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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섭 목사Dr Ahn's NT 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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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38:9-20

인생의 유한함을 깨닫고 찬양하는 삶을 살길 다짐하는 히스기야

2018. 10. 22. · 안정섭 목사 · 이사야 38장 강해 설교

이사야 38:9-20 히스기야는 자신의 병을 통해 인간의 유한함을 깨닫고 하나님만 바라보며 하나님만 의지하고 찬양하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했다.

하: 찬양 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나: 아내와 함께 지낼 수 있는 짧은 시간을 주셨으니 함께 사랑하며 함께 주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는 삶을 살겠다.

이전 말씀에서는 히스기야가 죽을 병에 걸렸을 때 하나님께 눈물로 기도하니 그 생명을 15년 연장시켜 주신 내용이 나왔다. 오늘 이어지는 말씀은 히스기야가 회복된 뒤에 부른 감사의 찬양이다. 그런데 이 감사의 찬양은 감사와 찬양이 넘치는 일반적인 감사의 찬양의 형식과는 많이 다르다. 이는 히스기야가 병을 통해서 깨달은 것이 인간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이고 하나님만이 영원하시다는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는 날동안 주님을 찬양하는 삶을 살겠다는 것이다.

9절은 히스기야가 병이 들었다가 회복된 다음에 쓴 글이라 말하고 있다. 10절의 “한창 나이에” 라는 말은 원어에서 “날의 중간에” 라는 뜻이다. 해가 중천에 뜬 낮 12시 쯤을 가리키는 말이다. 히스기야의 전체 인생으로 볼 때 절반쯤 밖에 살지 못했을 때라는 뜻이다. 스올의 문으로 들어간다는 말은 죽는다는 뜻이다. 그래서 나머지 반나절의 인생은 강탈당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11절은 사람이 사는 땅에서 주님을 뵙지 못한다는 것이지 주님을 아예 뵙지도 못하고 영원히 사라진다는 뜻은 아니다. 인생이란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들을 사랑하며 살아야 하는 존재인데 이제 다시 주님을 뵐 수 없다는 것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면서 이 땅에서 살 수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내가 다시는 세상 사는 사람 가운데서 단 한 사람도 볼 수 없겠구나” 라고 한 것이다.

12-13절은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의 심정을 노래한 것이다. “목동이 장막을 거두어서 자리를 옮기듯 나의 생명도 장막처럼 뜯겨서 옮겨질 것이다” 라고 했다. 목동은 양들이 풀들을 다 먹어 치우면 그 다음에 다른 풀밭으로 옮기는 것이다. 그런데 아직도 푸른 풀들이 많이 남아 있는데도 갑자기 텐트를 뜯어 정신없이 다른 곳으로 달아나는 그림이다.

또 이어지는 그림은 “베짜는 사람이 베를 다 짜면 베틀에서 베를 거두어서 말듯이 나도 나의 목숨을 다 짠 베처럼 말아야 할 것이다” 라고 했다. 이번에는 자신의 삶을 베틀에 걸려있는 옷감으로 비유한 것이다. 이번에도 베를 짜는 사람이 아직 더 짜야 하는데 갑자기 일이 생겨 줄을 끊고 짠 베를 둘둘 말아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림이다. 두 그림 다 주님께서 갑작스럽게 자신의 생명을 끊으신다는 것이다.

새번역에서 13절은 “날이 샐 때까지 울부짖었다” 라고 했는데 원어는 “평탄하게 아침을 기다렸다” 라는 뜻이다. 밤을 꼬박 새우며 조용히 날이 밝기만 기다렸다는 뜻이다. 여기서 밤은 캄캄한 밤 같은 자신의 삶을 비유한 것일 것이다. 주님께서 다시 밝은 아침을 맞게 해주시길 기도하며 기다렸다는 뜻이다. 그러나 자신의 상황은 “사자가 나의 뼈를 바수어 먹기라도 하듯이” 했다는 것이다. 새번역은 이 말에 맞추어서 울부짖었다라고 번역한 것이다. 히스기야는 사자가 자신의 뼈를 바수어 먹는 것 같은 고통을 겪고 있었지만 조용히 하나님께 기도했던 것이다. 날이 가고 밤이 오면 주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끊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사자는 하나님을 비유한 것이다. 뼈가 바수어지는 듯한 고통을 자신에게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히스기야는 그런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좋은 신들과 나쁜 신들로 구분해서 믿던 사람들은 자신이 아픈 것은 나쁜 신들 때문이니 좋은 신들께 간구했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믿고 있기에 자신에게 고통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지만 그 하나님께 또한 살려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께서는 구원자이시면서 또한 심판주로 묘사하고 있는 것도 이와 같은 것이다. 요한복음에서 천지를 말씀으로 창조하신 분께서 자신을 믿는 자들을 구원하러 이 땅에 오셨다고 했다. 요한은 또 계시록 끝부분에서 그분이 또 심판주로 다시 오신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생명을 주신 분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고 장차 심판하실 분도 역시 그리스도 예수이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14절에서 히스기야는 제비처럼 학처럼 짹짹거렸다는 것이다. 또 비둘기처럼 울었다는 것이다. 제비나 학은 하나님께 간절히 간구하는 모습을 나타낸 것이고 비둘기는 슬피 우는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눈이 멀도록 하늘을 쳐다 보았다는 말은 울다 울다 지쳐서 눈물 조차도 말랐다는 것이다. 그래서 힘이 없어 눈을 뜰 수 없을만큼 오랫동안 간절히 기도했다는 뜻이다. “주님 나는 괴롭습니다” 라는 말은 “주님, 나는 억압을 받고 있습니다” 라고 말한다. 억압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신 것이다.

