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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섭 목사Dr Ahn's NT 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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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6-8

능력 많으신 이가 오신다고 증언한 요한

2022. 3. 19. · 안정섭 목사 · 마가복음 1장 강해 설교

마가복음 1:6-8 요한은 낙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으며 자신보다 훨씬 더 능력이 많은 분이 오시는데 자신은 물로 침례를 주지만 그분은 성령으로 침례를 주신다고 전했다.

이전말씀은 요한이 나타나서 광야에서 침례를 주면서 회개하라고 선포하니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죄를 고백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침례를 받았다는 내용이었다. 이어지는 말씀은 회개한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시범을 보인 장면이다.

6절에서 요한은 회개하고 침례를 받은 사람들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의 삶을 통해 먼저 시범을 보여주었다. 요한은 낙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었다. 낙타 털옷은 예언자의 옷이다. 스가랴 13:4에 보면 “사람을 속이려고 털옷을 입지 아니할 것이며” 라고 했다. 이것으로 볼 때 요한이 입은 낙타 털옷은 예언자라는 표시이다. 하지만 낙타 털옷은 원래 광야에 살던 유목민들이 입던 것이다. 이는 출애굽한 뒤 광야에서 광야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던 때를 생각나게 하는 복장이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성 안에서 좋은 옷을 입고 화려한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지자들은 거친 털옷을 입고 검소한 삶을 보여주면서 회개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전했던 것이다.

물론 사람들은 요한과 엘리야를 흔히 연결한다. 예수님도 마태복음 11:7에서 예수께서도 요한에 대해 말씀하시며 “무엇을 보러 광야에 나갔더냐?” 라고 질문하셨다. 만약 좋은 옷을 입은 사람을 보려면 왕궁에 가야 한다며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러 나갔던 일을 떠올리게 했다. 그러면서 11:14절에서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라” 고 말씀하시며 요한과 엘리야를 연결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나온 낙타 털옷과 가죽 띠는 엘리야 뿐만 아니라 유목민들의 복장이고 당시 선지자들이 입고 하나님의 뜻을 전할 때 썼던 것이다.

또 요한이 먹던 것은 메뚜기와 들꿀이다. 메뚜기는 레위기에 나온 곤충 중에 먹어도 되는 정결한 곤충이다. 광야에 살던 유목민들은 메뚜기로 단백질을 보충했다. 들꿀은 유목민들이 포도주 대신 마시던 음료수였다. 이것은 요한이 광야에서 거친 음식을 먹고 검소한 삶을 보여준 것이다. 이처럼 요한이 광야시대에 입던 거친 옷을 입고 거친 음식을 먹으며 산 것은 사람들에게 광야시대로 돌아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자는 메시지를 보여준 것이다.

요한은 회개하고 침례를 받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선포하기 전에 먼저 삶으로 보여주었던 것이다. 이렇게 삶으로 사람들에게 보여준 요한은 자신의 앞에 앉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선포하기 시작했다. 그 내용은 자신의 뒤에 오는 분이 어떤 분인지에 관한 것이다.

7절에서 요한이 선포한 내용은 자신보다 능력이 많은 분이 자신의 뒤에 오신다는 것이다. 요한의 뒤에 온다는 말은 장소가 아닌 시간적인 뒤를 나타내는 말이다. 나보다 능력이 많다는 말의 문자적 의미는 요한보다 훨씬 더 강한 분이 오신다는 것이다.

요한도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매우 강력한 능력을 가졌던 사람이었다. 요한이 강했던 것은 그가 선포하던 메시지이지 요한이 가졌던 힘과 능력이 아니다. 요한이 선포하는 메시지를 듣고 그 지역의 많은 사람들이 회개했기 때문이다. 요한의 메세지가 강력했다는 것은 역사가 요셉푸스도 인정했고 당시 분봉왕이던 헤롯 안티파스도 인정하고 두려워했다. 따라서 요한이 자신의 능력과 자신의 뒤에 오시는 분의 능력을 비교한 것은 회개하게 하는 메세지의 능력이다.

요한도 회개하게 하는 능력에 있어서는 충분히 강한 사람이었다. 그의 삶과 함께 선포되어진 메시지는 당시 헤롯 안티파스 뿐 아니라 역사가 요셉푸스에게도 엄청난 충격을 줄만큼 매우 강력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신의 뒤에 오시는 분은 자신보다 훨씬 더 강력한 메시지를 선포할 것이라는 뜻이다. 그가 전하는 메시지는 온 세상을 변화시킬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던 메세지는 너무도 강력해서 당시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에게 까지도 엄청난 두려움을 주었다. 그래서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것이다.

자신과 비교할 때 그분이 선포하는 메시지가 얼마나 큰 능력을 갖고 있는지 요한 자신은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 자격조차 없다고 말한다. 신발 끈을 푸는 일은 그 집 하인 중 가장 낮은 하인이 주인을 맞이할 때 하던 일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샌들을 신고 다녔는데 땀에 먼지가 뒤범벅이 된 발로 집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래서 그 집 하인이 신발 끈을 풀고 입구에 있던 정결의식에 쓰이던 물동이에 있는 물로 발을 씻겼던 것이다.

