은 형체가 없는 것이기에 성령님이 마치 비둘기 같은 모습으로 내려오셨다는 뜻이라기 보다는 성령께서 내려오는 모습이 마치 비둘기가 내려오는 것과도 같다고 보는 것이 옳다고 본다.
비둘기는 노아의 홍수 사건에서 등장한다. 노아가 홍수가 그친 후 물이 얼마나 빠졌는지 알아보기 위해 내보냈을 때 비둘기는 올리브 나무 잎을 물고 돌아왔다. 올리브 나무는 건조한 지중해 연안 사람들의 생명을 살리던 나무이다.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온다는 말은 사복음서 기록자가 모두 똑같이 사용한 말이다. 이 장면을 염두에 두고 비둘기가 올리브 나무 잎을 물고 방주로 돌아오듯 성령께서 예수님께로 돌아오셨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비둘기는 성령을 상징하는 말이라기 보다는 예수께 돌아오는 모습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로 볼 수 있다.
두가지 장면이 보여진 이후에 11절에서는 음성이 들렸다. 11절의 음성이 들렸다는 부분은 3절의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와 같은 구조로 되어 있다. 똑같이 음성이 들렸다. 그런데 3절에서는 요한이 광야에서 스스로 외치는 소리였지만 11절에서는 하늘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음성이 들린 것이다. 이는 예수님이 요한보다 훨씬 더 능력이 많다는 것을 나타낸다.
하늘에서 들려온 하나님의 음성은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기뻐한다” 라는 것이다. 사랑하는 자 라는 말이 아들 딸과 함께 쓰이면 유일함을 나타낸다. 마치 이삭이 아브라함의 유일한 아들인 것과도 같다. 마가는 특별히 “너는” 이라는 2인칭 단수로 표현해서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직접 말씀하셨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다. 이어서 기뻐하는 자 라는 말은 왜 사랑하는지 그 동기를 제공해 준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시고 기뻐하시기에 사랑한다는 것이다.
사랑하고 기뻐하는 아들은 예수께서 마가복음 12:6절에서 말씀해주신 악한 포도원 농부의 비유와 연관해서 생각해볼 수 있다. 비유에서 포도원 주인은 먼저 종들을 보냈지만 죽였기에 마지막엔 사랑하는 아들을 보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보내셨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거부하고 죽이기까지 했다. 마지막 선지자였던 요한까지도 죽였다. 그 뒤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기로 한 것이다. 이는 당시 유대인들에 대한 분명한 경고이다. 이번에는 진짜 내 아들을 보낸다 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니 영접하라는 경고이다.
오늘 말씀은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심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셨다는 뜻이 아니다. 강조점은 하나님께서 보내신다고 약속하신 그분이 오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거로 그분과 늘 함께 하시던 성령님께서 비둘기가 돌아오듯 임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셨고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음성도 들려주신 것이다. 그동안은 선지자들을 보냈지만 이번에는 독생자를 보내시니 영접하는 자는 살 것이고 영접하지 않는 자들은 모두 멸하신다는 경고이다. 이제 더 이상 경고는 없고 이제 마지막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