보통은 억압하는 사람에게 자신을 고통에서 건져달라고 하지 않는다. 이 억압하는 사람에게서 구해달라고 다른 사람들에게 요청하는 법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으로 부터 온 것이니 하나님 한 분께 간구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고통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지만주님께서 구해주실 분도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께 간구해야 하는 것이다.

15절은 원어에서 “내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 라는 말로 시작한다. 주님께서 자신에게 말씀하셨고 주님께서 그대로 이루셨다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 말을 주님께서 이미 응답하셨으니 안심한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하지만 문맥으로 보면 주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거두어 가실 것이라 했고 이미 그 것을 이루고 계시니 자신이 하나님께 어떻게 따지겠는가 라는 뜻이다.

이어지는 “나의 영혼이 번민에 싸여 있으므로 내가 잠을 이룰 수 없다” 라는 말은 “나는 나의 모든 삶의 기간 동안 천천히 걷겠다. 왜냐하면 내 영혼의 슬픔 때문이다” 라는 뜻이다. 천천히 걷겠다는 말은 형이 확정된 사람이 사형장으로 가면서 천천히 걷는 모습과도 같은 것이다. 하나님의 뜻에 조용히 순종하겠다는 뜻이다. 이 말을 보아서도 히스기야는 아직 병이 나을 것이라는 응답을 받지 않았을 때의 심정을 말한 것이다.

16절은 그렇게 하나님 뜻에 순종하겠다고 심정을 밝힌 후 한 말이다. “주님, 주님만 섬기고 살겠습니다. 주님만 섬기겠습니다” 라는 말은 새번역 번역자들이 의미를 살려 번역한 것이다. 원어는 “이것들로 인하여 모든 사람이 삽니다. 나의 영혼의 삶도 이것들 안에 있습니다” 라는 뜻이다. 이것들이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행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행하시는 것에 따라 모든 사람이 산다는 것이다. 자신의 삶과 죽음도 역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행하시는 것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저를 낫게 하시고 다시 살게 해 달라고 간구하고 있다.

17절은 “주님께서 이 몸을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져 주시고” 라고 했는데 원어는 “보라!, 저의 유익을 위하여 저는 큰 고통을 겪었습니다. 저를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저주신 분은 바로 당신입니다” 라는 뜻이다. 히스기야는 자신에게 고통을 주신 하나님은 자신을 바른 길로 이끌고 깨닫게 하시려는 것이었다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또 원어는 이어서 “왜냐하면 당신은 나의 모든 죄를 당신의 등 뒤로 던져버리셨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을 한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죄를 하나님의 등 뒤로 던져 버리셨다는 말은 완전한 용서를 뜻한다.

18절은 “스올에서는 아무도 주님께 감사를 드릴 수 없습니다” 라는 말은 이미 죽어서 지옥에 있는 사람은 주님께 감사를 드릴 수 없다는 것이다. 또 “죽은 사람은 아무도 주님을 찬양할 수 없습니다” 라고 했다. 이는 죽은 상태에 있는 사람은 주님을 찬양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 마지막으로 “죽은 사람은 아무도 주님의 신실하심을 의지할 수 없습니다” 라고 했다. 원어는 “구덩이로 내려가는 사람은 주님의 신실하심을 의지할 수 없습니다” 라는 뜻이다. 죽음이 확정되어 멸망의 구덩이로 내려가는 사람은 더이상 주님의 용서하심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죽으면 완전히 사라진다는 뜻이 아니다. 히스기야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부활에 관한 분명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성경을 연구하다가 부활의 신앙을 갖게 된 것이고 예수님 오신 뒤에 믿는 자들은 부활한다는 것을 완전히 믿게 된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부활의 주님을 만났기에 하나님을 믿지 않고 죽은 사람들은 영원히 멸망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19절은 살아있는 사람만이 주님을 찬양할 수 있듯 히스기야도 주님을 찬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경험을 한 아버지들이 아이들에게 주님의 신실하심을 가르쳐 준다는 것이다. 이처럼 신앙은 자손들에게 전달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경험한 놀라운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자손들에게 증거되고 그들도 역시 그 신실하신 하나님만 믿고 살게 해야 한다.

20절은 “주님, 주님께서 저를 낫게 하셨습니다” 라고 했는데 원어는 “주님께서 분명히 저를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라는 확신이다. “우리가 수금을 뜯으며 주님을 찬양하겠습니다” 라는 말도 그러한 확신을 다른 말로 표현한 것이다. “사는 날 동안 우리가 주님의 성전에서 주님을 찬양하겠습니다” 라는 말은 인생이 짧다는 것을 깨닫고 하는 말이다. 다시 낫는다 해도 주님께서는 자신을 다시 데려가실 것이라는 것을 알고 하는 말이다. 살아있는 날 동안 언제나 성전에서 주님을 찬양하겠다는 것이다.

이 시는 히스기야가 병이 나은 것에 초점을 두고 찬양한 것이 아니다. 인간의 유한함을 깨닫고 모든 것은 다 하나님께 달려있다는 것을 노래한 신앙고백이다.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는 자들만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경험하며 찬양을 드리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믿는 자들이 병에 걸려 낫기도 하고 죽기도 한다. 우리도 히스기야처럼 우리의 병이 나았다며 할렐루야 외치는 믿음이 되면 안된다. 병이 낫지 못하고 죽는 사람들도 많이 있기 때문이다. 또 병이 나았다 해도 잠깐 삶을 연장시켜 주신 것에 불과하다. 그 남은 잠깐의 시간 동안 항상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이 말씀의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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