당시 요한이 전하던 회개하라는 메시지는 정말 놀라운 반향을 일으켰다. 그것을 알기 때문에 자신의 메시지와 뒤에 오시는 분의 메시지를 비교한 것이다. 자신과 뒤에 오시는 분을 비교할 때 자신의 메시지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자신의 뒤에 오시는 분에 비교하면 자신은 그분의 발 닦아주는 종이 될 자격조차도 없다는 것이다. 자신의 뒤에 오실 분이 자신과 비교할 때 얼마나 위대하신 분인지를 솔직하게 표현한 것이다.

이어 8절에서는 자신의 침례와 자신의 뒤에 오실 분의 침례를 비교하고 있다. 자신은 자신의 메세지를 듣고 회개한 사람들에게 물로 침례를 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뒤에 오실 분은 그분의 메세지를 듣고 회개한 자들에게 성령으로 침례를 줄 것이라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오순절 마가 다락방의 성령 강림 사건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믿는 자들에게 성령님께서 항상 함께 하신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물 침례와 성령 침례를 잘 비교해보고 요한이 전달하려 했던 말의 의미를 정확히 알아봐야 한다. 잘못하면 요한이 전달하던 그림언어를 놓치게 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침례받는 장면을 그린 화가들이 많이 있다. 대부분 발목이 잠기는 얕은 물 위에서서 그릇으로 머리에 물을 붓는 그림이다. 당시 카톨릭 교회의 영향을 받아 그렇게 그렸지만 이것은 실제 예수님의 침례 장면과는 상관이 없다. 만약 요한의 침례가 물 한 그룻 머리 위에 붓는 것이었다면 그 다음에 비교되는 성령침례의 모습도 머리 위에 성령 한 그릇 붓는 것이 된다. 그러면 마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요한의 말의 중요한 의미가 사라지는 것이다.

지금 요한이 주는 침례의 그림은 먼저 출애굽 시 홍해를 지나던 모습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갈라진 홍해를 지났다. 결국 저들은 물속을 지나온 셈이다. 저들은 홍해 침례를 받고 광야에서 하나님과 함께 동행했다. 요한이 광야에서 주던 침례는 그러한 것을 떠올리던 것이었다. 요한의 침례는 요단강 물속에 완전히 잠기던 것이었다.

그렇다면 자신의 뒤에 오시는 분이 주실 성령의 침례도 역시 완전히 잠기는 것이어야 한다. 요한이 자신의 물 침례와 비교해서 말한 성령 침례를 받는다는 것은 성령에 완전히 빠져 든다는 그림인 것이다. 성령 한그릇이 아니라 아예 성령의 바다에 덮힌다는 뜻이다. 원어에는 성령이란 말 앞에 “안에” 라는 전치사가 있다. 이 전치사를 보아도 물에 잠기듯 성령 안에 완전히 잠기게 되는 것이 예수께서 주시는 성령 침례라는 것이다.

이는 성령에 완전히 압도되는 것을 나타낸다. 이것이 자신의 물 침례와 예수님의 성령 침례를 비교한 이유이다. 이것을 놓친다면 요한이 전하려 했던 중요한 그림 하나를 놓치는 셈이다. 예수님의 성령 침례를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서 내리던 성령으로만 국한할 수 없다. 요한복음 20:22절에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을 향해 이미 성령 받으라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즉시 성령님이 함께 하셨다.

요한의 물 침례는 회개한 것을 외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성령 침례는 단순히 영적으로 새롭게 되겠다는 소망이 아니다. 이는 하나님 자신이 실재로 그의 백성들 가운데 능동적으로 임하시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마치 물 가운데 빠지듯 예수님을 통해 새롭게 임재하실 성령님에 잠기고 휩싸여 압도되게 될 것을 말한 것이다. 오순절 마가 다락방 성령강림은 각 나라에서 온 유대인들에게 보여주고 들려주기 위해 역사하신 성령님의 임재의 한 예를 기록한 것 뿐이다.

요한이 말하는 성령 침례는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셨던 그 하나님이 이제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실제로 임재하신다는 것을 말한다. 고넬료와 함께한 이방인들에게 성령이 강림한 것도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없이 임하신다는 증거를 보여준 것일 뿐이다. 성령님의 임재의 증거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물에 완전히 잠기듯 성령님께 사로잡힌 사람은 삶으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열매를 보아 나무를 알 수 있다고 하신 것이다.

요한은 자신의 물 침례와 뒤에 오시는 분의 성령 침례를 비교하면서 자신은 한없이 낮추고 뒤에 오시는 주님은 한없이 높였다. 우리도 우리 자신과 주님을 비교하여 우리 자신을 한없이 낮추어야 한다. 그것도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겸손보다도 훨씬 더 낮추는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도 예수님과 비교하여 우리를 훨씬 더 낮추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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